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을 타기 위해 바삐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하얀 별이 쏟아졌다.
“어? 대낮에 웬 별이"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구름만 둥실 떠 있다. 이번엔 좀 전의 그 별들이 반짝반짝 허공으로 사라지고 머리가 띵한 것이 꼭 뭐에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헉~ 빈혈이닷!’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유학생활 때의 얘기다. 학교생활, 주변 일들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던 무렵이었다. 이러다 공부는 커녕 집에도 가지 못하고 큰일 나겠구나 싶었다. 들어가는 길에 동네 슈퍼에 들러 이것저것 장을 보았다. 평소에는 비싸서 곁눈질만 하고 지나치던 와규(和牛, 우리의 韓牛 같은 일본산 쇠고기)를 집었다. 가격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살까 말까 한참 고민하게 만드는 액수였다. '에잇~!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더라.' 과감하게 두 팩을 카트에 담았다. 먹고 싶은 것 이참에 다 먹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샀다. 원래 식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날따라 먹고 싶은 한국음식이 어째 그리도 많던지. 여름 보양식으로 해먹던 육개장 생각이 간절했고 옛날, 어머니가 해주시던 잡채며 간장게장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게 금방이라도 몸살 날 지경이었다.
그럴 즈음, 내가 살던 네리마 구(練馬區) 국제교류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정기프로그램인 <외국문화강좌>가 있는데 <한국의 가정요리>를 소개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마침 ‘한류’의 원조격인 한국음식 붐이 일던 시기이기도 해 잘됐다 싶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승낙을 했고, 잡채와 육개장을 메뉴로 정했다. 한 가지 더 해달라고 해 빈대떡을 넣었다. 일본에서는 ‘지지미’라고 발음하는데 일본인의 사랑을 받는 ‘오코노미야키’가 두툼한 빈대떡이라면, 얇고 쫀득한 맛이 일품인 우리의 빈대떡 ‘지지미’ 역시 그들 입맛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들은 요미우리(讀賣) 신문에 <한국의 가정요리> 강좌를 연다는 기사까지 실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1면 하단에 불과 석줄에 해당하는 기사(?)였지만, 갑자기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주부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거라는, 그저 편하게 생각했던 일이 이제는 ‘한국의 명예’를 걸어야 하는 올림픽 출전 선수처럼 비장한 각오까지 들었다. 20명 정도 모집할 거라더니 많은 사람이 신청해 두 배로 늘렸다고 한다. (요미우리 신문스크랩은, 국제교류협회 담당자인 기타자와北沢씨가 보내주었다. ‘강사’ 이름이 누락되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그러나 막상 레시피를 만들려니 재료의 분량을 정확히 명기해야 하는 어려움에 부딪쳤다. 그동안 일일이 계량해 가며 음식을 만들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외국인들 앞에서 망신당할 순 없다. 평소대로 눈대중, 손대중으로 음식을 만들자고 할 순 없는 일, 재료의 정확한 분량을 재고 그에 따른 조리를 실제로 해보며 처음으로 레시피를 만들었다. 그날은 내가 있던 기숙사에서 ‘엄마표 음식’ 파티가 열리고, 더위와 객지생활에 지쳐있던 유학생들은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요리 강좌가 있는 날, 아침부터 가슴이 뛰는 게 마치 대회에 출전하는 운동선수처럼 긴장되었다. 실수하면 어쩌나, 떨려서 일본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어쩌지, 온다던 신청자가 펑크내면 어쩌나... 오만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평소 잘 따르던 기숙사의 동생들 세 명이 응원차 함께 가주었다. 정작 모여든 사람들 앞에 서자 신기하게도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동생들이 곁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서이기도 했지만, 그 순간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우리의 음식문화를 알리는 거야. 맛이야 저들 입맛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중요한 건, 지금 저들이 한국문화를 가까이 하러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걸 보여주면 된다.’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고 마치 늘 해오던 일인양 막힘없이 진행해 나갔다. (지금 고백하지만 ‘서울 가면 요리 강사 해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3초동안 했었다.) "한국에서는 잔치가 있는 날이면 꼭 잡채와 지지미를 만듭니다. 이 음식은 혼자만 먹으려고 만드는 음식이 아니라 이웃 사람들과 나눠 먹으며 정도 나누는 음식이었던 거죠. 오늘은 일본과 한국이 합동으로 잔치를 벌여볼까요"
“韓国では、宴の時は必ずを作ります。この食べ物は、自 分一人で食べようと作るのではなく、隣の人と食べながら心を分かち合うもの です。今日は日本と韓国合同で宴を開いてみましょうか。" 라고 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다섯 명씩 조를 짜주어 서로 어색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이웃’ 사이로 변했다.
그 다음부터는 잔칫집을 방불케 하는 시끌벅적 까르르 모드로 돌입~!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의례 주부들만 신청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남성이 꽤 많았다는 점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요리하는 남성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그때만 해도(그래봐야 겨우 10여 년 전) 가족을 위해 음식(요리까지는 아니더라도)을 만든다는 말을 내놓고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문화적 충격’이기도 했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남자)에게“평소에 요리를 자주 하세요?” 普段、よく料理を作りますか 라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집사람은 내가 해주는 스부타를 아주 좋아해요. 오늘 배운 잡채와 지지미를 해주면 아주 좋아할 거예요. 지지미 정말 맛있어요. 최고에요. 육개장은 어려우니 연습 좀 더 해보구요.” 家内は私がやってあげるすぶたが大好きだそうです。今習ったチャプチェを味わえれば喜んでくれるはず。チチミ、ほんとにおいしい。最高ですは作りにくいので、もうちょっと練習してから
지지미 최고라는 말에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한일 합동의 한국음식 만들기는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그 후로 빈혈증세가 신기하게도 싹 가셨다. 먹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쓸쓸했던 모양이었다. 스부타를 좋아한다던 그 분, 이제는 한국의 잡채와 ‘지지미’를 해달라고 남편을 조르는 것은 아닐까, 혼자 상상해본다. ■ 요리 강습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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