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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사진가, '한류 10년'을 조명하다
유명 재일한국인 사진작가 권철, 그리고 '한류 10년'
 
이지호 기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흔히 쓰는 옛말이 있다.

그 말이 가장 적절하다 싶을 만큼, 지난 10년간 일본 내 재일 한국인 사회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한국, 한국인의 위상도, 생활도, 그리고 재일 한국인 사회의 중심인 도쿄 코리아타운의 풍경도 이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이같이 재일 한국인 사회가 크게 변모하게 된 데에는 일본에 불어닥친 '한류'의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도쿄 신주쿠에서 조금은 특별한 사진전이 열렸다. 바로 '한류 10년'이라는 주제로 열린 사진전이다.

중국 쓰촨성 대지진과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 우토로 마을, 탈북자 문제 등 굵직한 사회 현안이나 사건들을 취재해 화제를 불러모았던 프리랜서 사진작가 권철 씨가,
일본 사회 내 한류의 모습을 자신만의 시각에 담아 전시를 하고 있다.
 
▲ 재일한국인 사진작가 권철 ©JPNews

 
사진작가 권철. 그는 이 바닥에서는 꽤 알아주는 재일한국인 저널리스트이자 사진작가다.

94년 일본에 온 그는, 근 15년 가까이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주간 금요일', '아사히 신문', '프라이데이' 등 일본의 유명 언론에 사진뉴스를 기고해오고 있다. 지난 2008년 말에는, 일본 유흥가 가부키초 거리를 전전하며 노숙하는 4살 여자아이의 생활상을 담은 '가부키초의 고코로짱'이라는 책을 발간해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연행돼 붙잡혀 온 것도 모자라 강제추방 위기에 놓인 강제징용 한국인들의 마을 '우토로', 그리고 일본 한센병(나병) 환자, 재일조선인, 중국 탈북자들을 심층적으로 취재해 일본언론에 발표했다.

바로 이 같은 경력을 인정받아 JVJA(일본 비주얼 저널리스트 협회)의 정회원에 등록되기도 했다. JVJA의 정회원은 총 14명으로, 이들 모두 사진, 영상작가로서 정평이 나 있는 베테랑들이다. 정회원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일본판, 마이니치, 주간현대 등 각종 언론사 주최 사진상 수상 경력자 등이 즐비하다. 이 단체에 그는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는 이번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 때도 JVJA 회원들과 방독면을 쓰고 원자로 건물 수백미터 앞까지 다가가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미 지난 2008년에도, 중국 쓰촨성 지진 현장을 찾아 직접 취재한 바가 있다. 최근 3,4년 사이에 발생한 2번의 엄청난 대지진 현장을 몸소 찾아가 카메라 앵글에 담은 것이다.

그런 그가 한류 10년을 담은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21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그의 작품전이 열리는 화랑 '신주쿠간카가로(新宿眼科畵廊)'를 찾았다.

그의 작품이 전시된 곳은 신주쿠 5초메에 위치한 하얀 간판이 달린 작은 화랑이었다. 이곳에 들어서니 화랑 특유의 고즈넉함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가 아직 화랑에 도착하지 않아 그가 오기 전까지 미리 그의 작품들을 감상했다. '한류 붐'을 일으킨 주역이 드라마와 아이돌 가수라서일까. 그의 작품 중에는 한국 배우와 가수의 일본에서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많았다. 그 중에도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색다른 두 장의 사진.

한 장은 커다란 태극기가 펄럭이는 사진, 그리고 또 다른 한 장은 2002년 월드컵 때 코리아타운으로 몰려든, 빨간 티셔츠를 입은 수많은 한국인의 사진이었다. 이 두 장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점점 궁금해지는 찰나, 마침 그가 화랑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짧은 머리에 다소 남성적이고 투박한 느낌을 가진 그. 악수하는 그의 손 또한 거칠었다. 이 거친 손이 바로 전시회장에 걸린 생동감 넘치는 사진들을 만들어 낸 바로 그 손이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사진 이야기로 들어갔다.
 
"다른 사진보다 이 사진이 메인입니다."
 
그가 가리킨 사진은 바로 좀 전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두 장의 사진이었다.

 
▲ 재일한국인 사진작가 권철 사진전 '한류 10년' ©JPNews
 
 
"여기 한국 서포터들이 찍혀 있는 이 사진의 작품명이 바로 '울밑에선 봉선화'입니다. 아시죠? 그 노래. 울밑에선 봉선화야~"

그가 부른 노래는 홍난파가 작곡한 유명한 가곡 '울밑에선 봉산화'. 이 노래 제목을 타이틀로 덧붙인 이 사진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신주쿠 쇼쿠안도리에 구름같이 몰려든 한국인 서포터들을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거리 한 가득 빨간 티셔츠를 입은 한국인들의 물결이 장관을 이루었다는 것.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인들의 일본 내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어요. 당시 저는 한국에 돌아가려고 마음 먹었었죠. 한국인들이 일본에서 제대로 정착하기 시작했구나하는 느낌을 이때 처음 받았어요. 제가 일본에 계속 있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 재일한국인 사진작가 권철 사진전 '한류 10년' ©JPNews


그렇다면 펄럭이는 태극기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사진도 2002년 월드컵 당시 찍은 거에요. 이 두 장의 사진(울밑에선 봉선화, 태극기)을 통해 한류, 일본 내 한국사회의 하늘과 땅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제가 작업하면서 민족과 민족간의 아픔이 조금씩 치유돼가는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래서  동경 하늘에 펄럭이는 희망을 나름대로 강조한 거죠."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는, 일본 사회에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괄시, 차별의 대상이 되어왔던, 그리고 일본 사회의 '아웃사이드'에 불과했던 한국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또한, 계속되는 한국에 대한 방송으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일정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월드컵을 치르면서 한국의 부정적인 인식이 조금씩 희석되어, 일본 내 한류 붐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는 이 두 장의 사진을 통해, 이 속에서 피어나는 재일 한국인들의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 재일한국인 사진작가 권철 사진전 '한류 10년' ©JPNews


▲ 재일한국인 사진작가 권철 사진전 '한류 10년' ©JPNews

 
그의 설명을 들으며 화랑을 둘러봤다. 이병헌, 2PM, 티아라 등 각종 한류 스타들의 생동감 넘치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는 과연 이 한류 사진전을 언제부터 기획했던 것일까.

"재작년부터 할 생각이 있었어요. 지진 이후 본격적으로 계획을 잡았죠. 동일본 대지진 이후 사람들이 신주쿠로 몰려들더라구요.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그러니까 신오쿠보에 와서 아이돌 가수 사진이나 상품을 사가고, 또 케이팝 라이브하우스에 가서 춤도 추고 놀고 이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죠. 그 모습들을 보면서 한번 작업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최근 것만 전시하면 의미가 약해지니까 한류 초창기 때부터 찍은 약 10년간의 사진을 전시하게 됐습니다."

"나중에는 90년대 사진을 전시해 볼 생각이에요. 90년대 사진은 필름이라 작업이 어려운데, 좋은 사진이 많아요. 그때 당시 사진 중에는 사람들이 장구치고 북치는 모습, 할머니들이 치마저고리 입고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 등이 담긴 사진도 많거든요."

 

◆ 사진작가 권철에게 듣는 '한류 10년'


한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지난 '한류 10년'은 어땠을까. 그에게 '한류 10년'에 대해 들어봤다.

"제가 94년에 일본 유학을 와서 96년도부터 98년도까지 학교에 다녔어요. 그 시기만 해도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죠. 이때 한인들 움직임이 매우 활발했어요. 한국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런데 이게 이시하라 신타로 도지사의 눈에 거슬렸던 것 같아요. 2003년도부터 가부키초 정화 작전이 펼쳐져요. 불법영업업체, 불법체류자, 불법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죠. 가부키초, 쇼쿠안도리도 그 대상이었어요. 지금은 신오쿠보가 코리아타운화가 됐지만, 원래 코리아타운의 중심은 쇼쿠안도리였죠. 이 지역엔 동남아인, 중국인도 있었지만, 비율로 볼 때 한국인이 월등히 많았습니다."


지난 2004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와 다치하나 유타카 도쿄 도 부지사는 신주쿠 가부키초, 쇼쿠안도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다. 그 당시 많은 불법체류 한국인들이 강제추방 당했고, 이 때문에 한인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

"2004년도 당시, 호송차를 수십대 가져다 놓고 새끼줄로 묶어서 연행해 갔어요. 그러다 보니 가부키초의 한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려다 위축 되어버렸죠. 결국 가부키초라든가 쇼쿠안도리를 중심으로 조성됐던 한국식당, 한국 관련 업체, 가게들이 쇼쿠안도리 건너편 오쿠보 쪽으로 흘러들어갔어요"

그때 결정적으로 한류의 불을 지핀 것이 바로 겨울연가 붐이었다.

"2004년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어요. 한국 문화와 정서가 일본사람이 갖지 못했던, 마음속 한켠에 비어있던 정신적인 고독의 일정부분을 채우기 시작한 거죠. 그 때부터 한류라는 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 아이돌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한류가 절정을 이룹니다. 물론 최근 인기는 장근석의 '미남이시네요'가 상당 역할을 했지만."


한류의 절정은 2008년에서 2010년이었지만, 신주쿠 코리아타운에 대거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한 건 대지진 이후였다고 한다.

"2000년도부터 2011년 3.11 대지진까지, 흐름으로 봐서는 코리아타운에 점차적으로 유동인구가 흘러들어온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역설적인 사실이지만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코리아타운의 일본인 방문객이 크게 늘었어요."

"지진이 계기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봐서는 지진 발생 직후인 3~5월 당시 일본에 살던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나름 패닉이었던 것 같아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는지, 이 시기부터 신주쿠 신오쿠보 한인 거리에 일본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죠."

"2010년도까지는 주말에만 사람이 많았지, 지금처럼 사람물결을 이루지는 않았거든요. 지금은 평일에도 사람이 많고, 주말은 걸어다니기도 힘듭니다. 저는 그 원인이 불안한 마음에 있다고 봐요. 마음의 위안을 찾기위해 코리아타운을 방문하는 것이 아닐까요"



◆ 사진작가 권철이 본 한류의 모습


"한류가 지금은 이케맨(미남) 마케팅 식으로 변형이 됐어요. 카페라든가 식당에도 잘생긴 미남이 서 있거나 서빙하지 않으면 장사가 안될 정도로."

'미남이시네요'와 케이팝 아이돌의 인기 탓일까. 한국 거리에는 너도나도 이케맨 마케팅이 성황이다. 이를테면, 커피프린스 같은 느낌이다. 미남이 서빙해주는 카페에 일본 젊은 여성, 중년 여성 할 것 없이 줄지어 찾아오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코리아타운 전체로 퍼져, 이제는 일반 삼겹살 집을 가더라도 꽃미남(?) 종업원을 볼 수 있다.

"저는 나쁘고 좋고를 떠나서 이것도 한류역사의 한 페이지라고 봐요.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다만 좀 더 나은 형태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것이죠. 내가 생각하는 한류 본 모습처럼, 예전에 사람들이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마음으로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듯이 말이죠. 그런 면에서 볼 때 지금 한류는 방향과 형태가 달라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

"더구나 신오쿠보, 쇼쿠안도리 보면 반 이상이 식당이에요. 물론 장사는 먹고살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거리 전체에 식당이 반 이상이라니요. 그리고 나머지 반중에 반은 한류 숍이에요. 연예인 상품도 팔고, 사진도 팔고, 액세서리도 팔고, 이렇게 영리추구의 한류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지금은 다 장사에요. 막말로 1년 만에 팔자를 바꿨단 사람 많아요"

일본인이 워낙 많이 몰려들다 보니 한몫을 잡으려는 한국인이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너도나도 장사에 나서는 모습이다. 오죽하면 한때 한인거리의 유행어가 "나도 장사나 할걸"이었다. 지금은, 한인 거리에서 장사하던 중국인, 대만인들도 업종을 바꿔 한류 장사를 할 정도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장사하지 말라고 말할 자격은 그 누구도 없다. 하지만 이윤만 추구하는 모습이 그리 좋아보이지만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는 한인 거리의 아쉬운 점이 문화 공간이 없는 점이라고 말했다.

"코리아타운이라고 해서 제대로 된 문화공간이 없어요. 한국의 전통이나 문화를 알릴 이벤트장이라든지."

"조금 더 한국의 전통문화 이런 것들이 코리아타운에 형성되고, 정착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바람이에요."



◆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 현장 에피소드 "멜트다운 알았으면 안 갔죠"
 

이제 한류 이야기가 아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2003년 도쿄 이시하라 도지사가 무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토지를 내놓으라고 소송을 걸어 쫓겨날 위기에 처했던 도쿄 에다가와 조선학교 문제를 취재해 해결의 계기를 만들었고(결국 대법원의 화해권고 판결로 토지를 10분의 1 비용에 사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중국과 일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적나라한 참상을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찾아가 르포형태로 세상에 알렸다.
 
그에게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 당시의 에피소드를 잠시 전해들었다.

"(쓰촨성, 후쿠시마 제1원전에는 왜 갔었냐는 질문에) 난 저널리스트니까요. 쓰촨성 대지진이 있었을 때는 그게 최고로 강한 지진이었어요. 규모 8.0이 넘었으니까. 그래서 취재했죠. 후쿠시마도 갔었습니다. 4번인가. 4월 초에 갔는데, 원자로 건물과 불과 몇백미터 거리였어요. 그 땐 이미 멜트다운된 상태였는데, 일본정부가 숨겨서 몰랐었잖아요. 그러니까 저희도 갔던거죠."
 
"JVJA 소속 멤버인 가이닌 모리즈미 씨와 같이 갔었어요. 우리가 들고 간 방사능 측정기가 200마이크로시버트까지 측정이 가능한데, 바늘침이 200을 그냥 넘어가버리더라고요. 솔직히 지금도 그때 얼마까지 올라갔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장비도 하고 마스크도 다 하고 갔는데, 그 장비 쓰면 뭐합니까. 소용이 없는데."
 
"그땐 비장한 각오로 갔어요. 원전에 가는데 도중에 모리즈미 씨가 '넌 40대인데, 갈래 말래' 물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왔는데 파괴된 원자로 보고 가자고 그랬지요. 그래서 한 시간 정도 산을 넘어가서 결국 원전 건물 현장을 찍고 왔어요. 솔직히 그 때만 해도 멜트다운 사실을 몰랐어요. 그거 알았으면 안 갔지. 막말로, 저널리스트가 목숨 내걸고 세계 평화위해 사진찍는다고 하는 거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 번지타는 사람은 없어요.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는 거죠. 제가 해병대 출신인데, 낙하산 들고 헬기에서 뛰어내릴 때 살아남을 거란 희망이 있으니까 뛰는 거에요. 낙하산 없으면 못 뛰어 내리죠. 종군기자들도 죽을 수 있지만, 살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 사진작가, 저널리스트로서의 권철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에서도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는 생활이 쉽지가 않다. 수입이 많을 때가 있는가 하면, 거의 없을 때도 부지기수. 연예나 파파라치 사진기자를 제외하고는 정기적인 수입이 확보되는 프리랜서는 손에 꼽을 정도다.
 
처음부터 줄곧 프리랜서였던 만큼, 사진을 해나가는 데 애로사항이 많지 않았을까. 이 같은 궁금증을 털어놓자, 그 또한 프리랜서 사진작가로서 고충이 많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 재일한국인 사진작가 권철 ©JPNews
 

"초창기에는 트럭 운전사도 했었어요. 다른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렇게 돈 모아 카메라 장비와 필름을 샀죠. 그러면서 주간지, 월간지, 신문사 일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어요." 
 
"상황이 어렵다 보니 한국에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요. 또 8x10사진기로 자연 풍경을 찍고 싶었어요. 그런데 먹고 살려고 하다보니, 어느새 일본에서 18년 체류한데다, 보도 카메라맨이 되어 있더군요."


그는 특히 2001년, 2002년도에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이나 다른 나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할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이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인들이 나름 정착을 하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게 아마 일본에 계속 머문 계기됐던 것 같습니다."

 
▶ "편하게 살 방법은 많았어요"
 

 
그는 매우 강단있고, 자존심이 강하다.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선 철저히 '아니다'로 일관하며 단호하다.

"통신사, 신문사가 좋은 연봉을 제시하기도 했어요. 패션업계, 잡지사로부터도 좋은 조건의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죠. 15년 사진을 찍는 동안 그런 제의가 한두 번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회사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아닐까.

"나 혼자가 좋습니다. 편하고 자유로워서. 그래서 강해진 거죠. 전 도망갈 곳도 없고, 우산(소속)도 없어요."
 
"많은 사람이 TV, 신문이 진실인 줄 알죠. TV는 사실을 보도해요. 하지만 사실 뒤엔 진실이 있죠. 사실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너머의 진실은 현장에 있는 저널리스트만이 볼 수 있어요."
 
"소속이 없으니 자유로운 행동이 가능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 마냥 인위적인 조작도 필요없구요. 이 좋은 세상, 편하게 살려면 충분히 가능하죠. 하지만, 저널리스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이전에 중앙일보가 제가 취재한 에다가와 조선학교, 탈북자 문제, 우토로 마을 문제 등을 이슈화시켜준 적이 있어요. 이건 너무 고맙죠. 그런데 저는 여기까지라고봐요. 기존 언론이 가능한 것은."

"우토로 마을 사례처럼, 강제로 일본에 끌려온 할머니를 이번에는 강제로 나가라 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은 저널리스트밖에 취재를 할 수가 없어요."
 
"10년 전, 지금 이 분야에 첫발을 내디뎠던 이후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리 넉넉한 생활은 아니니, 우리 집사람한테 미안하고 그렇죠. 하지만 나 같이 사는 사람이 있어야 나름대로 세상이 평행유지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한 마리의 늑대'라고 표현했다. 또한 혼자서 활동하는 것이 제일 편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는 일관된 그의 가치관과 고집 센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제가 일본 유명 주간지의 부탁을 받고 독도 취재를 갔어요. 취재비는 나중에 받기로 하고. 그런데 결국 못 팔았죠"
 
"'독도(다케시마)'라고 적으라고 했는데, 끝까지 '다케시마(독도)'로 표기하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나 안 판다'고 말하고 나왔어요. 취재비로 받은 20만 엔도 돌려주고요."
 
강단있다.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 프리랜서로서 장기간 활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그 어떤 생활고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만을 고수해 왔다.

"현실적인 생활고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고 그러죠 뭐. 프리랜서 사진작가, 저널리스트는 상당히 배가 고파요. 막말로 조금 장삿속으로 일을 한다든가, 돈에 대한 욕심이 들면 좋은 사진 작업을 하기가 솔직히 어려워요. 복서가 그렇잖아요. 배고파야 화이팅할 수 있다고. 때문에 저는 배가 고프더라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프리랜서로서 열심히 해나갈 것입니다."

말은 쉽다. 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도 1,2년도 아닌 15년 이상을 배고픈 프리랜서로서 외길을 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그리 녹록치가 않다. 그러함에도 권철 씨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사막에 한 마리의 낙타가 뚜벅뚜벅 정해진 길을 가는 것처럼.
 
그래서 전시회장에 걸린 그의 사진 한장 한장이 새롭고 값지다. 
 

 
 
◆ 권철사진전 '한류 10년'
 
2012년 1월 20일(금) ~ 2월 1일(수)
12:00~20:00(최종일: ~17:00)
 
장소: 신주쿠간카가로(新宿眼科畵廊)
홈페이지: www.gankagarou.com
 
▲ 권철 사진전     © J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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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1/24 [20:11]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방사능 답이 없다 에휴 12/01/26 [23:29]
일본 체류 중인 사람은 어찌하나 수정 삭제
대단하시군요... 봉건일본 12/01/27 [18:18]
존경합니다,,,.앞으로 돈도 많이 버시길... 수정 삭제
다큐3일에서 뵈었던 작가님이네요. Good ~ 12/03/06 [16:59]
굉장히 열정적이시고 사진작가여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동네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사진에 담나 내는 그런 작가님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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