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2월, 강화의 겨울은 유난히 더 추웠다. 서해를 지나면서 다소 기세가 꺾이긴 했으나 먼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은 여전히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게다가 식민지 조선에 불어 닥친 전쟁의 바람은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 조짐은 보이지 않고 더 기승을 부렸다.
사람들은 결단을 해야 했다.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에게 선택의 폭은 없었다. 생존을 위해 버텨내는 일 외에 다른 무슨 방법이 있을까.
문풍지 너머로 뿌옇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사현은 밤을 샜다. 면서기가 주고 간 징용 명령서에 응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사현은 9형제 가운데 둘째였다. 장남인 형님은 큰집에 양자로 들어간 데다 몸이 약했고, 동생들은 나이가 어려 징용에 응할 수가 없었다.
계속되는 공출 독려와 시국동원, 그리고 각종 부역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하는 가운데 젊은 사람들까지 전쟁터와 탄광, 비행장 공사 등에 강제동원되던 때였다. 징용과 징병의 광풍이 강화의 시골까지 불어 닥쳐 민심은 날로 흉흉해져 가기만 했다.
아랫마을에서는 징용과 징병을 피해 집안이 통째로 야반도주를 했다고 하고, 윗마을에서는 면서기들이 떼를 지어 나와 숨겨둔 곡식을 수색하다 땅속에 묻은 것을 찾아내 모두 압수하고, 집 주인까지 잡아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사현도 징용에 나가기 싫어 낮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을 계속 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면서기들이 연일 출장 나와 행방을 묻고 집 식구들을 괴롭히는 것을 마냥 모른 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떡하든 결정을 내려야만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이사현이 밤을 꼬박 새운 것은 낯선 곳으로 끌려가 일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도 있었겠지만, 아내와 태어난 지 이제 13개월 된 딸 희자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없는 동안 두 모녀가 살아갈 일에 대한 걱정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2년이라는 기한이 있긴 하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탓에 기한이 되어도 돌아올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에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동안 두 모녀가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까를 생각하면 앞이 막막했다. 남편 없이 시부모와 시동생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도 힘들고, 입에 풀칠해야 할 식구들이 많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모녀를 처가에서 살게 하자. 처가는 장인어른도 안 계시고 장모와 처남만 있으니 같이 있게 하는 게 좋겠다."
이렇게 결심하자 이사현은 다소나마 걱정을 덜었다. 사실 사위 이사현은 장모에게 언제나 믿음직스러운 백년손님이자 딸 못지않은 사랑스러운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딸 한옥화와 결혼한 뒤 서로 의지하며 잘 사는 것도 고맙고, 4년여 동안 처가를 오가며 농사일부터 온갖 굳은 일까지 나서서 챙겨주는 마음 씀씀이도 고마웠다.
훗날 외할머니가 어린 희자에게 틈만 나면 들려준 아버지의 모습은 훤칠한 키에 반듯한 용모와 자상하고 성실한 마음씨를 가진 그런 사람이었다.
징용을 가기로 결정한 이사현은 마음이 급했다. 자신이 징용가고 난 뒤 아내와 딸이 고생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도 했고, 면서기의 눈을 피해 곡식도 조금 구해 숨겨두었다. 그리고 마당에 우물을 파 두 사람이 물 때문에 고생하는 일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게도 해 놨다.
이사현이 아내와 갓난 딸을 처가에 맡기고 징용을 떠나던 날, 바다에서 불어오는 아침 찬바람은 더 차고 거셌다. 이사현은 처가를 나와 작은 뒷산을 넘어 출발장소인 선착장으로 향했다. 아내와 외손녀를 등에 업은 장모가 마중을 나왔다. 딸의 잠 들어있는 얼굴을 몇 번이나 어루만졌다.
"추운데 빨리 들어가세요. 그리고 무사히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람과 딸, 잘 돌봐주세요." "집 걱정은 하지 말고, 부디 몸 성히 잘 다녀오게."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했으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배에 오른 이사현은 '빨리 집으로 가라'고 배웅 나온 식구들에게 몇 번이나 손짓을 보냈다.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외할머니의 등에서 자고 있던 어린 희자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계는 거기서 멈춰버렸다.
1945년 8월,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면서 조선은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징용과 징병 나갔던 사람들도 한 둘씩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사람들 편으로 소식을 전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사현의 소식은 없었다.
▲ 강화.강화읍용정리 외할머니 댁 ©JPNews | |
외할머니 집은 아버지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 있는 송해면 용정리. 어린 희자가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어린 희자 곁에는 항상 외할머니가 있었다. 외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희자는 자랐다.
조금씩 말귀를 알아들 무렵부터 외할머니는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 항상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 아버지의 체구, 걸음걸이, 모습, 마음씨까지 마음속에 새겨두게 했다. 훗날 이희자가 상상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모두 외할머니의 말에서 나온 것이었다.
외가에서 들판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갑곶리 선착장이다. 외할머니는 밭에서 일하다가도 젊은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들판을 걸어오는 것을 보면,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지켜보곤 했다.
바깥문은 항상 잠그지 않았다. 혹시 사위가 돌아올 때 문이 잠겨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바람 때문에 대문이 삐거덕거리면 "누가 왔나"하고 내다봤다. 장독대에는 항상 정화수가 놓여 있었다. 사위가 만들어놓고 간 맷돌을 갈면서 한숨을 쉬는 일도 해가 갈수록 잦았다.
어머니가 아버지 이야기를 한 기억은 거의 없다. 가장 없는 집안에서 생존을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만 남아있다. 그런 어머니도 가끔은 밤늦게 어린 딸을 업고 선착장까지 산책 가면서 푸념처럼 말하곤 했다.
"아빠가 돌아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구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기라도 했으면 좋을텐데."
외할머니는 희자를 끔찍하게 아꼈다. 소꿉놀이까지 같이 할 만큼 자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어린 희자가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몸가짐을 항상 단정히 하라고 주의를 상기시켰다. 외할머니가 희자를 귀엽게 여긴 탓인지 동네사람들도 그를 귀엽게 여겼다.
친할머니는 외할머니와 전혀 달랐다. 성격이 거칠고 무척 차가웠다. 희자는 어머니와 함께 자주 친할머니가 사는 솔정리에 들렀다. 언제부턴가 할머니는 어머니를 보고 "지 남편 잡아먹은 년"하며 욕을 하곤 했다.
그런 날이면 솔정리에서 용정리로 오는 오솔길에서 어머니는 어린 딸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가 산 마을은 전주 이씨 집성촌이었다. 희자는 명절 때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쫓아 종갓집에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지 못했다.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시댁 나들이도 점점 뜸해져 가기 시작했다.
희자는 그런 할머니가 미웠다. 그러나 막내고모가 희자를 무척 아끼고 예뻐해 주었기에 가끔 갔다. 막내고모는 노래도 잘하고 하모니카도 잘 불었다. 희자는 막내고모를 따라 산으로 들로 개펄로 함께 돌아다니면서 나물을 캐고 놀았다. 잔디와 삘기, 딸기를 따먹었고, 개펄에서 게와 조개를 잡기도 했다. 어린 희자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를 잡아본 적은 없다. 그저 쫓아다니다보면 어느새 해가 너웃너웃 기울어갔다.
아무 걱정 없이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컸지만 희자도 속상할 때가 있었다. 또래 아이들과 놀다가 헤어질 때가 되면 가끔 아저씨들이 데리러 오곤 했다. 멀리서 아저씨가 보면 "아빠"하고 친구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우울했다.
"왜 아빠는 징용 가서 오시지 않는 거지."
그렇게 시무룩하게 해서 돌아오면 외할머니가 어린 희자를 다독거렸다. 그러면 속상함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유년 시절 외할머니와 함께 했던 나날들은 이희자에겐 따듯한 기억들로 가득찬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자, 상상 속의 아버지를 만들어 낸 시간이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