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5일 역도산 아내인 다나카 케이코 씨의 칠순잔치에 다녀왔다.
역도산이 사망한지 48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잔치에는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패전후 삶의 활력을 잃었던 일본인에게 역도산은, 프로레슬링을 통해 거구의 미국인을 가라데촙 한 방으로 쓰러뜨리는 모습으로 용기와 희망을 전해주었다.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역도산 아내의 좋은 날을 축하해주러 온 것이리라.
그러나 파티에서 내가 느낀 것은 다나카 씨의 파티임에도 불구하고 역도산이 주연으로, 다나카 씨는 조연에 불과하다는 분위기였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인간 다나카 케이코는 역도산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 이유로만 존경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도산과 다나카 씨는 1963년 6월에 결혼, 역도산이 같은해 12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결혼생활은 단 6개월만에 끝났다.
만일 다나카 씨가 보통의 아가씨였다면 당대 톱스타의 아내가 되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니 코가 높아질만도 했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장미빛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도산은 황망하게 떠났고, 그녀는 천국에서부터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역도산은 생전에 사업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해, 리키파레스 등 종합 엔터테인먼트 시설 건설 등 폭넓게 사업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역도산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의 죽음은 사업의 종말과 많은 빚만 남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중채무와 나중에 알게 된 전처 아들들과의 유산상속. 그저 곱게 자라온 다나카 씨에게는 더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22세의 과부. 상실감. 고독감.
재혼할 수도 있었고 젊은 여성의 욕망 그대로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뱃속에 있던 역도산 아이를 기르고 반세기 가까이인 오늘날까지 역도산의 아내로서 자리를 지켜왔다.
다나카 씨는 척하지 않는 소탈한 성격, 넓은 아량, 단정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본인은 의식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녀를 통해 전후 어두운 시기에 희망과 용기를 전했던 역도산을 연상시키는 큰 힘을 느끼고 있다.
그녀의 존재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들의 영웅을 잊고 살아갔겠지. 다나카 씨 덕분에 48년이나 지난 지금도 역도산은 다시 한번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나카라는 여성이 반세기 동안 역도산을 지켜온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다나카 케이코 씨를 스타 뒤에 가려진 조연이 아닌 '우리들의 영웅 역도산'을 지켜준 맑고 강하고 독립심 강한 여성으로서, 그녀를 평가해야하지 않을까?
* 역도산(1924-1963)
북한 함경남도 출신으로 본명은 김신락.
15세 때 고향에서 씨름을 하다가 스모흥행업자의 눈에 띄어 스카웃 돼 일본에 건너왔다. 하지만 스모선수로서 당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텃세 때문에, 요코즈나(씨름의 천하장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역도산은, 미국으로부터 프로레슬링을 도입, 창단부터 프로모션까지 담당하고 자신도 레슬링선수로 전향을 한다.
1958년 세계선수권자인 j.s.루테스를 물리치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전 국토가 폐허가 된 가운데에서도 몸집이 큰 미국선수들을 가라테춉 한방으로 차례차례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희망을 가졌다. 당시 일본인들이 전후복구를 하면서, 미소라 히바리(아버지가 한국인)노래를 들으면서 위로를, 역도산의 경기를 보면서 용기와 희망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역도산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었다. 일본언론들이 그를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위장시켜, 일본인들의 우상으로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역도산이 공식적으로 한반도 출신임이 밝혀진 것은, 그의 사후 30여년이 지난 90년대 초. 그래서 당시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역도산이 일본에 건너와 활동한 지 50여년 만에 비로소 국적이 제대로 밝혀졌다고 반색하며, 아직까지 국적을 밝히지 못하고 일본인으로 활동하는 또다른 스포츠 선수들의 커밍아웃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도산은 1963년, 도쿄 아카사카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조직폭력배와시비가 붙어, 복부를 찔린끝에 화농성복막염으로 사망했다. 생전 역도산이 즐겨부르던 노래는 '봉선화'였다는 것이, 역시 같은 재일동포출신인 전 프로야구선수 장훈씨의 얘기.
■ 글: 권용대 (현 아시아나항공 스태프 서비스 사장/재일동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