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케이평전 전문>
김대중 씨는 한국의 정치가 중에서 대외적으로 가장 알려진 인물이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반정부운동의 투사였던 야당 시절, 한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체재중에 도쿄에서 서울로 끌려간 김대중 사건으로 유명했다. 대통령 시절인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노벨평화상도 수상했으나, 업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만년에는 최대의 민족적 과제임이 분명한 북한의 민주화는 건들지 않고 대북융화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노벨 평화상의 '반독재투사'가 '북의 독재'에는 계속 눈을 감았다. 이것은 민주화운동의 공적에 상처가 되었다.
김대중 씨는 생애, 3번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는 등 긴 야당생활 끝에 겨우 염원의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인동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좌절과 포기를 모르는 '불사신의 정치가'였다. 퇴임후도 한국정치에 계속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권(1998-2003년)은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7세기 백제왕국이 망한 이래 권력으로부터 멀어진 한국남서부인 전라남도지역의 사람들의 복권이었다.
김대중 씨는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지역차별감정의 피해자였던 고향의 전라도출신자를 지지기반으로 삼아왔다. 이 지역적 기반은 한국사회의 불만층의 중심이 되어 있고, 인구의 30% 가까이 점하고 있다. 여기에 좌파,혁신세력이나 친북세력이 가세하면서 정권을 획득했다.
김대중 씨는 한국이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1970년대 이후 경제개발로부터 남겨진 불만이나 민주화요구를 배경으로 반정부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을 기분 좋게 생각하지 않던 박정희정권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김대중 사건'도 그 흐름에서 일어난 것이다.
라이벌인 박정권은 경제개발에 국력을 집중시키고, 민주주의는 제한하는 '개발독재' 였다. 그 결과 경제발전과 근대화에서 북한과의 국력을 역전시켜, 현재 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그러나 김대중 씨는 박정권을 '독재'라고 비난하면서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다.
다만, 김대중 씨도 훗날, 박정권의 경제발전과 근대화를 평가하고 있다. 여론조사에 의한 역대 대통령의 인기는 박정희 씨가 압도적으로 1위이고 그 다음으로 김대중 씨가 꽤 차이가 벌어진 2번째다.
김대중 씨는 98년, 당시의 오부치 게이조 수상과 '한일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과거 역사에 대해서 일본의 '사죄와 반성'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김대중 씨는 '이것으로 한일간의 과거는 청산되었다'며 앞으로 대일외교에서 과거가 되살아나는 일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에 역사교과서 문제가 일어나거나, 교고서 기술의 정정을 외교문제로서 일본에 요구하는 등 외교마찰을 불러왔다. '지일파'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한일관계의 획기적인 변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열광적인 지지자와 혐오감을 - 한국사회의 평가는 지금도 양분되어 있다.
(산케이 서울 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