전체기사보기
일본6대일간지 ㅣ 정치 ㅣ 경제 ㅣ 사회 ㅣ 문화 ㅣ 연예 ㅣ 그라비아 ㅣ 스포츠 ㅣ 역사 ㅣ 인물 ㅣ 국제 ㅣ 뉴스포토 ㅣ 뉴스포토2 ㅣ 동영상 ㅣ 동영상2 ㅣ 독자 게시판
섹션이미지
일본6대일간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예
그라비아
스포츠
역사
인물
국제
뉴스포토
뉴스포토2
동영상
동영상2
독자 게시판
회사소개
회원약관
개인정보취급방침
광고/제휴 안내
사업제휴 안내
소액투자
기사제보
HOME > 뉴스 > 연예
글자 크게 글자 작게


40% 시청률 일드 '가정부 미타', 1년 만에 재방송
아스다 가 네 자매의 촬영 에피소드와 함께 방송될 예정
 
방송 연예팀
40%의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한 마츠시마 나나코 주연 드라마 '가정부 미타'가 일본 수도권 지역에 재방송 된다.
 
드라마 '가정부 미타'는 아버지의 불륜으로 어머니가 자살한 가정에 미스터리한 가정부 미타가 들어오게 되고, 시키는 일은 뭐든지 완수하는 미타가 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방화, 살인 등 다소 과격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가족의 화합을 만들어 간다는 내용이다.
 
이번 재방송 드라마에선 아스다 가(家) 네 자매를 연기한 쿠츠나 시오리(19), 나카가와 타이시(14), 아야베 슈우토(14), 혼다 미유(8)가 1년 만에 나눈 촬영 뒷얘기 등도 함께 소개된다. 

가정부 미타의 오히라 후토시 CP는 "1년 만에 미타와 재회할 수 있어 기쁘다"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재방송되는 '가정부 미타'는 12월 16일 일요일 오후 2시, 일본 니혼TV 채널에서 첫회와 2회가 방송되며, 3회부터는 평일 오후 3시 55분부터 방송될 예정이다.

▲ '가정부 미타'     ©JPNews
 

 

ⓒ 일본이 보인다! 일본전문뉴스 JPNews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기사입력: 2012/11/23 [09:54]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일본의 문화에 대해 매우 재미있게 생각합니다. 가정부 필요하세요? 12/11/24 [03:20]
만일 서양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 - '여호와'가 소리가 아닌 뜻을 담고 있음을 깨달았다면 근대사회의 역사가 이렇게까지 복잡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건 소리값으로 한정된 사물은 필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데쓰노트'에서 보았듯 설령 저승사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이름을 살생부에 적으면 죽는다.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신 역시 자신의 이름을 살생부에 적으면 죽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자체로 모순이다. 신에 대한 성격 정의에 따르면, 필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인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지는 동안에도 신만은 영원하다. 그래서 절대적이다. 그런데 이름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신은 반드시 죽는다. 이름이 불리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을 죽이고 싶다면 이름이 불린 순간 재빨리 적으면 된다. 그럼 그 신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논리에 따르면 '캥거루'도 죽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호주 원주민의 개념에 근거하여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금 뭐라고 그랬지?'도 죽일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다. 말도 안 되지 않는가! 이것은 그냥 질문이다. 물어봤을 때에만 돌아올 수 있는 대답에 불과하다. 그래서 신에겐 이름이 없어야 한다. 오직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 - 즉, 뜻만 있어야 한다. 동양에선 이것을 '神'이라 보았고, 유대인들은 'Jehovih'라 적었다. 언어체계가 달랐기 때문에 드러난 자연한 차이이다. 문제는 유럽의 따라쟁이들이 소리값만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신과 저 신이 달라져 버렸다.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모세는 신을 보았을 것이다. 이집트 병사들이 칼을 들고 쫓아왔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넋을 놓고 있었더라면 필경 신과 만났을 것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될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무한한 우주와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우주의 법칙 아래 놓여있다. 은하단과 우리 은하, 태양계, 지구가 정의하는 질서 아래 놓여있으며, 당장 만나러 가지 못 해도 언젠간 죽음을 통해 신과 만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신은 자연스럽게 찾아와야 한다.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만나면 온전히 그의 의지를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집트의 병사들이 신을 보았는지 의심해봐야 한다. 병사들은 파라오의 명령을 받들 뿐이다. 다른 누군가가 신의 의지를 해석하는 순간부터 그를 믿을 수 없다. 그가 깨달은 진리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혀를 통해 소리로 바뀌는 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발생할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리는 필멸의 존재로부터 쏟아져나오는 법이다. 더구나 그것이 전차의 마차바퀴 소리라면 매우 강하게 의심해봐야 한다. 방금 그곳으로부터 모순을 느꼈다. 참말로 그것이 옳다면 왜 너는 같은 방법을 통해 신과 만나려 하지 않느냐? 그래서 모세는 도망쳤다. 그리고 외쳤다.

"다들 뛰어라! 신이 저쪽에 있다!"

물론 모세라고 해서 신의 뜻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본 모순이 이쪽에서 본 모순보다 작았을 뿐이다. 신이 완벽한 무오류의 존재라면 인식의 주체인 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보다 오류가 작은 쪽에 있을 것이다.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뿐이다. 신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 유일하다. 그래서 모세는 엉덩이를 걷어차며 외쳤다. 죽기 싫으면 다들 뛰란 말이야!
지금 파라오는 강제로 나를, 그리고 내 일족을 신과 만나게 하려 하고 있다. 이쪽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말이지? 거짓된 입으로부터 쏟아져나오는 말에 담긴 모순을 느꼈어. 그래서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거기에 신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 사용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누구도 진리를 말할 수 없을만큼 세상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을 땐 정답이 아닌 쪽을 죽여라."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를 죽였다. 신의 이름으로 파라오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에 담긴 압제자를 죽였을 따름이다. 순간 신이 보였다. 반대쪽 강가에 신이 있다. 우리는 그 신을 찾으러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자 강물이 열렸다. 이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파라오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으니, 군대를 버리면 된다. 피라미드를 쌓는 일에 노예로 동원하고 있으니, 피라미드를 버리면 된다. 홍해는 자연히 열릴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도리어 피라미드가 귀찮도록 쫓아오고 있으니 붙들려 가는 일만 두려울 뿐이다.
붙들리는 순간 방금 보았던 신의 뜻은 파라오의 인식에 담긴 피라미드 내부에 고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 설령 자신은 신의 뜻을 열심히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고정된 소리에 담긴 뜻은 이미 뜻이 아니다. 그래서 뜻이 죽는다. 신도 따라 죽는다. 대신 파라오는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소리만을 쥐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소리와 마찬가지로 미라가 되어 버렸다.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는가? 모든 완벽한 진리가 하나의 체제에 담겨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무엇을 쌓아올리고 있는지 몰랐으며, 뜻과 소리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단순히 서양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뜻문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한자도 소리에 불과하고, 일본 사람들이 소리문자라고 알고 있는 가나문자 또한 뜻일 수 있다. 기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뜻과 소리를 주관하는 나 자신을 어느 점에 두느냐에 다르게 인식되어질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저쪽에 존재하는 큰 모순이 이쪽의 작은 모순을 인식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는 큰 모순인가, 아니면 작은 모순인가? 목적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어찌 됐건 가장 큰 모순을 인식하기 전에는 작은 문제를 풀 수가 없다.

이번 파라오의 통치기간이 끝나는 순간에도 신은 다시 자유를 찾을 것이니, 이 소리를 통해 설계된 체제는 기실 거대한 피라미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어찌 한 순간이라도 머물러 있음이 있겠는가? 파라오와 모세, 둘 중 한쪽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었다. 다만 보다 작은 모순을 보고, 못 본 쪽이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것들을 박제된 모형 안에 우겨넣는 쪽이 반드시 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소리에 뜻을 담아두었으니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뜻도 잊혀질 것이다.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손에 넣었으나 곧 잃어버릴 것이다.
대신 파라오를 향해 최초로 도전했던 쪽만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모든 피라미드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함께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가 유명하다. 피라미드도 지키지 못한 죽은 파라오 뜻을, 산 모세가 훔쳐간 셈 아니겠는가?

... 두고 봐라. 나는 한국인이다. 그리고 일본의 뉴스를 매우 재미나게 읽고 있다. 흐흐흐~~ 수정 삭제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최근 인기기사
일본관련정보 A to Z
  회사소개회원약관개인정보취급방침 ㅣ 광고/제휴 안내사업제휴 안내소액투자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일본> (株) 文化空間 / (株) ジャポン 〒169-0072 東京都新宿区大久保 3-10-1 B1032号 
Tel: 81-3-6278-9905 Fax: 81-3-5272-0311 Mobile: 070-5519-9904
Copyright ⓒ JPNews. All rights reserved. Contact info@jpnews.kr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