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내의 세 아이 출산기 (1부) 일본 아내가 장인어른을 싫어하는 이유 (2부) 아내가 출산시 비명 안 지른 이유 (3부) 진통은 길었지만 출산은 금방이었다 (4부) 미와코와 나는 첫 아이 미우가 태어나면 생활이 좀 바뀔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했다. 오히려 미와코의 스트레스는 더 쌓여만 갔다. 물론 그 스트레스 원인에는 나도 들어가 있었다. 회사란 사회적 조직은 잘 나가도 바쁘고 어려워도 바빠진다.
잘 나가서 바쁜 건 좋은 일이지만 후자일 경우엔 머리가 아프다. 딱 내가 그랬다. 이제 막 태어난 첫 딸 미우에 전혀 관심을 두지 못할 정도로 아팠고 바빴다.
나는 기자였다. 하지만 회사재정상태가 나빠져 영업까지 뛰어야 했다. 직원도 둘 밖에 남지 않았다. 기사만 썼을 때도 바빴는데 물리적으로 더 바빠진 셈이다. 기자질과 영업질을 순간적으로 바꾸어야 할 때 오는 사고회로 전환에 적응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다.
아침 8시에 나가 밤 12시에 들어오는 시간이 늘어났고, 거래처 상대에 따라서는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셔야 하는 나날들이 근 두어달 간 지속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행위다. 태어난지 이제 한 달도 채 안된 아기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또 굳이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이나 애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산모를 위해서라도 일찍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이 때는 산모에게도 아기에게도 소홀했었다. 적어도 1개월간 산모는 아무 것도 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이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가족이 미와코네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없더라도 집에만 계시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어느 정도 산모를 배려할 것이라 생각했다. 장모님 몸이야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장인어른은 그때만 하더라도 건강하셨다.
당신은 미와코와 미우가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문 밖까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택시에서 내리는 우리 셋을 발견하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우리 손녀딸 어떻게 생겼는지 보자"라며 볼을 부벼댔다. 상상치도 못한 장면에 미와코와 나는 벙찐 표정만 지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왜냐면 장인어른은 우리가 집에 들어갔었던 05년 11월부터 이때까지 거의 우리 부부에 자상한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립하지 못했던 우리 잘못도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딸과 그 남편인데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정했다.
그나마 예전같았으면 바둑이라도 뒀을텐데 장인어른은 한국에서 우리 막내삼촌에게 말도 안되는 패배를 당한 후 바둑자체를 관둬 버렸다. 어쩌면 그 외고집이 우리들에게도 적용됐을지 모른다. 너흰 어디까지나 내 집에 더부살이 하는 거니까 내 룰에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도 나는 참을 수 있었다. 항상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얼굴 맞댈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장인어른과 생활해야 했던 미와코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생활했던 것 같다. 12시가 넘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면 미와코의 '속사포 불평'을, 적어도 20분은 들어야만 했다.
"미우 수유하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도 안 하고 문을 열더니만, 밥 차리라고 하는 거야. 내가 노크 좀 하시라고 하니까 '에잉!' 하면서 문을 쾅 닫는거 있지? 서둘러 수유 끝나고 밖에 나가는데 세상에 '왜 넌 밥시간에 맞춰서 왜 수유하냐'고 그러는 거야. 그게 말이 돼? 다 큰 어른이 밥 좀 늦게 먹는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닌데... 정말 눈물 참느라 고생했어." 또 어떤 날은 이랬다.
"무슨 모임있다고 갑자기 나가더니 술 취해서 돌아오더니만 애를 막 거칠게 다루는 거 있지? 평상시엔 전혀 흥미도 보이지 않다가 술 먹고 자기 기분 좋아졌다고 장난감처럼 그러는 게 어딨어? 당연히 미우는 울었지. 그러니까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만 '아기 젖 먹여라'고 나한테 건네는거야. 미우 우는 게 자기 때문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도 않고 배고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무조건 자기는 잘못없다는 그런 태도. 정말 미치겠어." 등등. 미와코는 이런 류의 불만을 매일 해 댔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처음엔 장인어른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고 또 우리 아기가 결부된 사안이라 화도 나고 했는데 매일같이 그러니 점차 미와코의 불만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녹초가 될 정도로 일해서 밤 12시가 넘어 집에 겨우 들어왔는데, 들어오자마자 '고부갈등'도 아닌 '부녀갈등'을 20분이나, 그것도 매일 들어야 한다고 상상해 봐라. 보통 고역이 아니다.
또 자기를 낳아 준 친아버지 욕을 남편에게 대 놓고 한다는 사실도 걸렸다. 이런 마음은 원래라면 품지 않았을 테지만, 나도 막 딸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그랬을지 모른다. 내가 아기에게 잘 하지 못하고 있었던 현실이, 그러니까 우리 미우도 나중에 커서 이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지레 들었던 것이다.
▲ 장인어른 집에서의 생활에 우리 둘은 점점 지쳐갔다 ©jpnews/박철현 | |
그러던 어느 날 참다 못해 소리를 질러 버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12시 넘어 귀가해 옷을 갈아입는데 미와코가 예의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을 때다.
"있잖아. 아까 저녁 설거지를 하다가 실수로 접시를 하나 깼는데..."
"좀! 그만 좀 해라, 그만." 미와코는 뚝 말을 멈췄다.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으니까 그럴만도 했다. 내친 김에 더 말했다.
"허구헌날 자기 아버지 욕만 하고 대체 왜 그러는거야?"
"그건...""나도 피곤한데 맨날 들어와서 그런 말 들으면 스트레스 받아.""......" 미와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멈춰야 했는데 한번 더 말한 것이 실수였다.
"여긴 우리 집이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고 살자고. 알겠어?" 미와코는 이 말에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미와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내가 한 말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미와코는 아주 나중에 이 마지막 말에 '무책임함'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 때 참 황당했어. 우리 집을 마련해 나가서 살면 다 해결되는 문제일 뿐인데... 우리 집에서 못사는 이유는 돈이 없으니까 그런 거잖아. 그런데 돈 벌어와야 할 사람이 그런 소릴 하니까 이해가 안 갔지.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했어. 물론 한편으로는 내 불만도 못 들어 줄 정도로 오빠도 힘든 거구나 생각했지만 우리 집이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살자는 그 말이 평생 여기서 살꺼야 라는 식으로 들려서 정말 절망감을 느꼈어." 정말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또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미와코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하긴 미와코는 미우를 낳고 산후조리조차 못한 채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장모님과 너무나도 완고한 장인어른과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미우를 하루종일 돌봐야 했다. 그녀가 하루 중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밤 12시 이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가 거부해 버린 것이다.
미와코는 그 다음 날부터 내가 귀가해도 일상적인 것들만 물어왔다. 밥 먹었어? 목욕물 받아놨어. 우편물 왔어... 등등. 미안한 마음에 미와코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도 그녀는 단답형 대답으로 일관했다.
"오늘 유명한 연예인 누구누굴 만났는데 말야. 실물로 보니까 정말 예쁘더라.""응.""어...(사이) 장인어른은 오늘 어땠어?""그냥... 그래.""밥은?""저기 남겨 놨어.""미우는 오늘 뭐 했어?""그냥 울고 자고 그랬어." 그리곤 대화가 끊겼다. 시간이 흘러갔다. 묘한 벽이 우리들 사이에 굳건하게 세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만 하더라도 나는 다른 가족들을 원망했다.
보통은 장모님이나 시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 주는데 왜 우리 가족만 이런 걸까 라는 생각들. 물론 일본에서는 제도적으로만 본다면 남자들도 육아휴가 제도를 사용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 육아휴가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육아에 헌신적으로 참가하는, 이른바 '이쿠멘'(育メン, 육아를 하는 남성)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이걸 사용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4월 어느날 미와코가 작정한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해 왔다.
"오빠, 우리 가족만 따로 살면 안될까?""또 그런다. 돈 없다는 거 잘 알잖아." 일본은 전세가 없다. 자기 집을 가지지 않는 한 모두 월세다. 게다가 처음 월셋방을 계약할 땐 시키킹(敷金, 일종의 보증금. 지금은 월세 1개월치가 대다수라고 하지만 06년 당시만 하더라도 2개월이 일반적이었다)이다, 레이킹(礼金, 집주인에게 주는 사례금. 지금은 0엔인 곳도 많다지만 이 때는 월세 2개월치를 내야하는 곳이 많았다)이다 해서 처음 목돈이 많이 들어갔다.
06년 4월 우리 통장에 남아 있는 잔액은 10만엔이 채 안 됐다. 월급 받아오면 4만엔을 장인어른께 드렸다. 그리고 이런저런 보험료 및 공과금, 생활비로 전부 빠져 나갔다.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도 한 달에 2만엔 정도밖에 저금하지 못했다.
10만엔 가지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런데 이런 말을 꺼내는 미와코가 이상했다. 왜냐면 통장관리를 미와코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미와코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상상하는 순간 비약해 버리고 말았다.
"뭐야! 그럼 지금 내가 비자금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거야?""그런 뜻이 아니고...""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돈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말 하는 거 아냐.""오빠 말고 오빠 집이나..." 그러니까 미와코는 우리 집에 신세를 좀 지고 싶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물론 말도 안된다. 어머니가 돈을 내어놓을리 없다. 그건 미와코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녀린 희망의 끈이라도 붙잡고 싶을 정도로 미와코는 절박한 상태였다. 그리고 난 이 절박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며칠 후의 새벽이었다. 자고 있는데 미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젖 달라는 보챔이다. 처음엔 적응하지 못했지만 몇 개월 지나다 보니 미우의 울음에서 멜로디를 찾아낼 정도로 익숙해 졌다. 이제 조금 있으면 미와코가 미우를 안고 젖을 줄 것이며, 미우는 울음을 멈추고 이내 '츄츄'라는, 젖빠는 소리만 들릴 것이다.
그런데 미우의 울음이 멈추지 않는다. 계속 울려퍼진다. 잠결에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 미와코. 미우 젖 줘." 손을 댄 곳이 비어 있다. 동거했을 때는 각 방을 썼던 미와코와 나지만 처갓집에 들어오면서 4조반(다다미 4장반 크기의 방) 방에서 생활하게 돼 같이 자야만 했다. 미우가 왼쪽, 가운데에 미와코, 그리고 오른쪽에 내가 누웠다. 그러니까 왼손을 뻗으면 미와코 몸에 손이 닿게 돼 있다. 그런데 이 날 미우 젖 좀 주라고 뻗었던 내 손은 허공만 허우적댔다.
게슴츠레 눈을 떴다. 미와코가 없었다. 방문을 여는데 복도 저쪽 세면실 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수돗물소리도 들려온다. 뚜벅뚜벅 좁은 복도를 걸어갔다. 오래된 복도 마루가 삐그덕 삐그덕 거린다. 세면실 문을 노크했다.
"미와코?"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장인어른이세요? 장모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세면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와코가 세면대 앞 바닥에, 새우모양으로 쓰러져 있었다. 세면대에선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미와코! 미와코!" 흔들어 깨웠지만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망설이는데 미와코의 왼손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어지러운 일본어가 깨알같이 적혀있는 플라스틱 용기였다.
설마? 설마!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해야할 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미우는 여전히 울어대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가 마치 있어서는 안 될 그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 무서웠던 새벽이었다.
(6부 '천식'의 무서움을 실감하다로 이어짐)
■ 글쓴이 주
작년에 6개월간 연재됐던 시즌1, 시즌2, 외전을 한데 묶어 단행본 에세이 '일본 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창해출판사, 1만 1,500원)를 출간했습니다. 현재 전국 오프라인 서점과 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인터파크 등 유명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상당히 죄송합니다만, 이번 출간과 함께 시즌1, 시즌2는 사이트 상에서 열람하실 수 없게 됐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출판사 책소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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