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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무라 전 아사히 기자를 말한다(5)
일본어 스피치 대회에서 우에무라 사건을 말하다
 
강명석

호쿠세이대의 빙판길도 서늘한 공기도, 포근하게 쌓인 눈 더미도 모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2014년 11월 중순, 나를 포함한 유학생들은 짧았던 언어 연수 프로그램을 마치고 수업의 마지막 날 열리는 ‘유학생 일본어 스피치 대회’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유학생 일본어 스피치 대회’는 유학생들의 3개월간의 수학(修學)을 평가하는 대회로 호쿠세이대 관계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자유롭게 참관이 가능한, 대학의 제법 큰 이벤트 중 하나였다.

 

호쿠세이대에는 매 학기마다 일본어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유학생들이 있는데 이들 모두 프로그램 수료를 위해 반드시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 스피치 주제는 호쿠세이에서 생활하며 느꼈던 경험이나 일상 등 모두 가능했다.

 

나는 스피치 원고를 우에무라 선생님과 호쿠세이대의 협박 사건에 대해 썼다. 다음은 당시 내가 일본어로 썼던 스피치의 원고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저는 한국인 강명석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칸’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저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30살이 되기 전까지 세계여행을 떠나자’는 것이 제 작은 꿈입니다.

 

제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분들은 응원해주시지만 아직 생각이 어리다면서 그 이후의 인생에 대해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걱정해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인생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설교조로 제 꿈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조금 화가 나기도 합니다.

 

제 자유를 억압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그 어떠한 매듭에도 묶이지 않고 제 판단과 생각으로 인생을 그려나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우에무라 선생님이라는 분을 알고 계세요? 우에무라 선생님은 전 아사히 신문기자로 지금 이 학교의 비상근 강사로 계십니다. 선생님은 지금 그 이전에 본인이 신문기자로서 쓴 위안부 기사가 문제가 되어 여러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우에무라 선생님을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학교에 폭탄을 설치하겠다’. ‘학생들을 괴롭히겠다’ 등의 비열한 협박들도 있어서 학교 관계자 분들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에 유학을 와서 참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어떤 대학 강사가 과거 기자 시절 기사를 쓴 것 때문에 사회적인 억압 받고 있는 현상을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언론과 대학은 사회적으로 자유롭게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지켜져야만 하는 기관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이 사건이 굉장히 마음에 걸립니다.

 

저는 딱히 위안부의 역사를 이야기를 하려고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게는 그럴만한 지식도 없습니다. 다만 언론이나 대학처럼 이론을 제기해야 할 기관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경직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이웃나라인 한국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저는 우에무라 선생님의 사건은 일본의 대학과 언론이 자유를 지켜낼 수 있는 사회인지 아닌지를 판가름 받는 시험대에 올라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는 바로 이 사회의 위험을 감지한 일본의 변호사 약 300여 명과 ‘지지마 호쿠세이대의 모임’ 등의 시민들이 선생님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은 때로는 너무 어렵습니다. 상대의 생각이나 사회의 편견, 자신이 세운 규칙 등으로부터 떨어져 살아가기란 쉽지가 않으니까요. 하지만 자유롭지 않으면 정말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기 어렵지 않을까요?

 

이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그러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가 자유로워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애매모호하지만 저는 일본 사회가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 작은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고 그 결과 이 스피치를 준비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 여러분들의 자유를 위해서 우에무라 선생님의 해임을 막아주세요. 사회를 위축시키는 협박들이 계속되지 않도록 협력과 응원을 보내주세요. 이상입니다.

 

당시 원고를 쓰면서 ‘자유’란 무엇일까를 무척이나 고민했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제대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이 추상적인 개념을 멋대로 중심 내용으로 가져와 도대체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을지, 원고를 제출할 때까지 아주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비열한 일본 우익들의 공격에 의해 우에무라 선생님의 해임론이 학내에서 탄력을 받고 있는 이 부당한 현실을 청중들에게 꼭 고발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원고를 제출한 후 며칠 뒤, 일본어 수업 도중 유학생을 담당하는 여교수가 나를 찾아왔다. 우에무라 선생님의 첫 수업에 불쑥 들어와 폭파 협박에 대해 경고하고는 수업 변경을 권고하고 돌아갔던 그 교수였다.

 

따라가니 작은 방에 학교 교직원으로 보이는 남성 3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가운데 테이블에 앉히며 빨갛게 줄이 쳐진 내 원고를 꺼내 보였다.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들을 들어가며 원고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결론은 주제를 바꿔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대학 당국이 내 스피치 주제를 두고 간섭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여교수는 "이 스피치로 우에무라 씨를 공격하는 단체의 표적이 될 수도 있으며 그에 대해서는 학교가 책임질 수 없다"는 경고를 해왔다.

 

물론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장난 전화나 익명의 메일들로 대학 당국과 우에무라 선생님을 괴롭히는 이들이 나에게 직접 해를 가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원래 쓴 원고 그대로 스피치 대회에 나서게 되었다. 스피치 대회가 있기 일주일 전, 선생님과 우리는 학기의 마지막 수업으로 온천에 갔다. 그 날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선생님께 조심스레 내가 쓴 원고를 보여드렸다. 선생님은 아주 기뻐하셨다.

 

학교와 일본 사회로부터 내몰릴 형국에 놓인 자신을 제자가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감동하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우에무라 선생님과 직접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바로 이 스피치가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스피치 대회 당일, 나는 당당히 연단에 서서 청중들에게 우에무라 선생님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당시의 내 스피치는 2014년 12월 19일 일본의 주간지인 '주간금요일(週刊金曜日)'에 소개되었다.

 

이전 취재로 인연을 맺었던 하세가와 아야 북해도 신문 기자가 우에무라 선생님과 호쿠세이대 사건을 취재한 기사 내용 중에 내 스피치를 짧게 다뤄준 덕분이었다.

 

하세가와 기자는 기사에서 우에무라 선생님과 호쿠세이 대학에 대한 협박사건은 미국의 뉴욕타임즈, 영국의 가디언지 등의 해외 주요 언론들이 주목하고 있다고 썼다. 일본의 과격한 우경화 흐름에 의해 위축된 일본의 언론들이 우에무라 협박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호쿠세이대에서 사귄 일본인 친구들과 우에무라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대개 "이상한 비상근 강사가 학교를 소란스럽게 한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평소 위안부 문제에 무관심했다면 일본인으로서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도하지 않는 언론과 가르치지 않는 국가, 교류하지 않는 양국의 국민들이라는 3박자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 대해 우선 나 자신부터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비슷한 한국의 사례에 대해 나도 둔감했을지 모른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유란 무엇일까? 아직 잘 모르겠지만, 분명 아무런 상관없는 타인의 권리가 침해된다고 해서 당장 나의 자유가 억압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한 사람의 권리 침해를 용인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주고 금기를 만들어 사회 전체가 위축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우익들의 우에무라와 호쿠세이대에 대한 협박으로 일본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 분위기를 형성시킨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타인을 지키는 일이 자신의 자유를 지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시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자 위와 같은 내용의 스피치 원고를 썼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논리나 표현이 정말 미숙했지만, 그래도 당시의 내 생각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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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18 [12:30]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의미있는연설 미밋들 17/04/30 [07:12]
훌륭한 연설입니다 앞으로 열심이 하셔서 한일국민들과 자유롭고 사이좋게 지낼수있도록 더욱 노력해주세요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강명석 17/05/12 [14:02]
부족한 글을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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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사히 신문 기자 시절, 일본군 위안부 기사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가는 대학마다 협박으로 임용이 취소되는 등 일본 극우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우에무라 다카시. 그는 현재 카톨릭대학의 초빙교수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다. 우에무라씨를 한국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한국 유학생 강명석 씨. 우에무라씨 곁에서 그가 어떻게 일본 우익들과 싸우고 더불어 일본의 양심세력들과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지, 그 현장을 낱낱이 기록하는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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