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내의 세 아이 출산기 (1부)
일본 아내가 장인어른을 싫어하는 이유 (2부)
아내가 출산시 비명 안 지른 이유 (3부)
진통은 길었지만 출산은 금방이었다 (4부) 어느날 새벽 갑자기 쓰러진 아내 (5부)'천식'의 무서움을 실감하다 (6부) 아버지의 전화는 우리들의 결혼기념일인 8월 22일쯤에 걸려왔다.
마산 부모님들은 결혼기념일을 3월 6일로 알고 있다. 2005년 이 날 마산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2년 6개월전인 02년 8월 22일 이미 일본에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다. 남들이 동경하는 미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현장이었지만, 아무튼 외국에서의 생활에 대해선 꽤 전문가다. 특히 비자분야는 더더욱 그랬다.
아버지는 미와코와 내가 결혼준비 때문에 한국에 있을때 지나가는 말로, 뜬금없이 물어왔다.
"그나저나 니 비자는 그간 어떻게 받았노?"
"그, 그게..."
"솔직히 말해라. 괜찮다." 아버지 말하는 걸 보아하니 당신은 이미 우리가 일본에서 부부였다는 것을 전부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대로 말했다.
"실은 벌써 혼인신고 했었어요." 아버지는 그제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식으로 이렇게 말했다. 화내거나 그런 게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궁금증이 해소됐다는 반응이었다.
"아! 그래서 니 패스포트에 이렇게 적혀 있는 거네. 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한참 생각했다 아이가." 아버지는 뒷 주머니에서 내 패스포트를 꺼내 휘리릭 넘겼다. '일본인의 배우자 등'이라고 적힌 비자 스테이스 인증서가 있는 페이지에서 멈추더니 이런다.
"이 비자가 이해가 안 되서 한참 생각했거든. 그라모 너거 결혼기념일은 8월 22일이네."
▲ 급히 만든 미우의 일본 패스포트. 미우는 한국과 일본 국적을 둘 다 가지고 있어 패스포트도 두 개다. ©박철현 | |
아버지는 단 한마디도 왜 그랬냐 등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자신의 윗 호주머니에서 낡디낡은 수첩을 꺼내 제일 뒷장에 이 날짜를 적어 넣었다.
그 다음 해 추석을 한달여 앞둔 8월 22일 즈음에 일부러 전화를 걸어온 것도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서였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 이야기는 일절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극심한 스트레스로 천식이 재발했던 미와코는 그 후 몇 개월동안 지속된 '이사할 곳을 찾기 위한 주말여행' 덕분에 상당히 좋아졌다. 이틀에 한번씩 사용했던 천식흡입제도 2~3주에 한번꼴로 쓸 정도로 원래 컨디션을 되찾았다.
이런 시점에서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를 미와코는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무조건 가자! 부모님도 미우 좋아할꺼야. 꼭 가고 싶어."
그런데 사실 아버지는 미우를 보고 싶어했지만 어머니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때만 하더라도 언제나 전화상으로 "우리 미우가 고추만 달고 나왔으면 정말 좋았을 건데..."라는 말씀을 항상 하셨다.
어머니를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만 했다. 보수적인 경상도 시골 촌구석의, 밑으로 여섯 동생이나 있는 장남과 결혼한 어머니다. 그런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어머니가 시집와서 처음으로 누나를 낳았을 때, 동네어른들과 친척들이 얼마나 질책하고 또 한숨을 내 쉬었는지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나는 미와코에게 말 할 수 없었다.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인 분위기랄까, 유교사회의 풍속 같은 걸 설명할 능력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어머니라 할지라도 실제 미우를 본다면 마음이 풀어질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만큼 미우는 완벽하게 귀여웠으니까. 뭐, 전적으로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바로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방 얻으려고 모아두었던 돈이라 망설여졌는데 미와코가 무조선 쓰자고 한다.
"방세는 앞으로도 모을 수 있지만 지금의 미우 모습을 보여드리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잖아. 조부모에겐 손주의 아기 모습이 영원히 기억속에 남는다고 하더라."
매번 둘이서만 가다가 한 명이 더 늘었다. 나리타 공항으로 가는 스카이라이너에서 뭐가 그리 신기한지 애써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던 미우는 정기적으로 환희에 찬 목소리를 냈다.
"꺄아! 꺄아!"
"미우야, 뭐가 그리 좋아?"
"꺄아아아아!"
▲ 스카이라이너 창밖을 줄곧 쳐다보던 미우 ©박철현 | |
아직 7개월밖에 안된 아기다. 대화가 될 리 없지만 그래도 아빠 목소리를 듣고 이쪽을 쳐다보며 웃는 낯으로 비명을 지르는 그 모습이 어찌 그리 울컥하고 또 애틋하던지.
김해는 금방이었고, 마산도 금세 도착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삼학사 앞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처음있는 일이다. 얼마나 미우가 보고 싶었으면 저러실까. 아버지는 활짝 웃으면서 다가왔다. 미와코로부터 아이를 건네 받더니만 공중으로 들어 올린다.
"잘 왔다. 우리 미우! 오는데 얼마나 고생이 많았노."
그 웃는 얼굴, 하지만 눈물도 언뜻 스친다. 시골 아버지들은 안 운다. 말은 잘 안하고 표정은 언제나 화내고 있다. 그럴 땐 눈을 보면 안다.
특히 우리 아버지는 더 그랬다. 나는 한번도 소리내어 우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의 눈은 그냥 촉촉하게 젖었을 뿐이다. 이것이 슬픔의 촉촉함이라면 이날 처음으로 미우를 대면했을 때는 기쁜 촉촉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래, 오느라 수고 많았제. 잘 왔다. 푹 쉬다가 가라."
미우를 미와코에게 건네며 아버지는 그제서야 우리들에게도 잘 왔다는 인사를 했다. 어느샌가 밀려 버렸다. 아버지에 있어 1순위는 미우였고 우리는 2순위, 아니 미와코가 2순위. 나는 3순위가 돼 버렸다. 흑.
짐가방을 집에다 놓고 어머니가 장사를 하고 계시는 주공시장으로 내려갔다. 전에도 말했지만 추석전 대목에 생선집 아들딸들은 해야 할 일이 많다. 이번엔 미우 때문에 좀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미와코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아마도 나는 언제나 그렇듯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겠지.
시장어귀로 들어서는데 다른 아주머니들이 여기저기서 외친다.
"오! 철현이 왔나? 우리 이쁜 일본각시도 같이 왔네. 오느라 고생했제?"
"아이고! 벌써 아(아이)를 낳나? 얼굴 한번 보자. 아이고 이뿌라. 천사같네, 천사!"
"피가 섞이서 그렇나? 아(아이)가 억수로 귀엽네. 뭐가 이리 이쁘노?"
아주머니들의 목소리 때문일까? 저 멀리, 그래봤자 20미터 정도지만, 간이천막에서 어머니가 나오신다. 푸른색 작업용 앞치마, 아줌마 퍼머, 오른손에는 칼을 들었다. 나보다 미와코가 먼저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칼을 든 오른손을 흔드셨다. 처음에는 웃음을 띠고 계셨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울음으로 변한다. 울음을 억지로 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미와코의 손을 잡는 어머니.
"그래, 그래. 잘 왔다. 아(아이)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노?..."
어머니는 결국 말을 끝까지 못하시고 엉엉 우시고 말았다. 원래부터 눈물이 많으신 분이셨지만 어머니는 미우보다 미와코를 먼저 챙기셨다. 아버지와 180도 달랐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만이 아는 공통의 그 무엇인가가 작용했던 것일까?
어머니는 장갑을 벗고 손을 닦으시더니 미우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쁘다. 너무 이쁘네..."
순간 미우가 웃었다. 아! 영리한 녀석.
"아! 웃는다야. 할매 알아보고 웃는거 봐라. 미우야, 우리 미우야! 비행기 타니까 좋더나? 할매 보니까 좋나?"
어머니가 미우의 웃음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전화상으로 해 왔던 그 숱한 투정 "고추만 달고 나왔으면"은 무장해제됐다. 어머니는 다음날부터 미우를 업었다. 미우를 업고 장사를 하셨다. 마치 자기 자식인양 다루셨다. 젖을 먹일 때만 미와코가 잠깐 들렀을 뿐이다. 며칠간 어머니는 자신이 예전에 못하셨던 것, 이를테면 나에 대한 애정을 미우에게 전부 쏟으시려는 듯 했다.
어머니는 독한 분이시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곳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곳으로 시집을 와 고생만 하셨다. 근 35년을 말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시골깡촌을 벗어나 회원동 국제주유소 사거리의 조그만 반찬가게에 고용돼 일하셨다. 세 평이 채 안되는 그 곳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시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 때 어머니는 누나만 데려갔다. 시골에 남겨진 나는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할머니의 품에서 자랐다. 그러니까 나는 어머니의 정을 거의 못 느낀 채 자랐다. 아버지도 사우디에 계셨으니 결국 부모와 근 6년간 떨어져 지낸 셈이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억지로 기억하려 하면 언제나 기억의 첫 장에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퍼머머리를 한 채 철도가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오리떼기(설탕과 소다로 만든, 오려서 떼는 과자) 장사를 하고 있는 어머니'와 '시커멓게 그을려서 뼈만 남아 있는, 10년만에 돌아온 중늙은이 아버지.'
▲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시절의 미우. 참고로 미우를 들고 있는 여자분은 미와코 오빠의 아내이다. ©다카하시 미와코 | |
어머니는 하지만 한번도 그것에 관해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몇 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하다.
쉰 아홉이 된 지금도 "집에 가마이 안아 있으모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나가서 하나라도 더 팔아 봐야제"라는 말은 하셔도 "그 때 너한테 미안했다"는 말씀은 죽어도 안 하신다. 물론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한 때는 이것이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들의 사랑방식이었다. 어머니는 미와코에게도 그랬다.
처음에는 '절대 결혼은 안된다'라고 하신 어머니는 어느새 업무용 앞치마를 직접 미와코에게 걸어주며 "그리 입어 놓으니까 생선집 딸내미 같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별 것 아닌 이 말이 어머니에겐 곧 결혼승락을 의미했다. 물론 이런 사실을, 나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알게 됐지만 말이다.
아무튼 어머니가 아기를 돌봐주다 보니 미와코와 나는 신혼생활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할 일 자체가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둘이서 데이트나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일도 도와줄 필요가 없다며 꼬깃꼬깃 구겨진 만원짜리 서너장을 건네주시면서 "마산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미와코한테 소개도 좀 해주고 그러렴"이라고 덧붙이셨다.
미우 밥은 이유식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몰랐었다. 한국 이유식이 이렇게나 종류가 많은 줄은. 일본에서는 호박, 당근, 고체형 야쿠르트 등 재료를 사서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은 그냥 슈퍼에서 사서 먹여도 되는 것이 많았다. 이유식만 놓고 보자면 한국이 더 풍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나도 미와코도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덕분에 미와코와 나는 추석전까지 평화로운 데이트를 즐겼다. 어시장 거리, 창동 및 부림시장, 합성동에 덕동, 진동까지 놀러갔다. 어시장 거리를 보면서 미와코는 "쓰키지 시장같다!"고 흥분했다.
쓰키지 시장은 일본 최대의 수산물 시장이다. 물론 마산 어시장은 쓰키지 시장과 비교조차 안되는 규모지만 '재래성'만 놓고 보자면 이쪽이 훨씬 운치있다. 창동 거리를 걸을 때 미와코는 너무나 싼 옷들에 흥분했고, 부림시장에서는 한 접시 3000원도 안 하는 떡볶이・순대 세트에 탄성을 내 질렀다.
"우와!~ 3000원에 떡볶이 순대를 그냥 줘. 아! 오빠 팥빙수도 3천원 밖에 안 해. 와! 정말 싸다." 미와코는 이미 서울 종로거리에서 이것들을 맛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미와코는 그보다 훨씬 양이 많고 가격은 절반에 해당하는 창동, 부림시장의 떡볶이를 더 사랑했다. 입술이 벌개질 정도로 먹고 또 먹었다. 물론 삼겹살도 빠질 수 없다. 배 터지게 먹고 불과 2만원을 내는 내 모습에 미와코의 흥분은 절정에 달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2만원이라니! 도대체 마산사람들은 왜 이리 인심이 좋은거야?" 그러고 보니 미와코는 마산에서 제대로 돈을 지불하거나 그런 광경을 목격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냈기 때문이다. 하긴 마산에서 우리 둘만 데이트 한 것도 이 때가 처음이었으니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스트레스를 한껏 발산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데이트를 하던 도중 미와코가 문득 입을 열었다. 때마침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마산으로 이사오면 좋겠다. 집도 있고 물가도 싸고 사람도 좋고..."
깜짝 놀랐다.
"진심이야?"
"어? 응. 근데 어차피 와야 하잖아?"
"왜?"
미와코는 이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빠, 장남이잖아. 부모님 모셔야지."
미와코는 당연하다는 듯 내뱉은 말이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말을 꾸미지 않는 미와코니까 당연히 저렇게 할 것이다. 내 입으로 한번도 발설한 적이 없는데 미와코는 어련히 알아서 시간이 지나 부모님이 은퇴를 하시면 마산에서 생활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긴 어머니도 그랬다. 어머니도 그 바쁜 와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수발을 들었다. 물론 돌아가시기 직전에 두 분은 병원에 계셨지만 그전까지 십여년을 모셨다. 새벽에 일어나 두 분의 밥을 차리고, 시장으로 나가 생선을 떼온 후 다시 점심을 챙겨드리고 속옷도 갈아입히고 저녁밥을 차려드리고... 이런 일을 십여년간 묵묵히 하셨다.
미와코와 어머니가 투영돼 보였던 것 같다. 도쿄에서 태어난 도쿄토박이 도회지 여자가 하루에 버스 3번 들어오는 시골깡촌의 어머니와 비슷한 향기를 풍겼다. 그래서일까?
데이트를 마치고 시장으로 돌아가 어머니로부터 미우를 건네받는 미와코는 마치 어머니의 딸, 아니 어머니의 젊었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실제 어머니는 1년전 우리들의 결혼을 허락할 때 친척들 앞에서 술 한잔 드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거들 봐라. 어느 서울 젊은 아(아이)가 저 냄새나는 시장통에서 새벽부터 밤까정 일하겠노? 철현이가 여자 하나는 진짜 잘 골랐데이."
어머니와 미와코의 마음이 어느샌가 통한 것이다. 그렇게 2주일동안 머물면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아내와 미우, 그리고 나는 여러군데를 돌아다녔다. 노시는 것에 서투신 어머니는 그 어떤 곳도 즐기지 않으셨다.
돝섬에서도 돗자리를 지키면서 미우와 줄곧 같이 계셨고, 서원곡의 한가위 축제에서도 피곤하다며 자리 지킴이를 자처하셨고, 최근에 생겼다는 집 근처의 미술관에서도 정말 빠른 걸음으로 한바퀴 휙 돌아보시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나중에 나가보니 어머니는 미술관 밖의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면서 주무시고 계셨다.
그런 문화적 소외자이신 어머니가 웃으면서 즐겁게 즐기는 곳은 오직 한 곳, 당신이 하려고 했다가 손도 아프고 피곤할 것 같아서 그냥 관뒀다는 집 근처의 횟집이었다.
그 횟집에서 어머니는 즐겁게 큰 소리로 웃으시면서 나와 미와코에게 소주를 권했다. 그리고 당신도 분위기에 취하셨는지 한방울도 못한다는 술을 석잔이나 마셨다. 뭐가 그렇게 기쁜지 더 큰소리로 웃으면서 미우의 볼탱이를 어루만지며 기뻐하셨다.
그런데 또 눈은 젖어 있었다. 다음날 일본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기쁨의 웃음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미어지는 심정이셨던 것이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 가여웠던 나는 덜컥 말해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 둘째 낳을 때는 마산에서 낳을께요. 그 때 미우도 많이 보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뱉었던 이 말이, 1년후 엄청난 댓가를 치루게 될 줄은 이때만 하더라도 짐작조차 못했다.
(8부 "미와코 둘째 딸 유나를 임신하다!"로 이어짐) ■ 글쓴이 주
작년(2009년)에 6개월간 연재됐던 시즌1, 시즌2, 외전을 한데 묶어 단행본 에세이 '일본 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창해출판사, 1만 1,500원)를 출간했습니다.
현재 전국 오프라인 서점과 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인터파크 등 유명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상당히 죄송합니다만, 이번 출간과 함께 시즌1, 시즌2는 사이트 상에서 열람하실 수 없게 됐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출판사 책소개 페이지
http://www.changhae.net/book_board/changhae_book_view.php?no=331&id=changh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