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신문은 가판 판매량이 생사를 좌우한다. 한국도 그렇지만, 나름대로 스포츠 저널리즘을 추구한다는 일본 스포츠 신문에도 이 말은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다 보니 1면 제목은 선정적일 수 밖에 없다. 또 대문짝만한 활자체와 컬러 사진이 지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실린다. 편의점에 잠시 들른, 혹은 전철을 타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제이피뉴스>에 칼럼을 연재하는 복면 데스크 씨도 "1면은 어쩔 수 없다"고 토로한다. 하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갈수록 경영상태가 악화되고 있는 신문사로서는 일단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봐야 한다. 살아남아야 저널리즘도 추구할 수 있고, 또 고품격 비평도 가능해 진다.
나 역시 이런 상업주의 언론을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애독하는 세르지오 에치고의 칼럼 '가라구치(辛口, 쓴소리)'를 읽기 위해선 <닛칸스포츠>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닛칸스포츠>는 축구뉴스로 정평이 나 있다. 1면에서 자극적인 문구를 접하더라도 일단 축구 지면에만 넘어가면 전국고교축구대회 예선전 소식까지 충실히 접할 수 있다. 요미우리 신문사 계열인 <스포츠호치>는 어쩔 수 없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기울지만 그래도 야구 뉴스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스포니치> 역시 종합 스포츠 란이 충실하기로 유명하다. 스포츠라고 볼 수 없는 프로레슬링의 '듣보잡' 단체의 단신 뉴스도 <스포니치>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스포츠신문의 균형잡힌 '상업주의 저널리즘'은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런데 최근 이 균형추가 상업주의, 혹은 선정주의로 기울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어제(5일) 있었던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오릭스 버팔로우즈 소속의 오제 히로유키(小瀬 浩之, 향년 24세) 선수의 죽음에 관한 뉴스였다.
어제 밤 <후지tv>의 심야 스포츠 방송 '스포르토'는 오제 선수의 사망에 대해 "전지훈련 장소인 오키나와 숙소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면서 "추락사로 보이며 오키나와 현경의 사고사, 자살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니혼tv>의 '뉴스zero'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제 선수는 이치로가 '천재'로 인정한 대형 외야수로 09년 시즌에서는 규정타석에 미치진 못했지만 3할 3리를 기록하는 등 야구 센스를 인정받아 왔다. 24살로 아직 앞날이 창창한 선수로 작년 12월에는 결혼식도 올렸다.
오제 선수가 묵었던 방에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별다른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팀의 사령탑인 오카다 감독은 "2010년 시즌의 활약이 누구보다 기대된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누가 봐도 앞날이 창창한 선수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오제 선수가 발코니에서 실수로 추락해 아까운 인생을 마감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6일 아침 역구내에서 발견한 6대 스포츠신문들은 1면 톱기사로 '오릭스 오제, 자살'이라는 타이틀을 대문짝만하게 박았다. 깜짝 놀라 <닛칸스포츠>를 구입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스포츠신문을 한 부씩 집어 들었다.
▲ '오제 히로유키, 자살인가'로 도배된 2월 6일자 6대 스포츠신문 ©jpnews | |
그만큼 충격적인 뉴스다. 아마 모두들 나처럼 '앞날이 창창한 24살 청년이 뭐가 부족해서 자살했단 말인가?' 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빨리 읽고 싶었다. 하지만 반으로 접혀진 신문을 크게 펴는 순간 '아!' 라는 탄성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반으로 접혀졌을 때는 '오릭스 오제, 자살'까지만 보였던 것이 전부 펴 보니 '오릭스 오제, 자살인가' 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당했다. 보통 때 같으면 접힌 부분을 한번 펴 본 다음 사는데 이번엔 6대 스포츠신문, 즉 <닛칸스포츠>, <스포츠호치>, <스포츠닛폰(스포니치)>, <산케이스포츠>, <도쿄주니치신문>, <데일리스포츠>가 전부 '자살'이라고 써 놔서 당연히 자살했다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이쪽 업계 용어로 '휴먼 인터레스트(human interest)'라는 것이 있다. 정통 매체로 꼽히는 종합일간지가 어떤 사건을 육하원칙에 입각해 풀어 놓으면 스포츠신문이나 주간지 같은 서브 매체들은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풀어내야 한다. 이 때의 원칙이 바로 '휴먼 인터레스트'다.
여기서 '휴먼'은 독자를 의미한다. 사건 자체는 이미 소개된 상태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해 독자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런 독자들의 호주머니를 다시 열게끔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건을 접한 독자들이 가장 흥미(interest)를 보이는 부분이 뭔지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이번 오제 선수의 사망사건의 개요는 어제 밤 tv뉴스를 통해 흘러 나온 것이 '팩트'의 전부였다. 더 빼고 하고 말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매일 발행해야 하는 스포츠신문들은 반나절만에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오키나와 현경이 "자살의 가능성도 포함해..."라는 1차 초동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자살의 가능성'이라는 코멘트를 각 스포츠신문들은 '휴먼 인터레스트'로 선정했다. 하긴 이치로 2세로 촉망받던 유망주가 자살했다고 하면 누구나 흥미를 보일 법하다. 충분히 130엔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실제 기사내용은 어제 밤 뉴스 내용과 똑같았다. 다른게 있다면 동료선수들의 추도 코멘트가 추가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렇게 당당하게 '자살'이라는 표제를 뽑다니. 그것도 6대 스포츠신문 전부 보기에도 무서운 '자살(自殺)'을 대문짝만하게 박았다. '자살'이라는 단어에는 전부 노란색을 썼다. 스스로 '우린 황색 저널리즘이예요'라는 걸 암묵적으로 실토한 것일까?
선정, 상업주의 다 좋다. 하지만 사람 목숨 가지고 이런 장난을 쳐서는 안된다. 이런 제목을 부모나 가족들이 봤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겠는가. 일본 스포츠신문의 자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 기자가 구입한 <닛칸스포츠>. 윗 부분만 보면 '자살(自殺)'이지만 전체를 펴는 순간 '자살인가(自殺か)'가 됐다. 가판 판매량을 늘리려는 목적이겠지만 사람목숨 가지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박철현/jpnew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