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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바꾼 日논픽션 작가들(1)
[연재]발로 누비고, 눈으로 확인해서, 가슴으로 쓴 글이 역사 바꾼다
 
유재순 기자
"어떤 한 사람에게 인터뷰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면, 그 인터뷰는 이미 반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은 그 유명한 'A Man'을 쓴 오리아나 파라치의 말이다.

인터뷰를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정형화된 모범답안을 준비함으로써, 정작 본질적인 '내용'을 유연하게 호도하는 그런 우(愚)를 우린 아주 예사롭게 행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시나리오적' 인터뷰 패턴을 오리아나 파라치는 날카롭게 꼬집은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리아나 파라치는 현장기사를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 와중에서 그녀는 종군기자시절 실제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한 경험도 있다.

그녀의 취재 지론은 단 한가지였다. 인물이든 사물이든 무조건 현장에 가서 보고, 들은(사람) 것을 확인해서 가슴으로 느껴 문장을 쓰는 것.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나도 오리아나 파라치가 쓴 기사를 통해서 확실하게 배웠다.

때문에 나는 원고를 쓸 때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환경에 처해 있을 지라도 대부분 현장에 가보고, 그리고 그 현장에서 채취한 내용과 사실적 자료를 토대로 글을 쓴다. 그래서인지 30년 넘게 르포라이터로서 수많은 글을 써 오면서도 자료에 의한 기사 작성에는 지금도 영 낯설다.

아무튼 20대 초기에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오리아나 파라치를 처음 안 것은 80년대 초였다. 당시 한국 특파원이었던 한 일본기자가 날 가리켜 '한국의 오리아나 파라치'라고 칭하는 바람에 그녀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내가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서 1년 8개여 월 동안 생활한 경험 때문에 일본 특파원은 오리아나 파라치를 연상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르포 라이터'란 직업명도 사실은 내가 붙인 것이 아니라, 당시 내 르포를 장기간 연재했던 여성동아 기자가 임의대로 내 이름 석자 뒤에 붙여 놓은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논픽션', '다큐멘터리' 류의 글에 대한 강박관념이 대단히 강했다. 특히 펙트(fact)와 트루(truth)의 차이에 대해서 가장 많은 고민을 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것은 현장에 따라서 펙트와 트루가 겹쳐질 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아이러니를 낳을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80년 대 초, 청량리 588번에서 매춘을 하다가 포주의 눈을 피해 강원도 사북탄광촌에 도망친 여자로 위장을 하고 그곳에서 한달 동안 취재를 한 적이 있었다.

눈만 뜨면 한 일자 형으로, 무슨 막사처럼 획일적으로 지어진 D탄좌의 사택 & #8211; 들어가는 집 입구, 부엌, 방 구조 등이 자로 잰 듯 똑같다- 이 집 저 집을 돌아 다니며 봉투 붙이기 등 주부들의 부업을 돕기도 하고, 저녁에는 막장에서 금방 나온 광부들을 상대로 밤새도록 포장마차에서 그들의 신세한탄을 들었다.

어차피 청량리에서 도망친 여자로 위장을 했고, 광부들 또한 자조적으로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이라며 피차 자신들의 신세한탄을 했으므로,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새파란 젊은 여자에게는 아무런 경계심조차 갖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수상한 여자로 오해, 간첩이 나타났다고 신고를 하는 바람에 난 골방 같은 여관방에서 잠자다 한밤중에 개처럼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 때 난 매월 여성동아에 르포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여성동아에 소속된 정식기자 신분도 아니었기 때문에 취재자 입장을 증명해야 할 아무런 증서 한 장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당시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신문사 잡지사를 막론하고 원고 청탁을 하면 작가나 프리랜서의 취재 편리를 위해 임시 신분증을 발급해준다. 특히 장기간 취재를 요하는 원고에는 신분증 발급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언론사에는 이 같은 제도가 전무했다. 원고청탁을 하는 언론사도, 또한 글을 쓰는 당사자도 피차간 이 같은 요구를 전혀 하지 않았다. 때문에 장기간 취재를 하던 난, 현장사람들이 보는 시각에 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신세로 전락하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는 이게(있는 그대로의 현장을 알기 위해 부득불 신분을 위장한) '진실(truth)'인데, 반대로 상대방에서는 나의 진의를 헤아리지 못한 채 자신들이 본 것만을 주장하므로 '수상한 행적'이 그대로 '사실(fact)'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당시 광부들을 착취하고 억압했던 탄광회사들은, 자신들이 행했던 '진실'은 은폐하고 외형적으로 드러난 '사실'만 진실인척 호도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누군가 그 진실의 현장을 확인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가진 자의, 광부 혹은 노동자들의 젖줄을 쥐고 있는 화이트 칼라의 집단(회사)적 횡포로부터, 억압 받고 착취 당하고 있는 현장을 채집해야 했다.(나중에 기사화 되고 난 후, 사북탄좌에 주재하고 있던 광산업체가 여성동아 편집실과 우리집에 찾아와, 자신들의 회사를 비판했다고 한바탕 항의성 난동을 부리고 돌아갔다)

그래서 신분을 위장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반공 이데올로기의 올가미가 되어, 경찰서에 있는 일주일 내내 내 목을 조이는 '사실'적 구실이 되고 말았다.

그런 현실적 제약 때문에 매 취재마다 한달 이상 신분을 위장하고 취재한 구로공단, 가리봉동 닭장 집, 청량리 588번지, 무작정 상경한 소녀들의 인신매매 현장들은 그래서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기 힘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80년대 초 운동권 학생들의 현장에 대한 진솔한 접근은 비록 '위장취업'이라는 편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사실'을 '진실'로 바꾸는데 막대한 일조를 했다.

때문에 8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전국을 돌며 현장을 누볐던 나는, 논픽션이나 다큐멘터리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표현이며, 진실이며, 또한 사회정의와도 일맥상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이자 문제 제시를 하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주로 읽는 책들도 국내외를 불문하고 다큐멘터리 성격의 책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일본 논픽션 작가들의 활약과 그 기록을 담은 책들은 내게 있어 '엔돌핀'과 같은 윤활유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만나고 그리고 자극제가 되어 많은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논픽션 작가들이, 대부분 이 분야에서 크게 인정받고 또한 정도(正道)를 걷고 있는 대가들이었기 때문이다.

1984년, 고단샤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의 논픽션 작가인 혼다 야스하루(1933-) 선생과 한일대담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당시 나는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혼다 선생 또한 우리말을 몰랐다.

그 때 내가 놀란 것은 선생의 이력이었다. 요미우리 신문사에서 사회부 기자로 16년간 재직하면서, 세속적인 출세 코스라 할 수 있는 데스크를 보게 되자 과감하게 사표를 집어 던지고 논픽션 전문 프리랜서가 되었다. 이에 대한 선생의 변은 단 한마디.

"데스크에 앉아 있으면 현장을 알 수가 없고, 따라서 진실을 파악할 수 없어."

그 당시 우리나라의 언론관계자는 '특별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기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정치계부터 스포츠, 연예분야까지 안 통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만사형통했다.

물론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거물 정치인들도 기자 앞에서는 비굴할 정도로 쩔쩔매고 아부했다. 물론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 언론의 위상과는 현저하게 다르고 또한 취재원 위에 군림하는 그런 행태는 없었지만, 저널리스트로서의 그 권위는 한국 못지 않았다. 그런 자리를 혼다 선생은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 프리랜서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때 내가 혼다 선생을 통해서 배운 것은, '신문기사는 펙트(fact)로서의 그 기능을 다하지만, 반대로 논픽션은 철저한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원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혼다 선생은 논픽션 작가가 되어 훗날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김 희로 사건의 '김의 전쟁', 그리고 논픽션 작가로서 그 위치를 확고하게 다진 '우리 속의 일본인', '유괴'라는 작품을 잇따라 내놓아, "역시 혼다선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원래 혼다선생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지금의 서울인 경성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선생은 늘 살아생전 나만 보면 '일본인으로서 그 시절에 대해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기도 했다.

84년, 일본 잡지가 주최한 우리 두사람의 대담에서, 내가 "일본은 섬나라니까 그 섬을 거대한 삽으로 똑 떠서 바다에 수장시킨 후 착한 일본인만 건져내어 살게 했으면 좋겠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을, 통역으로 나왔던 한국인 유학생이 차마 전하기가 뭣했는지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혼다선생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대신문사 기자출신에 현장을 누비는 르포라이터의 눈치 9단이 그냥 넘어갈리가 없었다. 금방 눈치를 알아 차린 것이다.

혼다선생은 즉시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통역을 바꿔 달라고 말했다. 그때 긴급 임시통역으로 나온 이가, 요즘 북한 문제가 나왔다하면 하루에도 일본TV에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비치는 한반도 전문가 코리아 리포트 변진일 편집장이었다.

당시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던 나는, 갑자기 통역이 왜 바뀌어야 하는지, 내 말이 어떻게 왜곡되어 상대방에 전해졌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나중에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그 잡지의 편집기자가 선생이 쓰러져 나와의 면회조차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선생은 노래방에 가면 늘 구수한 목소리로 최희준 씨의 '하숙생'을 우리말로 불렀다. 외모도 인격도, 성격도, 의식도, 실력도 모두 '명품'이었던 선생은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요미우리신문에 입사했다. 그가 기자 현역시절인 1964년에 파헤친 '매혈'이란 르포기사는, 나중에 '황색피'라는 추방 캠페인으로까지 확대되어, 일본에서 피를 사고 파는 행위를 근절시키게 만들었다.

기자로서 그의 위업을 증명하는 일화는 수없이 많다. 앞에서 말한 재일동포 차별에 맞서 그 실태를 고발하고자 인질사건을 벌인 "김희로 사건(한국에서는 김의 전쟁으로 출판)'을 파헤쳐 책으로 출판, 일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것도 바로 혼다선생이었다.

때문에 일본언론에서는 '동에는 혼다, 서에는 구로다'라는 표어아닌 표어가 생겨났다. 즉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역에서는 혼다 야스하루 기자가, 반대로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관서지역에는 구로다 기자가 최고라는 최고의 찬사였다.

혼다선생과 비교되는 구로다 기요시(黒田清, 1931-2000) 선생도 나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80년 대 후반, '주간아사히'에서 주관하는 '사할린 특집'대담에서 함께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혼다선생이나 구로다 선생 모두 요미우리 신문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두 양반 모두 일본사회적 평가는 '우'보다는 '좌' 쪽에 치우쳐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인들도 모두 인정을 했다. 그런데 이 두분이 몸 담았던 신문사가 우익성향의 요미우리 신문이라는 것이 매우 아이로니컬하다.

구로다선생은 '구로다군단'이라고 칭할 만큼, 그만 취재력과 필력으로 명성을 떨쳤고, '경관오직'이란 책으로 논픽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왕성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우익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2000년에 췌장암으로 사망했지만, 그가 배출해 낸 제자급 후배들이 그의 명성을 이어받고 있다.

아무튼 혼다선생은 어린아이의 유괴사건을 파헤친 책을 출판하면서도, 독자들로부터 '대단히 공포스러운 내용임에도 문장 하나하나에 녹아있는 작가의 시선이 너무 따뜻하다'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그의 성품이 매우 인간적이어서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하지만 말년에는 지병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다. 당뇨병 후유증으로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으며, 나중에는 대장암까지 발병, 최악의 상태로까지 몰렸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명료한 의식까지 병들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양쪽 손가락마저 사용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선생은 볼펜을 손가락사이에 끼우고 고무줄로 칭칭 동여매서는 한자한자 손수 써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원고를 받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선생을 면회하고 싶어 댁에 전화하자, 건강해지면 만나자고 거절해, 도대체 선생의 건강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싶어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편집자의 말로는 부인 외에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월간현대(고단샤 발행)' 편집자도 어쩌다 가끔씩만 면회가 허락된다는 것이었다.

선생이 사망하기 직전에는 구술로 연재원고를 썼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에게 회자되는 얘기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연재 원고 내용은 늘 냉철한 시각으로 일본사회를 매섭게 비판, "어떻게, 어떻게 그런 몸으로, 그렇게 명확한 사회적 진단을..."을 하면서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장절한 혼다선생의 육필원고는 46회로 끝나고 말았다. 그 때가 2004년이었다. 많은 독자들이, 많은 후배기자들이, 매달 가 나오면 선생의 이름부터 확인했다는, 오매불망 기적을 기대했다는 선생의 연재는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나를 포함한 혼다선생의 주변인물들은 그의 얼굴을 더이상 보지 못하고 영정사진으로 겨우 재회할 수밖에 없었다.

1년 후, 고단샤에서 '혼다 야스하루 전집'을 발간, 리갈호텔에서 성대한 추모식 겸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앞으로 혼다선생처럼 기자로서, 논픽션 작가로서, 현장중심의, 인간중심의, 팩트중심의 치열한 글을 쓰는 작가는 아마 나오기가 힘들거라고 입을 모았다.

훗날, 내가 일본어를 어느정도 하게 됐을 때 선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의 대담 때, 네가 일본이라는 나라를 큰 삽으로 떠서 바다에 푹 빠트리고 싶다고 발언을 했을 때, 내가 아무런 문제 제기도, 반박을 하지 않은 것은 네가 그만큼 젊었기 때문이야. 젊음의 특징은 패기와 용기, 그리고 당돌함이야. 그게 없으면 진짜 큰일을 할 수 없지. 물론 네가 말한 것은 그저 단순히 감정용 배출발언으로,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전혀 불가능한 말이었지만,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당사국의 국민으로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었지. 그래서 아무런 반론을 하지 않았던 거야. 아마 지금은 너에게 똑같이 그런 말을 하라고 해도 못할 걸. 논리적으로 말이 안돼서. 그게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야."

그랬다. 그래서 내가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진짜 큰 삽이 있다면 일본이란 섬나라를 푹 떠서 바다에 빠트린 후, 선한 일본인만 떠오르게 해서 같이 살고 싶죠. 감정상 마음이 그렇다는 거죠. 당시 선생님과 대담을 할 때 그 정도로 일제강점기에 대한 우리 한국인들의 한이 깊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그렇게 극단적인 표현이 된거죠. 용서는 하되 절대로 잊지는 말자는 의미이기도 했구요. 또 일본교과서에 일부러 사실적 기술을 피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도 많고..."

나중에 선생은 나의 이말을 그대로 한 강연에서 재연, 일본인들의 반성을 촉구했다고 한 신문사 기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은 대대손손 후대에 걸쳐서라도, 과거 일제강점기 시대에 대해서 반성을 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이렇듯 의식있는 한 작가의 힘은, 마냥 움추리고 있던 일본인들의 마음에 제대로 된 의식을 심어주기도 하고, 또한 방법을 몰라 엉거주춤 하고 있는 '대화'의 물꼬를 터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잠자고 있는 사회를 움직이는 것이다.

한편, 혼다 야스하루라는 논픽션 작가가 일정부문 일본사회를 움직였다면, 또 다른 의미에서 일본의 근대사, 아니 일본의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일본의 정치흐름을 '바짝 비틀었다 놓은 '일본 전후 최고의 논픽션 작가 '다치바나 다카하시(64세.立花 隆)'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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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7/19 [09:52]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좋은 글 11/07/19 [20:55]
좋은글 감사합니다.
아울러 다치바나 선생의 다음글 많이 기대됩니다.^^ 수정 삭제
정말 좋은 글입니다. 박대근 11/07/20 [18:25]
비단 한국인으로만의 시점이 아니라 여러가지 의미로 새겨들을 내용들이었습니다. 특히나 언론의 사실과 진실에 대한 면은 정말 가슴에 와닿네요. 다음 2편 기대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수정 삭제
인간을 읽다 씨보이 11/07/21 [20:27]
인간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이런 글.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구분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인간을 따듯하고 슬픈 연민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인간을 지금 한국인들은 고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현실이 너무 고단하고 아프기 때문에........ 수정 삭제
1% 영감... 마치 신이 내리는 계시는 듯한 김영택(金榮澤) 12/01/3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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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우주 * 浅田真央 ♡ 愛してる ,あいしてる Asada Mao, Mao Asa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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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결매개체는 트리플악셀

남이 몰라 준다고 속상해 할거 없어요 내가 알아주잖아 .
동행하지 평생 손잡고 가지 늘 함께 곁에서
아사마다오네집에서 나는 살거고
아사다마오 하늘처럼 모시고 조용히 살겁니다

너랑함께 있어..늘

몸은 고치고 가야하는데

울앤아사마다오 푹쉬어도 되 ...

모든 편히는 IMG world 가 전부 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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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마오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지-피겨하잖아

- 아무 생각도 없는 無의 경지에 도달할수있다-

- 3초 내에 떠오르는 영감[靈感]을 잡을수 있게 -
정신적 이미지 트레이닝 훈련

직감[直感]에 의해 행동하게

아무생각없이 직감[直感]에 의해 행동하는 자신을 느낌을 표현하는
테크닉을 가질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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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신체 + 80% 정신적 이미지 트레이닝..

즐겁게 즐기면서 힘들이지 않고 산에올라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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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적으로 생각하면서 정신적이미지들이 근육에 자극을 주고
몸이 신체가 직접 터득을 할수있게

지금의 나가 미래의 나로 바뀐다
현실에서 트악 공중4회전 한다

첨에는 틀리기도 하지만 꾸준하게 생각을 반복적으로 연습을 통해서
점차 실력을 쌓아가면 비슷하게 맞추는 비율이 높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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