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콰논 대표 이봉우 ©jpnews/이승열 | |
씨네콰논 대표 이봉우(50) 씨는 지난 10여 년간 한일양국 영화계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다. 1993년 서편제 일본 수입을 시작으로 1999년 쉬리, 2001년 공동경비구역 jsa를 소개해 대히트를 기록하고, 한일영화사에 한획을 그은 원조 한류 문화붐의 주인공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재일동포라는 소재를 맛깔스럽게 요리한 영화 '박치기', 탄광촌 아이들과 훌라댄스를 접목시켜 감동을 주었던 영화 '훌라걸스' 등, 작품성과 흥행 양쪽을 만족시키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유능한 프로듀서이자 제작자였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삐끗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명동에 일본영화 전용상영관을 갖춘 영화관 cqn을 오픈하면서부터다.
한국의 좋은 영화를 일본에 소개하여 감각을 인정받은 그가, 이번엔 좋은 일본영화를 한국 영화팬들에게 선물하려 했지만, 한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꾸준히 관객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영화관 건물주에게 사기를 당해 40억원이나 들인 영화관을 모두 날리게 되었다.
건물주는 이봉우 씨에게 두개 층을 전세 준 후, 고의부도를 내고 이어서 건물을 경매에 부쳤다. 이봉우 씨는 건물주를 상대로 소송에서 이겼지만, 건물주는 모든 재산을 부인 명의로 돌린 채 이혼한 상태여서 한 푼도 되돌려받지 못했다. 새로운 건물주는 또 다시 똑같은 액수의 임대료를 요구했다. 결국 명동 cqn은 3년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사기의 여파는 명동 cqn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그를 믿고 융자를 해주었던 일본 은행에서는 이봉우가 한국인들과 짜고 돈을 빼돌렸다고 생각하고 돈 줄을 끊어버렸다. 자금줄이 막힌 영화제작, 배급사가 잘 돌아갈 리 만무. 위태위태한 상황이 계속되다 올해 1월, 마침내 시네콰논은 법정관리(민사재생법 적용)를 신청했다.
8개월간의 심사를 거쳐 지난 9월, 시네콰논은 민사재생법 신청이 받아들여지고 회생에 들어갔다. 그러나 1989년 시네콰논을 설립했던 이봉우 대표는 약 20년 간의 역사를 묻어두고 물러나야했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은 이봉우를 롤러코스터 꼭대기까지 올려놓았다가 바닥으로 추락하게 했다.
한국에서 그렇게 차갑게 쫓겨난 이봉우를 보듬어 준 것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한국에서 사업하다 거액의 빚을 지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재일동포들과 일본 영화인들은 그를 탓하기는 커녕 오히려 격려하고 위로했다. 말로만 '안됐다'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었다.
일본 문화계 여기저기서 '이봉우 대표를 살리자'는 소리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출연료 없이 영화를 찍겠다는 배우들, 제작비 없이도 영화를 마무리하겠다는 스텝들이 줄을 이었다. 재일동포 문화인 사이에서는 모금운동을 하자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국적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고 게다가 한국에서 사기당하고 돌아온 이봉우를 일본인들이 이토록 따뜻하게 감싸는 이유는 의외로 심플했다. 이제까지 그가 쌓아온 영화인으로서의 감각을 높이 사고, 인간 자체에 대한 매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이봉우 부활제에 초대합니다민사재생법 신청이 받아들여지고 약 두 달반이 지난 12월 2일, 도쿄 긴자에서는 영화인 이봉우의 부활제 '이화회(梨花の会, 배꽃은 조선의 왕실화, 조선을 의미한다)'가 열렸다. 많은 변화 속에서도 언제나 이봉우를 지켜보고 응원해왔던 사람들이 모여, 영화인 이봉우의 컴백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제작자, 배우, 투자자 등 일본 영화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 자리는, 마치 풍성한 한 해를 자축하는 듯한 즐거운 파티형식으로 이루어졌다. 30평 남짓한 중식당을 빌려 만든 자리는, 약 150여명의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그 중앙에는 이봉우 씨의 영화인생을 돌이켜보는 프로필 영상이 돌아갔다.
이봉우 씨는 약 1년 반 전의 인터뷰 때보다 약간 핼쓱해진 듯, 연륜을 나타내는 중후함이 얼핏 보였지만, 선한 눈매와 입가는 그대로였다. 그는 부활을 축하해주러 온 손님들에게 일일히 감사 인사를 건네며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가 '제 자리에 돌아왔음'을 나타내는 안심감처럼 비쳐졌다.
참석멤버들은 김대중 전대통령 납치사건을 다룬 영화 'kt'의 사카모토 준지 감독을 비롯하여, 2003년 영화 '겟 업(ゲロッパ!)'때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는 청춘스타 기리타니 겐타, 한국 최고의 연기파 톱배우 a씨 등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카모토 감독은
"오늘은 이봉우의 전야제이자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조급해하지 말고, 서둘러' 이 말은 내가 영화 촬영장에서 자주 하는 말인데, 다시 시작하는 이봉우 씨도 조급해하지 말고 화려하게 부활하길 바란다"며 힘찬 격려의 말을 건넸다.
배우 기리타니 겐타는
"이봉우 씨는 겟 업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주 작은 역을 맡았던 나에게 '네가 그렇게 연기하면 촬영이 언제 끝나겠나'라고 말해주셨던 분. 그 때부터 나는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어떤 짧은 대사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깊은 인연이 있는 이봉우 씨와 다시 영화작업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왔다"고 말해 큰 환호를 받았다.
한 번도 작품을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이봉우씨가 일본에 수입해서 크게 히트한 작품에 출연한 인연을 계기로, 10여 년전부터 형제지간처럼 지내왔다는 한국배우 a씨는,
"한국에는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 그대로 예전보다 더욱 발전하길 기대한다. 이렇게 많은 손님이 온 걸 보니 역시 이봉우씨는 인생을 잘 살아온 것 같다"며 이봉우를 향해 인간미 끈끈한 러브콜을 보냈다.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 이봉우 씨는, 앞으로의 사업구상으로 festa라는 이름의 이동영화관 사업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관객 1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16톤의 트레일러로 일본 전국을 누비며 영화를 상영할 계획이라는 것. 이봉우 씨는
"예전처럼 학생들의 단체관람, 시골 노인들의 영화관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표가 있자 파티장을 찾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봉우씨의 부활을 축복했고, 마지막 휘날레는 다같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듯 불경기라는 한파가 일본영화계에도 몰아친 현 상황속에서도, 영화인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얼굴을 맞대고 함께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던 '이봉우 부활제.'
과연 이것이 한국이었으면 가능했을까. 착잡하면서도 일종의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믿어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분명, 다시 날아오르는 데 큰 힘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돌아온 영화인 이봉우. 예전의 전성기 때 처럼 다시 한번 그의 비약을 기대해본다.
▲ 이봉우 부활제 梨花の会에 몰린 사람들 ©jpnew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