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며
흔히 사람들은 지난 1년간을 갈무리할 때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고 표현을 한다.
그럼 나에게 작년 한 해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하지만, 나에게는 일반인들이 ‘다사다난했던 한해’라고 한마디로 정의를 내린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지난 1년을 갈무리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2008년 12월, 주식회사 <자퐁>을 설립하면서 나는 이 회사에 내 인생 전부를 걸었다. 그리고 작년 한 해 동안 제이피뉴스를 만들면서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2월 팀 블로그에서 5월 베타버전으로, 그리고 6월 12일에 정식으로 제이피뉴스가 출범했다.
엊그제는 하루 페이지뷰가 215만을 넘어섰고, 그 전날에는 164만을 기록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일터다.
그러나 우리 제이피뉴스 기자들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숫자다. 왜냐하면, 대외적인 홍보활동을 통해 얻은 숫자가 아닌, 순전하게 제이피뉴스 기자들이 발로 뛰고 기사를 써서 얻은 알토란 같은 노고의 페이지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1월 4일, 신년회 저녁식사를 하면서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마침내 200만이라는 숫자가 나타났을 때 모든 기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잘 버텨왔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행여나 객지라고 내미는 촌지 안 받기, 커피 한 잔 값이라도 취재원 신세 안 지기, 철저하게 현장취재하기 등 제이피뉴스 기자들의 고군분투는 기사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뿐만 아니라 현장성, 정보성,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수도 없이 기자들은 기사를 자진검열했다. 덕분에 기사 한 꼭지에 10만 조회수가 넘는 것은 부지기수였고, 수십만은 며칠 걸러 한 번씩 기자들의 엔돌핀처럼 찾아왔다.
이같은 결과는 기자들이 아직 세속의 때가 덜 묻은 순수열혈파들로 똘똘 뭉쳐 있다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제이피뉴스가 만들어진 목표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취재환경이 마냥 수월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제이피뉴스에게는 실탄이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움직임은 경제적 상징 곧 돈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없었다. 아니 굴러들어오는 찬스도 제발로 꽤 여러번 걷어찼다.
그렇지만 결코 후회는 하지 않았다. 제이피뉴스 대표인 나도 기자들도.
이런 점에서 나나 기자들의 성향은 일심동체가 되었던 것 같다.
12월 29일, 지난 25년 가까이 친동생처럼, 친딸처럼 사랑해준 재일동포 부부가 ‘계절에 맞게 옷을 입듯이 사람도 나이에 맞게 액세서리도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사준 롤렉스 시계를 11만 엔에 팔아먹고 말았다. 직원들의 월급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시계를 판 날, 지인이 내게 말했다.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텨온 것이 오직 인맥 덕분이었는데 이젠 그 인맥마저 한계가 왔나 보네요.”정말 그럴까?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아닌데요.’라고 부정하고 있었다. 전에도 이미 값이 나갈 물건은 월급날이 가까워 올 때마다 하나씩 팔았으니까. 다만, 마지막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재일동포의 마음의 선물을 돈을 받고 팔았다는 죄의식만이 나를 께름칙하게 할 뿐이었다.
아니다. 지인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고 보니 당그니 김현근 팀장이 며칠 전 내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지금까지 인맥으로 버텨온 것 같다고.
작년 여름이었던가. 어느 날 내 개인통장에 50만 엔이 입금되었다. 나는 50만엔이란 액수를 보면서, 전에 계약기자로 일했던 고단샤 발행의 ‘주간 현대’로부터 미지급되었던 북한취재비를 보냈나보다 라고 생각, 그날로 써버렸다. 이튿날 똑같은 액수가 또다시 입금되었다. 역시 같은 생각을 하며 밀린 세금을 냈다.
그런데 며칠 후 우리 제이피뉴스에 부부 칼럼을 쓰고 있는 신경호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유작가님, 운영자금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우리 부부가 각 각 50만 엔씩 현금서비스를 받아 넣어 드렸어요. 부담 갖지 마시고 쓰세요. 이자도 싸요.” 기겁을 한 것은 나자신이다. 제이피뉴스 독자들은 잘 아시겠지만, 신경호 전영미 씨 부부는 모두 시각장애인이다. 게다가 아이도 둘이나 있다. 아니 작년 여름에는 새벽이가 태어나기 전이어서 아직 영미 씨의 뱃속에 있을 때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게 기꺼이 구호자금(?)을 보내주었다. 앞으로 제이피뉴스가 흑자를 내면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들 부부의 구호자금부터 몇 배의 이자를 보태서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지난 1년을 되돌아 보면, 제이피뉴스가 결정적으로 힘들 때마다 형제든 친구든 늘 말없이 도와주는 이들이 꼭 있었다.
결국, 앞의 지인의 말대로 인맥 덕분에 그나마 오늘날까지 잘 버텨온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는 ‘인맥의 한계’라는 말에 저항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직도 결정적인 순간에 날 구해 줄 사람이 많이 있다는 자신감 내지는 그 어떤 미련 같은 것!
작년 12월 22일, 제이피뉴스 편집실에서 송년회 겸 김치체험 이벤트를 벌였다. 배추 32포기로 김장을 했는데 그 과정을 송년회 손님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아사히신문, tv아사히, 교도통신, 일간현대, 주간신초 등 일본기자들, 그리고 김현중 총영사 부부 및 재일동포, 뉴커머 한인 등 60여 명이 참석해 배춧속을 넣어가며 막걸리를 마시는 송년회를 했다. 집에 돌아갈 때는 자신들이 만든 김치를 가져가게 했다.
그날 든 비용은 김장재료까지 포함해서 약 7만엔. 아마도 식당에서 송년회를 했다면 수십만 엔은 더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손수 슈퍼에 가서 배추를 사고, 또 도쿄의 남대문으로 일컫는 우에노 아메요코 시장에 가서 물오징어와 굴을 사서 굴전을 부치고 지지미를 만들어 잡채와 함께 막걸리 안주로 내놓았다. 도토리묵도 집에서 직접 쑤었다.
손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역시 제이피뉴스다운 송년회였다고, 그러면서 내년에도 또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례행사처럼 말이다.
작년 연말에는 일본에도 불황이라는 한파가 불어서인지 송년회 내용이 꽤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일본의 송년회는 철저하게 회비제다. 공짜가 없다. 그러다보니 송년회에 초대받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은 불참하게 된다.
바로 이 같은 연말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벌인 김장김치 송년회 이벤트는 말 그대로 호주머니속이 얉은 사람들을 즐겁게 했고, 직접 김치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는 일본기자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비용은 재일동포 한 분이 제이피뉴스 오픈 때 못 왔다고 5만엔, 한인들이 많이 사는 다이토구 구의원 부의장인 기미츠가의원이 인편을 통해 보낸 1만 엔, 그리고 신경호 씨가 1만 엔을 손에 쥐어 주어서 그야말로 남의 돈 가지고 잔치를 벌인 셈이 됐다.
내가 다른 손님들이 내미는 회비를 마다하면서, 왜 굳이 신경호 전영미 씨 부부의 회비를 받았느냐 하면, 그래야 나도 그들 부부의 마음도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 부부는 평소 내가 회사 운영자금 때문에 종종걸음하는 것을 보며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고 싶어했다. 때로는 자신들이 부자가 아님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그래서 칼럼 원고료조차 받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신 경호씨가 내손에 꼭 쥐어준 1만엔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이렇듯 제이피뉴스는 기자들이나 주인장보다도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은 걱정을 해준다. 정말이지 인덕 하나는 타고난 것 같다. 때문에 제이피뉴스 기자들은 허튼 취재를 할 수가 없다. 인생도 허투루 살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양질의 기사만을 쓸 수밖에 없다.
결국, 지난 1년간은 우리 제이피뉴스 기자 모두가 치열하게, 그러면서 세상을 투명하게 살아온 셈이다.
이 같은 삶의 형태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제이피뉴스 기사 또한 작년과 변함없이 그렇게 정면으로 앞만을 보고 나아갈 것이다. 현장성과 정보성 그리고 완성도 높은 기사를 위하여.
'있는 그대로-'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