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인출기 앞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괜시리 고개가 떨구어진다. 뭐, 언제나 주머니 사정하고는 담 쌓고 사는 편이지만 그래도 속속들이 내 주머니를 남에게 보이는 것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 같은 시각장애인은 어쩔 수가 없다. 은행의 현금 자동 인출기등을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속속들이 주머니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괜찮은 편이다. 만약 내 통장 잔액이 3,200원이 아니고 3,200억이라면 나는 고개만 떨구는 것이 아니라 목숨도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 가끔 100 만원 이상의 돈을 은행에서 찾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거 누가 나를 돈 많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따라오는거 아닌가?” 그런 의심말이다. 그래서 자꾸 누가 따라오지 않는지 슬슬 뒤도 돌아보고…
실제 내 아내는 잘 아는 사람한테 돈을 도둑질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당한적이 있다. 일본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할 때였다. 역시 현금을 인출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로 했다. 그래서 아주 친한 유학생과 같이 인출기를 이용했는데 나중에 카드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만 깜빡하고 현금을 인출한 뒤 카드를 지갑에 넣는 것을 잊었다. 잔액을 확인하니 벌써 30 만엔이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은행에 신고하고 경찰의 도움까지 받아 돈은 찾을 수 있었지만 사람에게 한 번 느낀 배신감은 오래 갔다고 했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나 같은 시각장애인도 참 편리해졌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이오히려 불편해 지는 경우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은행의 atm이다. 전에는 주로 버튼식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터치스크린으로 작동하는 기계로 대체되어서 시각장애인이 이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라치면 나처럼 돈이 없는 사람은 발가벗겨지는 기분을 감수해야하고 돈 많은 사람은 또 다른 느낌의 불안감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일본의 atm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 생활 3년째인 지금은 그런 문제는 많이 사라졌다. 일본도 터치스크린으로 작동되는 기기가 많지만 최근에는 시각장애인도 함께 이용 가능한 atm 기기들이 늘어 나고 있다.
대개의 은행이나 편의점에 있는 atm 기기들은 터치스크린과 함께 시각장애인이 사용 가능한 전화기의 수화기 모양의 장치가 별도로 부착되어 있는 것. 이 장치를 이용하면 수화기를 통해 마치 폰뱅킹하듯이 음성으로 안내를 받아 입출금이나 계좌이체등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시각장애인이 이용 가능한 별도의 자동입출금기를 설치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런데 왜 자꾸 한국은 별도의 기기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아예 시각장애인하고는 함께 살기 싫기 때문일까? 자꾸 별도의 기기, 별도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냥 누구나 사용하는 기기에 시각장애인이 함께 사용 가능한 시스템을 하나 더 붙이면 좋은데 말이다.
만약 현재의 일본과 같은 atm의 음성 출력 기능에 한국어나 영어, 중국어를 넣는다면 시각장애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이용이 가능한 기기가 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유니버셜 디자인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atm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음성이 나와도 말이다. 아직 기계적인 일본어에 잘 적응이 안되서이다.
눈이 보이는 편한 사람들에게는, 저도 마찬가지고 이런부분은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시각장애인에게 당당하게 살라는 말은 이런 자그마한 것부터 고친 다음에 생각을 해야겠네요. 아니, 자그마한 게 아니죠. 돈이 관련된 기계인데. 한국도 얼른 시각장애인이 편하게 은행거레할 수있게 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