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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두 거장 시인이 만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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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시인 신경림, 도쿄서 시집 '낙타를 타고' 日발매 기념 이벤트 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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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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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애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애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뛰어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신경림 '겨울밤' 한국의 '민족 시인' 신경림 씨가 일본 도쿄에서 일본인들을 향해 자신의 시 '겨울밤'을 낭송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한국 문학의 거장다운 호소력이었다. '소장수 신정섭 씨', '떠도는 자의 노래'. '낙타' 등 모두 4편의 시가 차례차례 낭독될 때마다 그 시의 여운을 음미하려는 청중들의 침묵과 정적은 길었다. 한국 근대사의 아픔과 애환을 노래한 신경림 시인(76)의 시선집 ‘낙타를 타고(구온 출판사)’가 일본에서 출간됐다. 지난 6월 30일, 도쿄 재일본 한국YMCA에서 그 기념 이벤트가 개최된 가운데, 신경림 시인은 200여 명의 청중들 앞에서 자신의 시에 대한 철학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또한, 일본 현대 시의 개척자로 불리는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과의 여유롭고 친밀한 대담을 통해 한국의 시와 한국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나타냈다.
▲왼쪽이 신경림 시인. 오른쪽은 일본의 다니카와 시인. © JPNews | | 두 시인의 대담은 서로에 대한 놀라움으로 시작했다. 신경림 시인은 "다니카와 시인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저와 발상의 근원이 대단히 비슷하다고 생각돼 놀랐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생각은 비슷한 곳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니 놀랍고도 반가웠다. 이웃 나라에 이렇게 좋은 시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 기쁘다"며 다니카와 시인을 높이 평가했다. 신경림 시인의 시를 읽고 시적 발상이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밝힌 다니카와 시인은 일본 현대시 문학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일본의 시단이 전통적으로 정형시인 단카(短歌)나 하이쿠(俳句)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현대시를 보급하는데 크게 일조한 인물. 신경림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그의 시에는 '언어의 생생한 아름다움'이 있다. 차분한 신경림 시인과 대조적으로 다나카와 시인은 밝고 쾌활했다. 발상의 공통점이 있다는 신경림 시인의 표현에 다나카와 시인은 "혹시 혼자 사십니까?"라고 의외의 질문을 해 웃음을 자아냈다. 두 시인 모두 결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할 때는 두 시인 모두 진지했고 깊이가 있었다.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이다. 그때 쓴 시는 순수한 서정시였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현실은 서정시를 쓸 만큼 한가하고 여유롭지 못했다. 길거리에는 거지나 창녀, 부랑자, 상이군인이 들끓었고 거리는 불에 타 제대로 된 집 한 채를 볼 수 없었다. 시도 사람 사는 데 일정한 도움이 돼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대의 현실에 어떤 대답을 줄 수 없는 시라면 존재의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10년을 방황하고 제대로 시를 쓰지 못했다" (신경림 시인) "나는 제2차 대전 직후였다. 도쿄도 가난한 시기였다. 어릴 적에 공습이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불탄 집을 구경하러 간 적이 있다. 불탄 시체가 굴러다녔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할 만큼 대단히 인상적인 모습이다. 시인에게 있어 이러한 사회적 상황이나 자신의 경험은 시적 방향성을 결정하데 중요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느낀 점은 언어라는 것이 대단히 불완전하다는 것이었다. 나의 어릴 적 생생한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면, 내가 느끼는 것을 10% 정도 밖에 표출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의미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언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을 중시한 이유다"(다니카와 시인) 불우한 환경은 같았지만, 시에 대한 생각에는 이처럼 확실한 차이를 보였다. 이 같은 차이를 두 거장은 양국의 다른 사회 상황에서 찾았다. "한국과 일본의 시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은 이전부터 시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받아들여져 왔다. 이 같은 생각은 아마 한국의 특수한 역사와 조건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는 침략을 많이 받았고 대내적으로는 심한 착취와 학대가 지배계급으로부터 있었다. 한국시에 독자들이 사회적 상상력, 역사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은 이 점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신경림 시인) "정말 양국이 그 점에 있어 다르다고 생각한다. 일본도 일시적으로 2차대전 직후 의도적인 의미가 담긴 시가 쓰이기는 했지만, 직접 사회에 참가하려는 시라든가 사회적 의미를 담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일본 전통 시인 단가나 하이쿠의 영향이 클 것이다. 단카나 하이쿠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고 풍경을 읇는 서정시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점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시를 느끼는 정서가 다르다고 생각한다"(다니카와 시인)
신경림 시인은 또한, 한국의 독재정권이라는 암울한 역사가 독자들의 시에 대한 기대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신경림 시인은 "한국에서 시집이 가장 많이 팔린 시기가 있다. 1970, 80년대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 시절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유신 독재가 없어져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독자들은 시인에게 암울한 시대의 숨통을 터줄 것으로 요구했고 또한, 당시의 시도 숨통을 터주는 데 일정하게 기여했다. 그래서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시집이 많이 팔렸다. 재미있는 것은 2000년대 들어 시집이 잘 팔리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70, 80년대를 그리워하는 시인들도 있다(웃음)"고 설명했다. 또한, 신경림 시인은 당시 독재정권은 검열을 통해 감시체제를 만들었는데 시에 대한 검열이 특히 심했다고 설명했다. "우스갯소리로 검열이 시의 예술성을 한 단계 높였다는 소리도 한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은유, 상징, 비유를 많이 쓴 것은 사실이다. 검열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73, 4년으로 기억한다. 내가 '농무'라는 시집을 발간했는데 나조차도 얼마나 팔린 줄 모른다. 재판, 3판을 찍어내도 출판할 때는 모두 초판이라는 이름으로 인쇄소에 넘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당국에 많이 나가지 않는 시집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고 검열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신경림 시인의 사인을 받기 위한 일본인들의 줄 © JPNews | |
민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담아낸 시인으로 평가받는 신경림 시인의 작품이 일본인에게서도 아름다움을 인정받은 지는 이미 오래됐다. '가난한 사랑 노래'는 '貧しい愛の歌'라는 이름으로 번역돼 여러 책에서 소개되기도 해 일본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신경림 시인의 인지도가 높다. 2일, 메이지 대학에서의 강연에는 약 2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을 정도. 대담회가 끝나고 신경림 시인의 사인을 받기 위한 일본인들의 긴 줄이 이어졌다. 한국 문학이 한류의 한 축이 되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일본인들의 공감은 깊었다. 신경림 작가는 3일, 일본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이다.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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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7/03 [12:24] 최종편집: ⓒ jpnews_co_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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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는 이러한 경우에 독이다. |
마음에 안 들어. |
12/07/03 [1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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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의 시를 들으면 시성의 풍류를 알고, 두보의 시를 읽으면 은일자의 자족을 안다. 그렇다고 육우의 시를 읽고 난 뒤 중국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것이다. 이 대담 자체가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꼴 아닌가? 보라.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난마와 같은 고통을 겪는 일본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주기 위해선 어떤 시를 써야만 하나? 동일본대지진 직후 고은 시인이 한겨레에 발표한 위로시를 읽고 참 어정쩡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서정시로는 결코 이 벽을 넘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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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ㅇㄹㄴ |
ㄴㄹㅇㄴ |
12/07/03 [2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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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진정한 한일 지성인들의 만남이 많아야 한다. 극우들이 날뛰니 지성인들이 설 공간이 좁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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