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에시(되치기)
1
오전 8시. 타니구치 겐지는 1층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다. 자신의 사무실까지 가려면 이런 보안검색대를 5번이나 통과해야한다. 타니구치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 5층으로 향했다.
타니구치의 사무실은 일본 총리관저 5층 비서실이다. 세계 경제 규모 3위 국가 일본을 지휘하는 심장부이지만 건물 자체는 매우 단아한 아니 단조로운 느낌마저 준다. 총리 관저는 설계 당시부터 외관과 내장 모두 ‘일본다운 단순미를 추구한다’는 기조 아래 꾸몄다.
타니구치는 외국 손님들에게 일본의 아름다움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마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어 온듯한 컨셉으로 꾸며진 이 건물을 좋아했다. 유학시절 많이 보았던 뉴욕 맨하탄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은 왠지 자신의 힘을 자랑하려고 몸부림치는 허영에 가득찬 거인의 모습이라면, 관저는 기품있고 절도있는 일본 무사같다고 생각했다.
타니구치는 비서관실 자기 자리에 앉아 습관대로 컴퓨터 스위치를 켜고 암호를 입력했다. 어젯밤 보고서를 마치고 퇴근한 것이 밤 12시가 넘어서였으니 겨우 4시간 밖에 잠을 못잤다. 그러나 머리는 어느때보다 맑았다.
다시 한 번 어제 제출한 보고서를 훑어 보았다. 2일만에 서둘러 만든 보고서였지만 타니구치는 만족했다. ‘과연 총리 각하께서 이 보고서를 채택하실 것인가?’하고 타니구치는 생각했다. 분명 채택할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타니구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사무실에 은은한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의 향기가 퍼졌다. 유학시절 처음 접했을 때부터 타니구치는 이 커피를 사랑했다. 커피의 부드러우면서 단백하고 마신후 혀 끝에 남아도는 단맛, 향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뭉클한 감칠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었다. 이 커피를 마시고 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타니구치가 커피잔을 들고 막 자리로 돌아왔을 때 전화가 울렸다. 스미카와였다. 어젯밤 올린 보고서에 관하여 총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직접 브리핑을 하라는 지시사항이었다. 타니구치는 곧바로 자료를 챙기고 스미카와와 함께 총리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오게 타니구치군. 보고서는 관심있게 보았네.”
총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카랑카랑했다. 그 목소리를 어떤 사람들은 재수없다고 말하곤 하지만, 타니구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간략히 보고 사항을 브리핑하게나.”
스미카와가 옆에서 거들었다. 보고서는 1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다. 그러나 총리는 언제나 짧고 간단한 보고를 좋아했다.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지난 번 한국 세영그룹은 반도체 부품 관련 수출 규제를 발표만하고 참의원선거가 끝나면 없던 일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오너를 구하기 위한 세영의 계획입니다. 우리 일본 정부는 그 세영의 수출규제를 해소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반도체 관련 3개 품목외에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방법도 추가하자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경제 제재를 해야한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세영이 반발하지 않을까? 세영은 그저 흔한 기업들과는 달라. 우리에게 제공한 정치자금을 빌미로 우리를 협박할 수도 있지 않은가?”
스미카와가 옆에서 물었다.
“절대 그럴리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영 자신이 먼저 분해될 것입니다. 아무리 세영이 글로벌기업이라고 해도 한낱 기업에 불과합니다. 그런 기업이 우리 대일본 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걸지는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약속 위반이 아닌가? 우리 일본인들은 무엇보다 약속을 중요시 생각하고 있네.”
“아닙니다. 지금부턴 전쟁입니다. 전쟁에선 어떤 작전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영이 사용한 작전을 반대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스포츠인 유도에 가에시란 기술이 잇습니다. 가에시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여 되치기 하는 기술이죠. 이번에 우리는 세영을 상대로 가에시를 하는 겁니다.”
타니구치와 스미카와가 이야기 하고 있는 동안 총리는 아무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한국을 지속적으로 경제재제 해야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보게나.”
총리가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지금이 한국을 밟아줄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 한국을 주저앉히지 않으면 나중에는 감당 못할 정도로 커질 것입니다. IMF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실질구매력은 2023년 일본을 앞지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지표 말고도 한국이 일본을 앞질러가고 있는 여러가지 지표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반도체, 조선, 전자 등의 산업은 이미 우리가 추월당한지 오래입니다. 현재 일본이 한국보다 앞선것은 겨우 자동차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자동차분야도 전망이 그리 밝지 못한 실정입니다. 차세대 자동차 산업은 크게 에너지와 자율주행 분야로 성장할 것이 예상됩니다. 첫번째로 미래의 자동차 에너지는 전기와 수소가 사용될 것입니다. 이 분야에서 미국과 일본은 전기자동차에 집중한 반면 한국은 수소자동차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 에너지원으로는 수소에너지가 훨씬 유리하다는게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또 자율주행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AI기술과 이를 뒷받침할 통신기술이 중요한데 한국은 벌써 5G 모바일기술을 상업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약 5G 기술의 세계 표준이 한국 기술로 정해질 경우 이런 4차산업혁명이 필요한 자동차기술등에서도 추월 당할 수 있습니다. 또, 한국은 지금도 메모리반도체 부문 세게 1위입니다. 그런데 향후 10년간 한국의 세영 등 반도체 생산기업들이 비메모리반도체 부문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비메모리분야를 핵심 산업으로 육성하려고 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반도체와 이를 뒷받침할 통신인프라, 거기에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AI 기술과 빅데이터를 한국이 보유한다면 일본은 영원히 뒤쳐질 수도 잇습니다."
“다른 이유는?”
“수출 규제와 더불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려는 것은 단지 경제적 이유 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동아시아는 커다란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트럼프, 한국의 문재인, 북조선의 김정은, 이 3명의 지도자가 지금 북핵을 없애고 북조선을 개방경제로 이끌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밝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신경제지도 계획’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정책은 한반도를 크게 H축으로 발전시키자는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한반도의 서해안과 동해안을 세로축으로 하고, 군사분계선으로 대치하고 있는 비무장지대를 가로축으로 연결하는 구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현재 바닷길 말고는 외부와 단절된 한국이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교량국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또, 길이 250킬로미터와 폭 4킬로미터에 달하는 DMZ 지역은 세계에서 보기드문 환경과 평화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한국과 북조선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만들 것입니다. 한국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북조선의 값싸고 우수한 노동력과 지하자원이 결합하면 그 효과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설 것입니다. 그러면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이 현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일본과 미국 그리고 한국을 연결하는 자유주의 3국과,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으로 연결되는 북방 3국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조선의 군사적 대치가 해결되고 평화모드로 나아갈 경우 이런 힘의 질서가 재편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미국은 태평양 인도 라인을 구축해 중국의 확장을 저지하려 하고 있고 중국은 일대일로 노선으로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하며 새로운 패권국가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국제 정세입니다. 이 정세속에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신할 일본의 지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중국의 확장을 막고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우리 일본이 과거의 영광을 되살려 미국을 대신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는 작은 보스 역할을 해야 합니다. 과거부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용인된 역할 분담입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조선이 합쳐지면 이런 동아시아의 패권국가로 도약해야할 우리 일본에게는 적지 않은 위기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국을 어느 정도 견제해야 하고 그 견제방법으로 안보 이슈를 무기로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여 한국의 경제 성장 동력을 차단하자는 것입니다.”
타니구치의 설명은 막힘이 없었다. 총리는 그런 타니구치를 아꼈다. 다른 보좌관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에만 집중해서 정세를 파악하는데 비하여 타니구치는 정치, 경제, 외교, 군사등 다방면에 걸쳐 정세를 살피는 통찰력이 있었다.
“알겠네. 타니구치군. 그럼 세영과 한 약속은?”
스미카와가 물었다. 지난번 세영 김재환 사장이 왔을 때 미리 타임스케쥴을 조정했던 것이다. 그때 약속에 따르면 수출 규제로 인한 경제 위기 여론이 비등해지는 싯점에서 세영 이철용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와 이를 해결한다는 게획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이철용 회장이 일본을 방문하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
“네. 이번 주 토요일 세영 이철용 회장이 일본으로 오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그전에 화이트리스트 제외 방침을 여론에 슬쩍 흘려놓을 필요가 잇습니다.”
“타니구치군이 맡아서 처리하게.”
총리가 타니구치에게 지시했다. 타니구치는 깊게 머리를 숙이고 총리 집무실을 나왔다. 자기 자리로 돌아온 타니구치는 ‘전쟁 시작’이란 짧막한 메시지를 송신했다. 그리고나서 여러곳에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2.
인천공항은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들이 총출동한 듯했다. 세영그룹 이철용 회장은 기자들앞에서 ‘한국 경제를 위해 열심히 하고 오겠다”며 출국장으로 나갔다. 평소 이철용의 동선은 절대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일본행은 일부러 매스컴에 흘렸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한국 경제, 특히 반도체의 위기감에 온나라가 난리였다. 그럴 때 세영그룹 총수인 이철용 회장이 직접 일본으로 걸음을 하는 것이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뉴스였고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특종이고 단독기사였다.
이철용은 평소엔 전용기를 타고 해외로 나갔지만 이번엔 항공사편을 이용했다. 수행원도 거의 없었다. 김재환 경영전략실장과 수행원 두 명뿐이었다. 평소 이철용의 행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리타행 대한항공 퍼스트클래스에는 이철용 회장 일행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안전벨트 경고등이 꺼졌다.
“김 사장. 준비는 틀림없겠죠?”
“네. 회장님. 틀림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아무리 경제문제가 중요하다해도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물론 법적으로는 그렇습니다.문제는 요즘 대법원에서 여론 눈치를 너무 보고 있어요. 이 정권 들어서서 적폐청산이다 뭐다 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지 않았습니까? 또 사법농단으로 양승태 전대법원장이 구속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판사들이 양승태 대법원장을 구속시키고 싶었겠습니까? 대통령과 국민 여론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게 저희가 파악한 내용입니다. 회장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회장님께 유리한 판결을 내리고 싶어도 국민 여론이 무서워 소신껏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때 그럴듯한 명분을 안겨주면 되는 것이죠. 가장 좋은 명분은 역시 경제 위기 탈출입니다. 우리는 판사들에게 명분만 만들어 주면 됩니다. 그동안 우리가 다 관리하고 우리한테 떡값 받아먹으며 판사생활 했던 사람들입니다.”
”김 사장만 믿어요. 솔직히 구치소에 다시는 들어가기 싫으니까…”
이철용은 구치소 생각을 하고는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까지 다른 모든 재벌기업들이 구속되었어도 세영만큼은 구속된 사례가 없었다. 대부분은 회장 아래선에서 미리 차단을 하거나 검찰과 법원에 미리 손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촛불혁명이 만든 정권은 처음부터 적폐청산에 힘을 쏟았다. 세영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이번 이철용의 구속은 촛불혁명이 문제가 아니었다. 과거에는 세영의 오너가 정권 실세와 직접 만나는 일은 공식적 행사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것이 세영만의 철저한 불문율이었고 창업주 회장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지난 정권 실세였던 강남 최여사는 막무가내였다. 세영이 다른 재벌보다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최 여사의 존재를 캐치하고 대응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여자가 하는 짓이 어디 시장바닥 좌판에서 물건 흥정하듯 해왔다. 법이고 절차고 모두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재단 만들었으니 돈 내놔라.” “딸 아이가 탈 말을 내놓으라.”고 우겨댔고, 심지어 이철용을 직접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검은돈이 오갈 때는 오너가 움직이면 절대 안된다. 그 자체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김재환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숨이 나왔다.
비행기는 곧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VIP 도착룸에 전에 보았던 마나베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나베는 이철용 일행을 귀빈주차장으로 안내했다. 주차장에는 메르세데스-벤츠 SLR 맥라렌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철용의 전용 승용차를 비행기로 함께 공수해온 것이다. 이철용의 성격은 매우 까다로웠다. 특히 자신이 이용하는 물건은 반드시 무엇이든 곁에 있어야 했다. 그런 까다로운 성격탓에 그를 모시는 사람들은 늘 안절부절해야 했다.
“영빈관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철용 일행은 도쿄 중심가 모토아카사카에 위치한 아카사카영빈관으로 들어섰다.
“이 영빈관은 궁정건축가인 가타야마 도쿠마가 설계한 건물로, 1899년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을 끝낸 후 일본이 근대화를 이룩하고 대동아공영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 무렵이죠. 메이지천황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지만 소탈한 성격의 천황께서는 정작 너무 화려하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영빈관은 이곳외에도 쿄토에 쿄토쿄엔이라는 영빈관이 있습니다. 아카사카영빈관은 제2차 세계 대전후에는 황실에서 일본 정부로 이관되어 일본 국립국회도서관,법무청법제의견장관, 재판관탄핵재판소, 내각헌법조사회,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 등이 사용하다가 1960년대에 당시 사용하던 영빈관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현재 아카사카이궁을 리모델링하여 영빈관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리모델링에는 5년여의 시간과 108억 엔, 현재 한국원화로 계산하면 약 1100억원을 투자해 본관과 별관으로 지어졌습니다. 일본 국보 226호로 지정된 영빈관을 최초로 사용한 손님은 미국의 포드대통령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영빈관은 국가 원수와 정부 수반 등의 국빈을 맞았을 때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회장님처럼 기업인에게 개방하는 일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
마나베는 마치 관광가이드처럼 영빈관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했다. 건물 현관에 들어설 때 김재환은 곁눈질로 이철용을 살폈다.
매우 흡족해 보였다. 김재환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마나베의 말처럼 아무리 세영그룹 총수라해도 일본 영빈관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김재환은 세영 이철용을 대하는 일본 총리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오후에는 일본 경제산업상과 미팅을 하고, 저녁에는 도쿄 주재 한국 특파원들과 만찬약속이 있다. 경제산업상과 미팅에서 수출 규제 해제를 약속받고 이를 특파원단에게 알린다는게 세영 김재환과 총리실 스미카와와의 사전 약속이었다. 김재환은 이를 위해 미리 대한일보 오규석도 특파원 만찬에 참여하도록 조치해두었다.
“회장님. 약속시간까지 두 시간 남았습니다. 잠시 쉬십시요.”
이철용은 창가에 서서 바깥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은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벚나무는 봄철 하나미(일본의 벚꽃 축제)때 보면 매우 근사하고 화려하리라고 김재환은 생각했다. 그때 노크소리가 났다. 김재환이 문을 여니 마나베였다.
“김 실장님. 전화입니다.”
마나베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김재환이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자 총리실 타니구치였다.
“김 실장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경제산업상께서 오늘 급한 각료회의 참석 때문에 약속을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상황봐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재환은 이철용 회장 앞이란 것도 잊고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이철용이 의아한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경제산업상이 급한 회의가 있어 미팅을 미루자고 합니다.”
“그래요? 언제로 변경되었습니까?”
“그게… 다시 연락을 한다고만.. 죄송합니다.”
김재환이 머리를 깊숙히 숙였다. 이철용은 아무말 없이 푹신한 쇼파에 몸을 맡겼다.
그 시간 오규석은 서주연과 함께 도쿄 시부야역에 위치한 엑셀호텔에 있었다. 다른 호텔과 달리
이 호텔은 로비가 건물 5층에 있었다. 2층은 민간 전철인 이노카시라선 역사였고 1층과 3층 그리고 4층은 쇼핑센터로 이용되는 특이한 건물 구조를 가진 호텔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오규석은 서주연을 침대로 밀었다. 침대위로 던져진 주연의 몸이 푹신한 물침대의 반동으로 출렁거렸다. 침대위에 엎드려진 자세가 된 주연의 스커트가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오규석은 그대로 서주연의 스커트를 들어 올렸다. 서주연의 탐스런 엉덩이와 연결된 길게 뻗은 허벅지와 늘씬한 종아리, 아직 벗지 않은 빨간 하이힐이 오규석의 눈에 들어왔다. 주연의 탐스럽고 동그란 엉덩이에 작고 앙징맞은 팬티가 걸려 있었다. 오규석은 미칠것만 같았다. 주연은 만날수록 미치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여자였다. 오규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로 손을 뻗어 팬티를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얇은 팬티는 찢어지고 주연의 엉덩이가 드러났다. 오규석은 그대로 자신의 지퍼를 내렸다.
오규석이 처음 서주연을 만난 것은 김재환과의 술자리였다. 그후 오규석은 서주연의 이른바 스폰서가 되었다. 이후 서주연은 대한일보가 운영하는 종편에 간간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한차례 소나기 같은 섹스를 마친 후 오규석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김재환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기자 여러분. 오늘 저녁 세영 이철용 회장님과의 저녁약속은 급하게 취소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잡혀있던 약속이 깨진 것은 경제산업상만이 아니었다. 김재환이 미리 스케줄에 넣어두었던 일본 관료나 실무자들과의 약속 모두가 뒤집혀졌다. 심지어 세영에게 물건을 판매했던 거래처마저 이철용을 만나주지 않았다. 일본에 온 지 3일째 밤 이철용은 롯폰기힐즈에 있는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술을 마셨다. 곁에는 김재환과 오규석이 함께 자리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김재환은 몸둘바를 몰랐다. 자신만만하게 진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이철용은 말없이 사케만 마셨다.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김재환은 오규석이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하고 바랬다.
“아무래도 일본이 경제 보복을 본격적으로 할 것같습니다.”
김재환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오규석이 말했다. 김재환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경제 보복을 본격적으로 하다니요?”
“며칠 전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수도 있다는 보도가 일본 산케이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출규제에 대하여 WTO에 제소하겠다고 하자 일본에서 이번에는 안보 이유로 화이트리스트 제외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수출 규제는 단번에 끝날 일이 아니고 장기적인 전쟁이 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그럼 어찌 될 것 같소?”
“한국의 정권차원에서 해결하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같습니다. 일본은 줄곧 역사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1965년 한일기본협정으로 이미 끝난 과거일을 한국이 자꾸 뒤집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본 주장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 정권에서 향후 재발을 약속하고 대통령이 특사를 보내거나 직접 총리와 만나 외교적으로 처리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규석이 대한일보 지면을 통해 줄곧 주장해 오던 바였다. 김재환과 오규석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이철용은 아무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