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짱 파파! 이름이 뭐야?"
"응. 난 아빠라고 해"
"그럼 아빠상이네. 아빠상" 모처럼 제대로 고생했다. 아무리 아이들을 좋아한다 해도 한꺼번에 20명을 상대하기란 만만치 않다. 아이들도 오랜만에 만만한 상대를 골랐나 보다. 평소엔 제각기 흩어져 논다는 아이들도 이날 만큼은 내 주위에서 떠날 생각을 안 한다.
아마 10월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밤 12시에 귀가하니 아내가 유치원에서 온 통지서를 꺼낸다. '1일 교사 의뢰'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밑에 당당히 씌여져 있는 내 이름. 나와 또 다른 두명의 학부모와 함께 10월 29일 큰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의 1일 교사를 맡아야 된다는 내용의 통지서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우리 말고 다른 집은 모두 엄마가 1일 교사인데 우리만 아내 이름인 '다카하시 미와코'가 아닌 내 이름이 당당하게 명부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29일이면 평일이다. 철야를 밥먹듯이 하는, 매일같이 격무에 허덕이는 내가 평일날 시간을 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아내 눈치를 봐가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어? 다른 데는 다 엄마들이 하나 보네..." 그러자 아내는 말없이 눈을 흘기더니 자신의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아내는 임신 7개월. 그런 아내가 인간의 일생중에 가장 활발하게(?) 나쁘다는 서너살짜리 아이들과 놀 순 없다.
아내 말로는 임신한 엄마들은 아빠들이 1일 교사를 하는 게 유치원의 암묵적인 룰이라고 한다. 하긴 그도 그럴테다. 임신중인 엄마들이 1일 교사를 하다가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일본 유치원의 이런 학부모 1일 교사는 반강제적이다. 사립유치원은 모르겠지만, 우리 아이처럼 국립대학 부속 유치원에 다닐 경우 1일 교사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 한달 전에 통지서를 보내는 이유도 날짜가 혹시라도 안 맞을 경우 다른 부모들과 의논해서 서로 바꿀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그래도 왠지 불안해진다.
"괜찮아. 그냥 아이들 노는 거 지켜보면 된다니까 아마 간단할꺼야" 그리고 운명의 10월 29일이 다가왔다.
▲ 대부분의 일본 유치원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 ©박철현/jpnews | |
아내의 말만 믿고 가벼운 마음으로 큰 딸의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아이는 무척이나 들떠했다. 전 가족이 단체로 유치원에 간 적은 몇번 있었지만 단 둘이서 손 잡고 유치원에 간 적은 처음이다.
"미우야, 아빠랑 같이 유치원 가는 거 좋아?" 씨익 웃고 마는 미우. 손을 세차게 흔들면서 의기양양해 한다. 가는 도중에 다른 집 아이들과 엄마들을 만났다. 이쪽에서 아침인사를 건네면 엄마들은 웃으면서 응대해 주는데 아이들은 다들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이거나 혹은 그냥 도망가거나, 엄마뒤로 숨거나. 십중팔구 그런 반응이다.
아내와 친한 하루카 짱의 엄마를 만났다. 나도 몇번 만난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친교가 있다. 왜 다들 저러냐고 물으니 "아빠 쪽이 1일 교사하는 거 처음이라서 그런 거예요"라고 말한다.
일전에 '일본경찰들 반말 좀 하지 맙시다'라는 기사에서 밝혔듯이 내 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4시간에 불과하긴 하지만 과연 아이들과 얼마나 친해질 수 있을지, 울어버리면 어떡하지 등등의 잡다한 고민이 든다.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나를 포함한 1일 교사 세명을 소개했다. 그런데 벌써부터 사건이 터진다. 앞서 소개된 두명의 엄마들이 인사할 때는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거나 혹은 작은 박수를 보내던 아이들이 내 소개에 이르러 시끄러워진다. 몇몇은 표정이 구겨진다.
"미우짱 파파다!"
"무섭다!"
"이름 뭐야?" 나도 한마디 한다.
"다들 안녕? 오늘 하루 같이 있을 미우짱 파파예요. 아빠라고 부르면 돼요"
그런데 정작 유치원이 시작되자 아내 말대로 별로 할 게 없다. 미리 건네받은 스케쥴표를 보면 9시부터 10시까지는 '소메가미'(染め紙)를 한다고 되어 있다. 물감 통을 여러개 만들어 그 안에 화선지등 스며들기 쉬운 종이를 넣어서 이런저런 작품을 만들어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도 안 모인다. 미끄럼틀을 타고 있는 아이들 쪽으로 가서 "저기서 '소메가미' 할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고 권유해 보지만 다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에 바쁘다. 도망가는 아이중 한명을 잡아서 강제로 무등를 태웠다. '무섭지! 무섭지!' 겁을 주면서.
처음 무등을 태웠던 슌스케는 정말 무서운지 이내 비명을 질렀다. 한 두어바퀴 돌고 금방 내렸다. 그러니까 소메가미 하러 가자고 재차 꼬셨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선생님이 이쪽으로 온다.
"굳이 그렇게 권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놔 두시면 지네가 알아서 놀거예요" 사실 이 유치원은 아이들에게 절대 공부를 시키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또 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히라가나는 물론 영어까지 가르치는 사립유치원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유치원들은 이런 류의 '공부'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같으면 엄마들이 조바심을 낼 법도 한데 여기는 엄마들이 더 태연자약하다. 아내는 "그런 공부(히라가나, 산수, 영어등)는 초등학교 들어가서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보니 일부러 경쟁시키거나 그런 게 없다. 옆집 아무개가 한다고 우리도 시켜야지 라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결국 '소메가미'는 전체 스무명 중에 딱 한명만 참가했다. 그런데 그 한명이 또 공교롭게도 우리집 아이다. 혼자서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저런 형태를 만들고 있다. 잠시 넋놓고 아이를 쳐다보고 있는 나를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한 것은 유타의 펀치였다.
"우리 친구를 괴롭히지마. 이 악당아!" 유타와 슌스케는 친구사이다. 슌스케를 왜 괴롭히냐며 덤벼든 것이다. 네살짜리 아이의 주먹이라고 생각하기엔 꽤 아프다. 이 놈의 자식들! 하며 으르렁거리자 몇명의 아이들이 혼비백산한다. 이게 화근이었다.
도망간 아이들은 이내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나에게 다가왔다. 몇 방향에서 동시공격이 가해지고 나는 다시 악당이 된다. 한동안 그렇게 악당 역할을 열심히 연출했다. 유치원 마당앞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면 되는 거니까 그냥 앉아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하지만 이십여분을 뛰다보니 숨이 막힌다. 나름대로 체력은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서너살 아이들의 스태미너를 따라잡기는 힘들다. 평상에 앉자마자 대자로 뻗었다.
"이때다! 모두 총공격!"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들리고 십여명의 아이들이 평상으로 와 나를 공격한다. 정말 피곤해서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누운 채로 적당히 방어를 해가며 아이들의 공격을 받아줬다. 공격이 성공해서였을까,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무등때문에 겁먹었었던 슌스케도 손을 번쩍 들며 기뻐한다.
그렇게 악당놀이는 끝나나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한 삼십초 후에 슬금슬금 내쪽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아빠상, 나쁜 사람 이제 안하는 거야? 나쁜 사람 해 줘""아빠상, 일어나. 죽으면 안돼. 악당은 마지막에 죽어야지" 녀석들, 역시 같이 안 놀아주니까 심심하지? 하지만 원내에서 놀기엔 시간이 다 됐다. 11시부터는 플레이파크라는 이름의, 유치원 바로 옆에 있는 동산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인솔해서 가는데 나를 쳐다보는 미우의 눈빛이 안쓰럽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불쌍하게 여긴건지 아니면 금세 숨이 막혀 헉헉거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던 건지. 미우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플레이파크에서는 제대로 놀아줘야지.
"아빠상, 나무 올라가 봐" 플레이파크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이 요구해 온다. 나무타기 도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나도 촌놈출신인지라 나무타기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군대제대한 다음부턴 나무타기를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요구라는 점을 강조하는 눈빛을 선생님께 보냈다. 선생은 간절한 내 눈빛에서 나무타기..., 아니 1일 교사로서의 강렬한 열망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자! 그럼 올라가 볼까?" 혼잣말을 하며 오르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박수를 치면서 멋지다를 연발했다. 이 녀석들 방금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악당이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모양이다. 간만의 나무타기는 역시 재미난다. 예전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능숙한 솜씨로 벚꽃나무의 첫 가지가 퍼져 나가는 부분까지 올라갔다. 1.5미터 정도의 높이에 불과하지만 꽤나 높은 느낌도 든다.
한동안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앉아 있으려니 선생님이 그만 내려오라고 손짓을 한다.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선생님은 내가 타다가 마는 시늉을 하겠지라고 생각했단다. 알겠다고 손짓을 하고 내려가려는 순간 중심이 무너지면서 바로 지면에 낙하했다.
쿵!
엉덩이와 허리를 동시에 당했다. 둔탁한 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몰려든다.
"괜찮아?""아빠상 안 아파요?" 조금전까지만 하더라도 악당으로 부르던 아이들이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 아이들의 이런 단순솔직함은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잠시후 선생님과 다른 1일 교사들도 왔다. 괜찮냐고 물어 온다. 괜찮지 않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별일 아니라며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이들과 동산을 뛰어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보니 금세 오후 1시다.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아이 엄마들이 하나둘씩 몰려온다. 그들은 깜짝 놀랜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몇시간 전만 하더라도 인사는커녕 숨기에 바빴던 아이들이 지금은 나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생님도 "정말 잘 하셨어요. 다음에도 또 부탁드릴께요"라고 말한다. 나로선 그냥 놀았을 뿐인데 좋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다른 1일 교사들과 간단한 소감을 나눈 후 미우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데 미우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빠, 멋있었어. 정말로" 다른 누구보다 우리 아이가 이런 말을 하니 하루의 피곤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오늘 1일 교사는 멋지게 성공한 것 같다.
▲ 이런 길을 따라 플레이파크로 이동한다. ©박철현/jpnews | |
▲ 유치원 바로 옆에 이렇게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아이들은 보통 일주일에 세번정도 여기서 논다고 한다. ©박철현/jpnew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