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물거리는 사랑스런 아기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다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림 한 가운데 거울이 걸려있어 내 얼굴이 비쳐졌기 때문이다. 화가는 왜 그림 사이에 거울을 넣었을까?
화가 ogi(오기)의 전시회 '멍해진 소피'가 지난 5월 도쿄 시부야 분카무라에서 열렸다. 전시회라고 하더라도 벽면 한 공간을 빌린 작은 것이지만,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한 그림을 보고 있자니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이런 귀여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누군지 얼굴이 궁금해졌다.
전시회 한 켠에 붙어있는 화가 프로필을 살펴보니 일본 후쿠오카 출신에 파리 유학을 거친 유학파, 몇 개의 수상내역이 있었지만 눈에 띄게 화려한 이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화가를 더욱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전시회 한쪽에 있던 방명록에 한글로 메세지를 남겨놓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ogi 씨는 1977년 조선학교 선생님이었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경상도 출신, 일제 강점기 때 제철소가 많았던 규슈에 징용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고향을 그리워하셨지만 일본 땅에서 돌아가셨다.
몸은 일본에 있어도 조국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조부의 가르침으로 집 안에서는 언제나 한국어를 사용했고, 한국 음식을 먹었다. 한국어로 수업을 하는 조선학교에서 초, 중,고, 대학교까지 다녔다. ogi는 재일동포 3세 화가 배성옥 씨였다.
어머니가 조선학교 미술선생님이었던 덕분에 일찍부터 미술을 시작하게 된 ogi 씨는 고급학교(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아틀리에에 다니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이후 조선대학교 사범미술학과에 진학했다. 화가를 지향한다면 사범학교보다는 순수미술을 전공하는 편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는 일본 정부가 고급학교를 정규 고등과정을 마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일반적인 일본의 명문대학교를 가려면 고등학교 졸업 수준이 된다는 증명을 할 검정고시를 치뤄야했다. 때문에 고급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일본의 국, 공립, 사립 대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ogi 씨는 사범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지만, 교사 5년 차에 돌연 프랑스로 떠났다.
"뭔가 모르겠지만, 미술 밖에 할 수 없는 환경으로 나를 데려가고 싶었어요. 물론, 집에서는 많이 반대하셨죠. 일본에서는 한국인보다 조선 국적의 사람들이 더 민족의식에 까다로운 편이예요. 명절, 제사마다 한복을 입는 것은 물론, 해외에 나가는 것도 어려웠죠. 하지만 절실한 마음에 과감히 떠났습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을 부려 떠난 프랑스 유학이었지만 결코 녹록치 않았다. 프랑스와 교류가 맺어져 있지 않은 조선 국적을 가진 탓에 프랑스 보증인을 요구받는 등 학생 비자를 받기도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프랑스였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맘껏 발 뻗고 자기도 힘들만큼 좁은 방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생활이었다.
프랑스에 도착해서 두 달 쯤 되었을 때, ogi 씨는 텅 빈 방 안에서 우두커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외롭고 우울하고 괴로운 시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겼다. 뭔가 대단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그린 것은 아니었다. 이국 땅에서 홀로 외롭고 우울한 거울 속의 자신. 그런데 이 작품이 프랑스 노제시 미술 콩쿠르 국회의원상과 메달을 안겨주었다.
▲ ogi 씨에게 메달을 안겨준 자화상 © ogi | |
"사실 이 그림은 크기도 작았고, 출품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친구가 제 집에서 며칠 묵었는데, 그 친구가 돌아가면서 '이 집에 있는 동안 전부 좋았는데, 딱 하나 저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쁘다고 해야할까 섬찟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작품이라면 뭔가 있을 것 같다'고 추천을 했어요. 그래서 다음해 콩쿠르에 제 마음에 드는 큰 작품 두 개랑 혹시 모르니까 이 작품을 제출했는데, 다른 것은 다 떨어지고 이 것이 큰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외롭고 우울한 자화상이 ogi 씨를 화가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우연한 수상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그린 모습으로 또 한 번 큰 대회에서 입선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남자친구가 2주일에 한 번씩 꽃을 보내주었어요. 2주일에 한 번이지만 꽃과 잎으로 방이 꽉 찼어요. 여기서 영감을 얻어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죠. 이 작품은 일단 나체의 저를 그린 후 잎을 하나씩 꿰매서 옷을 입혔습니다. 몇 개월간 시간이 걸렸죠" 194cm나 되는 커다란 캔버스에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꽃잎을 꿰멨다. 꽃잎이 마치 옷처럼 ogi 씨를 감싸주고 있는 모습이다. 남자친구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행복함이 그대로 담겨진 이 작품은 프랑스 르 살롱전에서 입선을 하게 된다.
이렇게 프랑스에서도 인정을 받으며 아티스트로서 활약하고 있을 즈음, ogi 씨 그림을 크게 변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임신 그리고 출산이라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제 그림은 언제나 제가 느끼고 경험한 것을 그리게 돼요. 그런데 10개월 동안 임신과 출산은 정말 큰 경험이 되었고, 말할 수 없는 벅찬 기쁨을 안겨주었어요. 머릿 속이 아기로 꽉 차게 되니 그 때부터는 아기 그림을 그리게 되더라구요" 프랑스에서도 인정받은 실력이지만, 이전까지 화가 ogi의 그림에는 통일된 하나의 주제가 없었다. 그림에 따라 스타일도 많이 달라져서 ogi 스타일은 스타일이 없는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이라는 감동을 느낀 ogi씨는 그 때부터 딸 서희(애칭 소피)가 테마인 작품을 위주로 그리고 활동하게 되었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ogi씨는 왜 '멍해진 소피' 전시장 한 가운데 거울을 걸어두었던 것일까? 질문에 대해 ogi씨는
"소피 그림은 모델이 소피지만, 보시는 분들이 자신의 자녀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구요. 그림을 보면서 자녀와 가족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 무엇인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라고 말했다.
일본 오이타현에서 '멍해진 소피' 개인전을 열었을 때, 전시회장 블루바렌 관계자는 ogi씨의 그림에 대해
"그림 속 소피를 보고 있으면 무한한 애정이 전해져 온다. 전시회장 전체가 따사로운 분위기에 감싸진다"고 표현했다. 애정이 담긴 그림을 봤을 때,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분명 무엇인가를 발견하리라.
▲ ogi '멍해진 소피' 전시회 중에서 ©ogi | |
ogi 씨는 현재 일본에서 활동중이지만, 다시 한 번 프랑스에 건너가 아티스트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프랑스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별로 없어요. 순수한 프랑스인을 찾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프랑스는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예술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나라죠. 작품이 잘 팔렸으면 팔린대로 세금을 내고, 만약 팔리지 않더라도 일정 생활비는 지급해주는 시스템이니까요" 그리고, 그녀의 꿈은 하나 더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태어나고 자라셨던 한국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저는 한국 국적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났고, 조선학교 교육을 받았어요. 한국인, 일본인도 될 수 있지만, 어느 쪽도 아니죠. 지난 번엔 tv를 보면서 김연아 선수를 응원하는 저를 보게 되었어요. 난 한국인에 가깝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한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제가 한국인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친구들이 자국 응원을 막 하잖아요. 그게 부러울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갈등은 평생 하게 될 것 같아요" 현재는 한국 국적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났고, 조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한국인, 일본인 어느 쪽도 되면서,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닌 경험은 ogi씨 자아 가득 의문부호를 남기게 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의문부호는 ogi씨를 화가로 성장하게 만들었고, 국경을 초월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했다.
그녀의 바람처럼 언젠가는 한국에서 ogi 그리고 소피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재일동포 3세 화가 ogi (배성옥 씨) © jpnews/hiroki yamamoto | |
▲ 프랑스 메달을 받은 작품은 우연한 기회에 탄생했다 ©jpnews/hiroki yamamoto | |
▲ 재일동포 3세 화가 ogi (배성옥 씨) © jpnews/hiroki yamamoto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