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히키타 쿠니오가 쓴 <오타쿠의 문장>이란 소설을 읽었다. 솔직히 썩 재미있었던 건 아니다. 누군가 그 책 재미있어? 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니. 라고 답할 것이다. <오타쿠의 문장>은 미스터리로 보거나, 스릴러로 보거나 대단히 훌륭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중도에 집어던지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장르로서의 완성도나 즐거움과는 별개로 <오타쿠의 문장>에는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거침없이 펼치는 작가의 주장에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마흔 다섯 살의 평범한 직장인 이시와타리의 초등학교 4학년 딸이 납치되어 며칠 뒤 시체로 발견된다. 아마도 범인은 롤리타 콤플렉스에 빠진 오타쿠일 것으로 추정된다. 절망과 분노에 빠진 이시와타리는 우연히 알게 된 '기모타쿠', '에로타쿠'를 싫어하는 오타쿠들의 도움을 받아 범인을 추적한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하려 한다. 사적인 복수는 스릴로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오타쿠의 문장>이 흥미로운 것은, 감옥에 갇힌 범인을 굳이 살해하려 하는 이유가 특이하기 때문이다.
1961년생의 작가 히기타 쿠니오는 이시와타리의 딸을 죽인 오타쿠를 '기모타쿠, 에로타쿠'라고 부른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오타쿠와 구별해서 분류하는 것이다. 오타쿠가 독특한 취향을 갖고 몰두하며 빠져드는 사람을 말한다면, 기모타쿠나 에로타쿠는 오타쿠 중에서도 타인을 전혀 배려하거나 이해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에만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칭하는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한 일본에선 수치(恥)란 것이 넘쳐나고 있어요.....수치를 전면에 내보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수치이지만 그것을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지.....수치를 모르는 사람은 비참하니까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성 기호를 수치로 알고 마음에 가진 사람은 많이 있었어요.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게 암묵의 규칙 같은 것이었겠죠. 배척되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있을 겁니다. 다름 사람과 자신과의 경계선을 꼭 만들어두지 않으면 페티시즘은 성립되지 않아요. 경계선을 벗어나 폭주하는 인간이 범죄를 일으키는 게 아닐까요.'
이 말은 <오타쿠의 문장>에 나오는, 러브돌에 빠진 한 오타쿠의 발언이다. 그는 자신이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떠벌리지 않는다.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자신의 취향이 소수의 것임을 알고 있고, 스스로 만끽하는 것에만 몰두한다. '페티시즘에서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 아름다움, 수치 그리고 참는 일. 이것이 중요해요.' 보통의 오타쿠들은 그렇다. 자신의 세계에서, 그것을 확장시키고 파고 들어가는 데에 만족한다.
하지만 경계선을 파괴하는 이들도 있다. 수치를 모르고, 타인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폭주하는 이들. 그들이 바로 히키타 쿠니오가 말하는 기모타쿠, 에로타구다.
이를테면 아무리 소수취향이 중요하다고 해도 페도필리아를 수용할 수는 없다. 그것을 자신의 망상 속에서만 즐긴다면 내버려둘 수 있어도, 그것을 현실세계에서 시도하는 행위를 결코 용서할 수는 없다. 히키타 쿠니오는 그런 인간들이 횡행하는 지금의 일본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불쾌하다.
그래서 수치를 모르는 인간, 귀여운 척만 하는 일본에 대해 히기타 쿠니오는 꽤 예리한 분석과 생생한 분노를 이시와타리를 통해서 한껏 풀어놓는다. 타자의 입장에서 꾸짖기만 하면 설득력이 없을 테니, 진지하고 열성적인 '긍정적' 오타쿠의 입을 통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오타쿠가 아닌 이시와타리가, 오타쿠들의 도움으로 오타쿠의 명예를 더럽히는 기모타쿠와 에로타쿠를 응징한다. 대단히 기묘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오타쿠의 문장>은 이루어져 있다.
물론 소수 취향이란 게 반드시 수치는 아니다. 오히려 획일적인 권력이나 제도에 의해 억압당한 무엇인 경우도 많다. 때로는 추하고 뒤틀린 것을 폭로하고, 충돌시켜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도 사회의 다양성, 건강성을 유지하는 유용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의 취향이나 신념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자신이 정의가 아니고 진리도 아니라는 것. '경계'를 착각하고 폭주할 때 그는, 세상은 퇴행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머릿속이 퇴행하고 말았어요. 그건 말이죠, 미국이 상냥하게 대하는 귀여운 여동생이라도 되고 싶어서일까요. 귀여운 상품이 넘치고 귀여운 것만 찾고, 일본인은 깨끗한 나라를 만들 생각은 따위는 안 하고, 단지 귀여운 일본인이 되려고만 하고 있어. 그것이 편하니까....일본은 귀여운 것만 쫓고 있어요. 어떤 말에도 귀엽다는 말은 딱 들러붙을 수 있어요. 기묘하죠? 유치하고 얄팍한 말이 그 언저리에서 노리고 있어요. 기분나쁜 나라가 되었어요. 일본은.'
사실 <오타쿠의 문장>을 읽으면서 히키타 쿠니오는 우파 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꽤나 보수적이고 폭력적인 가치관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건 분명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타쿠의 문장>에 일면 동의할 수밖에 없다. 히키타 쿠니오가 힐난하는 것처럼, 일본만이 아니라 지금 한국 역시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 오타쿠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타쿠건 아니건,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걸 보고 있으면, 히키타 쿠니오의 분노에 은근 공감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