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이어짐)
쇼리키의 라디오 방송국 구상
쇼리키의 방송에 대한 욕심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쇼리키의 초기 요미우리 신문 경영은 꽤나 힘들었다. 또한, 신문에 라디오 방송란을 넣을 정도로 쇼리키의 관심은 라디오 방송을 향하고 있었다. '쇼리키 마쓰타로 악전고' 라는 책에는 그의 라디오에 대한 의욕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요미우리의 발생 부수는 5만부였다. 판매 경쟁은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무리한 권유로 가입한 사람이 많았고, 약 1만부는 무료였다. 매달 손실로 힘들었다. 그때 라디오가 들어왔다. 나는 청취자가 단순히 2~3만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10만 아니 20, 30만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신문사업 보다 이 (라디오)사업이 더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실제로 쇼리키는 민간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기 위해 움직인다. 먼저 자신을 요미우리 사장으로 권유했던 고 세이노스케를 사장으로 하고 자신은 전무를 맡은 구상안을 만들었다. 고토 신페이를 통해서 당시의 체신성 대신(후지와라 요시아키藤原義朗)을 설득하고 민영화를 허락받는다.
그러나, 당시의 내각이 물러나고,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내각이 들어서자 체신성 대신도 이누카이 츠요시 (犬養毅)로 교체된다. 이누가이는 당시의 라디오방송국을 주식회사에서 사단법인으로 바꾸고 ‘1지역 1국’ 정책을 시행한다. 이에 따라 이미 도쿄에 있던 도쿄 라디오 방송국은 그대로 두고 나고야와 오사카에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한다. 당연히 쇼리키가 원했던 민간 라디오 방송국은 탄생할 수가 없었다. (이들 3개의 라디오 방송국은 1926년에 일본방송협회(NHK)가 된다)
쇼리키의 민간 라디오 방송국 구상을 실패로 끝났지만, 이때의 실패감이 이후, 텔레비전 방송국 설립을 위한 열망을 더 크게 했을 수도 있다. 라디오 방송은 크게 인기를 끌게 되지만, 2차대전 말기 일본의 패전이 이어지면서 신문, 라디오 등의 언론은 엄격한 통제 하에 있었다. 당시 라디오는 정보 공작을 통해 군부의 성명을 전달하는 ‘대본영 발표’의 장으로 사용된다. 실제 이 같은 언론 통제로 일본 국민은 패전으로 가는 상황을 거의 몰랐다고 한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미국은 일본 점령시대에 곧바로 일본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방송의 민간화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된다. 미국은 일본의 패전 한달(45년 9월) 만에 일본에 민주적 방송, 즉 민간 방송을 허가했다.
종전 후 미나가와 요시죠와의 만남
쇼리키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고이소 내각(1944년7월 22일~45년 4월7일)의 고문으로 취임했었다. 종전 후 쇼리키는 A급 전범으로 취급,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됐다. 일본 내각의 고문이었고, 언론사 사장이었기 때문으로 알려져있다.
이 때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사에 중요한 또 한 명의 인물이 나타난다. 일본에 라디오와 유성영화를 들여온 인물로 대중미디어 시대를 만드는데 일조한 일물, 미나가와 요시죠다.
그는 무역상을 하던 사람이었다. 주로 미국에서 자전거를 사 싱가폴, 홍콩 등에 팔았다. 당연히 미국에 자주 가던 사람이었고, 그때 미국의 리 드 포레스트 박사를 만나게 된다. 포레스트 박사는 ‘라디오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사람으로 삼극진공관을 만든 사람이었다. 포레스트 박사는 이것을 계기로 1923년에 유성영화 개발했고 미국에서는 조금씩 흥행하고 있었다. 이때 포레스트 박사는 미나가와에게 유성영화를 수입해서 일본이나 아시아에 공개해 보라는 제의를 하게된다. 미나가와는 1925년 7월 1일에 유성영화를 신바시 연무장에서 일반 공개했다. 이후 미나가와는 일본에 유성영화제작을 위해 촬영기사를 미국에 보내 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도쿄에 영화 스튜디오까지 만들었다.
종전후 의욕을 상실하고 있던 미야가와에 포레스트 박사가 텔레비전을 소개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지 몇해 지나지 않았지만 그 위력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포레스트 박사는 미나가와에게 텔레비전의 장래성은 밝다며 권유했고, 자신과 함께 출원해도 좋다는 말까지 듣게된다. 미나가와는 일본에 돌아와 점령군 당국(GHQ)과 각계의 인사를 만나며 6개월 이상을 교섭했지만, 1947년 도저히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아이카와(본명 아유카와) 요시스케를 만나러 간다. 아이카와는(세계최초로 영상 송수신 (텔레비전 송수신) 실험에 성공한 다카야나기 켄지로와 함께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 준비했던 사람으로 텔레비전 방송의 장래성을 알고 일본 빅터를 설립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이카와도 전후 재벌 해체로 인해 운신할 힘이 없었다. 따라서 아이카와는 미나가와에게 쇼리키 마쓰타로를 소개한다. 그리고 쇼리키의 텔레비전 방송 사업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된다. 이때가 1948년 봄으로 쇼리키가 스가모 형무소를 나온지 반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쇼리키는 여전히 전범 취급을 받고 있어 쇼리키의 사회활동은 금지돼 있었다. 쇼리키는 마나가와의 이야기를 듣고 텔레비전 사업에 욕심을 보였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따라서 미나가와는 미국의 포레스트 박사에게 부탁해 미국의 국무성에 쇼리키의 추방 해제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포레스트 박사는 국무성에 쇼리키의 추방해제를 몇번이나 시도하여 국무성과 절충하고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장관에게 장문의 탄원서 보냈다고 한다. 이 같은 노력 끝에 쇼리키의 추방은 해제됐다.
후에 쇼리키는 이 탄원서를 보고 “자신을 A급 전범으로 만들고 지금도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구 적국의 학자가 이렇게까지 성의와 열의를 가져줄 지는……”이라며 감사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쇼리키를 중심으로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바다 히데토시와 미국의 VOA의도
GHQ(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 점령을 시작하면서, 방송의 민간화는 일본에 민주주의를 시작하는데 중요하고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50년대 60년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미국의 홈드라마를 본 일본인들은 미국의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하게 됐다. 또한 점령군이 지향하는 바를 전달해줄 미디어로서 텔레비전을 사용할 의향도 있었다. 이 같은 것을 대변하듯이 패전 1달이 지난 1945년 9월22일에 미국 정부는 ‘항복 후 일본에 있어서의 미국의 초기 대일 방침”을 발표하면서 사실상의 일본 점령을 시작했고, 그 3일 후에는 ‘민중적 방송기관 설립에 관한 건’을 발표한다. 이 문서 114P에 민중적 방송 다시 말하면 ‘민간방송 설립에 대한 요건’으로 일본의 NHK외에 민간방송을 허가한다고 적혀 있었다. 점령군은 이미 일본에 민간 텔레비전 방송국 설립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946년에 면허 신청을 받았다. 그러나 GHQ 내부에서는 자신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포함해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GHQ민간 방송의 허가와 불가를 반복하면서 시간만 흘러보냈다.
그러나 미국은 언젠가 시작할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의 언론 자유를 위해 미국의 FCC(연방통신위원회)와 같은 독립된 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 FCC와 똑같은 기구인 ‘전파감리위원회’를 내각에서 독립된 행정기구로 발족시켰다.
‘전파감리 위원회’는 1950년 6월에 ‘전파 3법’의 시행과 함께 시작했고, 이 위원회는 미국으로 전파사정 시찰을 떠난다.이 시찰단에는 당시의 NHK 해설위원이었던 시바타 히데토시도 동행했다. 시바타는 쇼리키가 사장으로 있었던 요미우리 신문 출신이었다. 시바타는 NHK에 있으면서 미국 상원의원 칼 문트가 국회에서 발표한 VOA(비전 오브 아메리카)를 알게된다.
칼 문트는 워싱턴 정보정책을 만든 사람이고, 직접 FEN라디오(극동 네트워크)의 창시자였다. 또한 네트워크를 서독과 일본에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다. 칼 문트는 미디어의 강력한 힘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반공 교육을 내세우는데는 텔레비전 방송이 유용하다는 사실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발표내용을 보면,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텔레비전이 제일 효과적인 무기이다. 기아와 무지와 공포가 그들(공산주의자)이 노리는 3대 먹이감(제물)이다. 이것을 깨부수는 최고의 도구는 텔레비전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 전국네트워크를 포함해서 460만 달러(당시 16억 5600만엔), 다시 말해서 B29 폭격기 2대분의 예산으로 완성된다”고 말했다.
시바타는 이 내용을 쇼리키에게 전한다. 시바타와 쇼리키는 일본에 방송을 만드는데 칼 문트의 힘을 빌리기로 정했다. 그 배경에는 쇼리키 등이 방송국 설립을 위해 움직였지만, 당시 일본에는 방송국을 설립할 만한 기술도 기반도 부족했다. 패전 후 일본에는 텔레비전에 투자할 만한 재벌도 없었다. 쇼리키의 방송국 설립 꿈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때 시바타는 칼 문트의 소식을 전해왔고,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방송국을 설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시바타는 전파감리위원회와 동행, 미국에서 칼 문트 의원을 만났고 쇼리키의 방송국 설립 구상을 밝힌다. 칼 문트 의원도 기술 및 기계를 책임지고 제공해주기로 약속한다.
1951년 8월 31일 쇼리키 마쓰타로는 방송국 설립을 위한 일명 ‘쇼리키 구상’을 발표한다. 이 쇼리키 구상은 일본 전국을 텔레비전 네트워크로 연결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도쿄에 중앙 방송국을 두고, 오사카, 나고야, 삿포로, 후쿠오카 등 주요 도시에 방송국을 설치해 마이크로웨이브(다중통신망)로 연결한다는 계획이었다.
텔레비전 방송으로 사용하지 않는 대역은 통신 목적으로 임대 또는 팩시밀리 신문등으로 사용한다는 구상이었다. 따라서 이 회사는 방송국 뿐만 아니라 통신사업의 민영화도 목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정성 (郵政省)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쇼리키의 구상때문에 현재의 ‘닛테레’의 정식 명칭이 일본 텔레비전 방송망(日本テレビ放送網)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이다. 즉 쇼리키는 일본의 전국을 연결하는 방송네트워크 설립이 목표였기 때문에 이처럼 방송망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만약, 이 구상이 실현됐다면 현재의 일본 방송 시스템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됐을 것이다.
여기에는 또하나의 복잡한 구도가 깔려 있었다.
왜 이처럼 미국은 쇼리키를 포함한 일본의 방송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을까.
그 배경에는 칼 문트의 국회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공산주의 확대에 대한 염려였다. 소련을 중심으로 동유럽과 중국, 북한에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며 공산권 국가는 계획 확대되고 있었다.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아시아의 공산권 확대에 더욱 걱정하게 됐다. 한국전쟁은 민족간의 전쟁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의 대립전쟁이었고, 미국 소련의 대리 전쟁이었다.
쇼리키와 미국정계
이같은 상황속에서 일본은 미국입장에서 볼때 상당히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일본의 전국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통신망은 미국의 아시아 관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구가 최근에 있었다. 일본의 와세다 대학 교수 아리마 데쓰오 교수는 쇼리키 마쓰타로와 미국의 관계를 밝히는 논문 “냉전의 미디어, 일본 테레비 방송망-쇼리키 마이크로웨이브 망을 둘러싼 미국 반공산주의 외교, 정보정책 “(冷戦のメディア、日本テレビ放送網―正力マイクロウェーブ網をめぐる米国反共産主義外交・情報政策)에서 그 모양을 자세하게 보여줬다.
당시 미국에서는 쇼리키의 방송망에 대한 입장 차이를 보이는 두개의 그룹이 움직였다. 일본의 방송망을 심리전에 이용하려던 미국의 상원의원 외교 위원회와 또 하나는 군사적 이용으로 사용하려 했던 미국의 전OSS(전시의 정보 선전 기관) 출신의 그룹이었다.
먼저 쇼리키와 연결된 것은 상원의원 외교 위원회 측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NHK의 해설위원이었던 시바다가 상원의원 그룹에 있었던 칼 문트의 VOA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VOA의 기본 목표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에 미국적 가치관을 선전하고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다는 것이었다. 문트는 "국회에서 독일이나 일본사람들의 철학을 토론이나 라디오 방송으로 인쇄된 책을 대체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들에게 민주주의와 이것이 미국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에 따라서 아시아판 전제정치와 무신론적 물질주의를 표방하는 공산주의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고있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후 미국에서는 이같은 VOA를 강화한 ‘스미스 문트법’이 제정된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방송된 VOA를 새롭게 텔레비전 방송에 접목하고, 친미적 방송 프로그램을 외국에 보내며, 부족한 설비 및 자금도 확충한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정신적 측면 뿐만아니라 인프라 정비도 포함된 것이었다.
실제로 미 국무부는 공산권 주변 국가에 고출력 방송을 통해 소련 등의 공산권의 쟈밍으로 VOA가 도달하지 않는 지역을 커버하려는 계획과, 방송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한 링을 연결해 전파에 의한 철의 커튼을 쳐 친미적 프로파간다(propaganda) 방송망을 건설하려고 했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필리핀과 오키나와에 건설할 계획으로 예산까지 잡았었다.
미국 다중통신망 판매는 일본 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그것을 팔아왔다. 특히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세계에 교육 프로그램을 팔기 위해서 텔레비전 세계통일 표준을 주장했다. 당연히 미국식의 NTSC방식 (주사선 525개, 1초당 30장)이 세계표준이 된다면, 전세계에 친미적 텔레비전 방송을 판매한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상을 생각하고 있던 상원위원회 그룹에 쇼리키가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또다른 그룹, 국방부와 인연이 깊은 OSS는 외교위원회의 심리전과는 다른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다중통신망을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육해공 기지를 연결하고, 특히 레이더망 건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즉 일본 전국을 통신망과 레이더 망으로 둘러쌓는 계획이었다. 이와 함께 필리핀, 오키나와, 일본, 한국 등의 군사적 연계를 이루고 아시아의 공산권 증가를 막을 생각이었다.
아리마 교수는 쇼리키와 미국의 연결에 대해서, 미국은 미국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쇼리키가 끼여든 형태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배경에는 원래 미국이 일본에 건설하려는 방송국은 일본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의 계획은 미국의 자본으로 미국 내(일본에 있는 미군기지, 또는 미국소유 토지)에 미국의 기술과 기계로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 양측의 계획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경비와 미 정계의 관계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민주당이었고, 상원의뭔 그룹은 공화당이었다. 따라서 미 국무부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면서 상원의원 그룹의 계획을 반대했고, 차관 소식이 없는 쇼리키는 상원의원 그룹을 배제하고 구 OSS그룹과 손을 잡는다. 이들은 트루먼 다음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한때 유럽전선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였다. 따라서 OSS그룹은 결국 차관을 비롯한 여러 제반 상황을 해결했다.
미측과 쇼리키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1952년에는 ‘흑백 텔레비전 방송에 관한 송신의 표준방식’을 두고 쇼리키와 NHK를 필두로 한 다른 신청자는 대립했다. 쇼리키는 미국과 같은 6 MHz를 내세웠고, NHK를 포함한 다른 신청자(일본 전사 기업과의 관계)는7MHz를 내세웠다. 일명 ‘메가 전쟁’(메가 헤르츠 전쟁)으로 불리는 일대 다수의 싸움에서도 쇼리키가 승리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정부가 문제였다. 이때 쇼리키가 믿고 있던 요시다 정권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물밑 공작에서는 요시다 수상이 쇼리키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알려젔지만, 일본 국회에서 반대했다. 힘이 다한 요시다로서는 이 반대를 무릎쓰고 쇼리키를 도울 수가 없었다.
쇼리키의 구상에 반대한 것은 일본의 정치권 및 각 신문사 그리고 NHK였다. 방송과 관련된 모든 곳에서 반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NHK는 자신들이 지난 20여년간 준비해온 기술적 축적과 경험의 우위를 뻬앗기기 싫었다. 그리고 이들도 자체적인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통신을 관리해온 전전공사(電電公社. 현 NTT)는 그 당시 겨우, 오사카 나고야에 마이크로웨이브 회선 공사를 끝내, 앞으로 전국적인 독점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반대했다.
각 신문사 또한 이제 라디오 방송국을 가지고 있었고 순차적으로 발전하는 라디오에 텔레비전은 강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는 사민당이 반대했다. 일국의 중추신경이라고 할 수 있는 미이크로 회선을 미국의 지배하에 놓여도 좋은가 라며 반대했다.
이같은 일본내 반대에 대해서는 쇼리키라는 인물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쇼리키와 함께 했던 시바타는 자신의 책 ‘전후 메스컴 회유록’에 “미국의 승인이 있었을 때 바로 요시다 수상에게 가져갔어야 했다. 그러나 쇼리키는 이 성과를 내가 (시바타) 가져갈 것을 염려했다. 결국 시간이 흐르자 반대파가 움직일 시간이 충분해졌다.”고 적었다. 또다른 인물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전 해군장군 (전쟁중 재미대사)는 ‘제페니스 코넥션’에 “나에게 쇼리키 인물을 말하라고 한다면, 상당히 똑똑하고 일을 처리하는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을 자신만을 위해 하는 경향이 있다. 쇼리키가 위대하기 때문에 요시다는 두려웠고 그래서 싫어했기 때문이다”고 평가했다.
결국 쇼리키의 방송망 계획은 무참히도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쇼리키의 다중통신망을 중심으로 전국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계획도 무산됐다. 미국 측도 결국 그들의 계획도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전전공사에 의해 만들어진 다중통신망의 한쪽은 주일미군 측이 사용하게 됐다. 그리고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만이 아시아에서 미국식 NTSC형식을 사용하게 됐다. 또한, 일본의 방송 초기 미국의 많은 프로그램이 방송되면서 아메리칸 라이프 스타일의 동경이 자리 잡았고, 강한 친미적 성향이 나타난다. 결국 미국의 계획은 어느정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같은 사실에 아리마 교수도 동감했다. 일본의 쇼리키와 전전공사의 대립, 이에 따른 국회의 분란이 있어도 결국 미국과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어떤 대립이든 누가 주도권을 잡든 결국에는 미국이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 일본에 미군이 주둔하는 한 일본의 독립은 이런 것이었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쇼리키의 닛테레는 면허1호 이면서 NHK(53년 2월1일)보다 6개월 정도 늦게 개국한다. 많은 장비를 미국에서 수입하는 관계로 그 시일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1953년 8월 28일 일본의 첫 민간 방송국의 방송이 시작됐다. 쇼리키 자신이 구상했던 형태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꿈꿔왔던 쇼리키의 꿈이 실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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