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엔 1개, 10엔 4개, 5엔 1개, 그리고 1엔짜리 동전 4개.
이제 곧 팔순을 맞이하는 양금덕(79) 할머니는 주섬주섬 동전을 꺼냈다.
"이봐, 기자 양반. 이렇게 하면 99엔 맞나?"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휠체어에 앉아 한쪽 손으로는 동전을,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작년 7월에 돌아가신 김혜옥 할머니의 영정을 행여 떨어질세라 단단히 잡고 있는 양금덕 할머니.
그녀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끌려와 단돈 한푼도 받지 못한 채 강제노역을 해야만 했다. 같이 끌려와 일을 했던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사망했다. 양 할머니는 억울해서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한다.
그녀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일관된 '묵묵부답'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직접 일본을 찾아 왔다.
할머니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지원모임)은 2년 6개월전부터 단 한주도 거르지 않고 금요집회를 개최했다. 이 모임 회원들은 매주 금요일만 되면 아침 일찍 나고야에서 도쿄로 상경해 미쓰비시 중공업 빌딩(도쿄 시나가와) 앞에서 미쓰비시의 반성과 보상을 촉구했다. 어느새 126주가 흘렀다.
▲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은 매주 금요일만 되면 도쿄 시나가와 역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을 규탄하는 집회를 연다. ©박철현/jpnews | |
지원모임의 다카하시 이사장은 <제이피뉴스>의 취재에 "(태평양전쟁) 당시 고작 10대 초반인 어린 여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징용해 급료를 주지 않는 등 비상식적인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미쓰비시의 행위를, 일본인으로서 너무나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양금덕 할머니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고 있던 1944년 5월 30일, 전남 나주에서 징용됐다. 시모노세키를 거쳐 나고야로 온 그녀는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강제노동을 당해야만 했다.
그녀는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기 전날인 1945년 8월 14일까지 약 14개월간 일했지만 단 한푼도 받지 못했다. 받은 거라곤 고작 99엔. 이 99엔도 미쓰비시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다. 작년 11월 17일 후생노동성이 후생연금탈퇴수당이라며 양 할머니가 14개월간 납입했었던 후생연금을 지불한 것이다.
"일본만 가면 학교도 보내주고 돈도 벌 수 있다고 했어. 그래서 왔는데, 임금이 다 뭐야. 아무것도 못받고 개돼지처럼 일했다. 월급을 달라고 하니까 니네들 월급은 우리가 잘 보관하고 있다, 귀국할 때 다 주겠다라고 하는 거야. 일본사람들 정직하고 착하다길래 그 말만 믿고 정말 인간이하의 취급받아가면서 일을 했는데... 99엔이 뭐야. 99엔이 뭐냐고!"
▲ 눈물을 흘리며 분노하는 양금덕 할머니 ©박철현/jpnews | |
양 할머니는 나주에서만 24명의 여학생들이 끌려왔다고 한다. 모두 11살부터 15살까지 어린 여학생들로 기술 배워주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말에 희망을 품고 현해탄을 건넜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하루 평균 13시간의 중노동이었다.
"화장실 오래쓰면 벌금내고 밥늦게 먹는다고 때리고 욕하고...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어. 전쟁 끝나고 한국 올 때 그간 일했던 임금 달라고 하니까 '고향에 가 있으면 꼭 준다'고 해서 그 말만 믿었는데 벌써 60년이나 지났어. 친구들도 거의 다 죽고 이대로 다들 죽어버리면 그냥 끝나겠구나 싶어서 이번엔 작정을 하고 왔어. 이 놈들이 또 그러면 그냥 드러누울꺼야." 그녀는 당시 끌려온 24명 중 2명이 공장에서 사망하고 22명이 귀국했지만 다들 죽고 이제 4명만 생존해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내내 들고 있던 영정속의 김혜옥 할머니도 그때 같이 끌려온 친구이자 동료였다고 한다.
"김혜옥 할머니가 나보다 나이는 한 살 많았지만 같은 동네고 학교도 같았으니까 그냥 친구같은 그런 사이였는데... 마지막까지 얼마나 억울해 하시던지..." 김혜옥 할머니도 마찬가지였지만 양금덕 할머니도 한국으로 귀국한 후 더 큰 고통을 받았다. 그녀들은 근로정신대로 일본에서 노역을 당했지만, 고향 사람들이 '종군위안부'로 오해를 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던지 말로 다 못해. 일본에서도 그렇게 당하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나쁜 소문이 나돌고. 지난 65년간 받은 고통,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보상받을 거야. 내 죽기 전에 이 한을 풀거야. 억울해서라도 이대로는 못 가." 그러나 그녀는 "최근에는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아 고맙다"며 희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에서도 꾸준히 도와주시는 일본분들도 많고, 한국에서도 어린 학생들이 힘내라고 편지도 부쳐오고 집회도 열고 해 줘서 너무 고마워. 이들에게 짐을 지워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기 전에 해결시켜야지." 양금덕 할머니 일행은 23일 오전 10시 미쓰비시 중공업을 방문해 조기해결을 위한 대책 마련을 강력하게 요구한 후 오후부터는 일본 의원들을 방문해 입법활동을 해 달라는 요청을 할 것이라 한다. 또 24일에는 민주당 최대 실세인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실을 찾아가 '조기해결을 위한 요망서'(이하 요망서)를 전달할 계획이다.
▲ 미쓰비시 중공업 빌딩 입구에 선 양금덕 할머니.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사진은 09년 7월 돌아가신 김혜옥 할머니다. ©박철현/jpnews | |
지원모임이 한국측과 협의하여 작성한 미쓰비시 측에 대한 요망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구조건이 담겨져 있다.
"지금까지 10년간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한 재판을 진행하면서 원고측이 지난 65년간 입어 온 정신적 육체적 피해, 경제적 상황 등을 고려해 인도적이며 현실적인 조기해결을 위해 미쓰비시 측과 지원모임이 다음 세 가지에 대해 협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먼저 '인도적 해결'이라 함은 원고들이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이것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협의를 통해 확실히 밝혀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적 해결'이라 함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원고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을 동안 하루라도 빨리 해결한다는 점을 실현시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원모임의 관계자는 미쓰비시 분만 아니라 "일본정부에도 이런 요구를 할 생각"이라며 "입법활동 요청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생각"이라고 밝힌다.
한편 지원모임이 일본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할머니들이 무임금 강제노동을 당한지 65년이 지났지만 일본정부는 이를 방치시켰다. 당시 미쓰비시 중공업 항공기 제작소는 일반기업이 아니라 국가가 벌인 전쟁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곳이다. 일본정부는 전후 적극적인 조사를 통해 미쓰비시의 노동실태를 파악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이를 방치했다. 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져야 한다."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권리주장을 한 지 12년이 지났다. 그녀들은 1998년에 후생연금 탈퇴수당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그녀들의 주장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채 후생연금기간이 규정기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급자격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후 재판과정에서 할머니들이 후생연금탈퇴수당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2년간의 정신적 고통에 대해 국가의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정부는 2009년 11월 99엔이라는 비상식적인 탈퇴수당을 지급함으로써 보다 큰 정신적 고통을 가했다. 상식을 벗어난 기계적인 법률 적용으로 인해 할머니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안긴 것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 양금덕 할머니는 "난 잃을 게 아무 것도 없어"라며 다시한번 "내가 죽기전에 꼭 해결을 볼 거야"라며 의지를 다진다. 최근 민주당은 시베리아 억류자들에 대한 피해보상법률안을 참의원 입법안으로 정하는 등 입법활동을 통한 전후 보상안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본정부가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의 무임금 강제노역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 휠체어를 타고 미쓰비시 중공업 빌딩으로 이동하고 있는 양금덕 할머니. 한일 양국 매스컴들도 많이 보였다. ©박철현/jpnew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