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보기
일본6대일간지 ㅣ 정치 ㅣ 경제 ㅣ 사회 ㅣ 문화 ㅣ 연예 ㅣ 그라비아 ㅣ 스포츠 ㅣ 역사 ㅣ 인물 ㅣ 국제 ㅣ 뉴스포토 ㅣ 뉴스포토2 ㅣ 동영상 ㅣ 동영상2 ㅣ 독자 게시판
섹션이미지
일본6대일간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예
그라비아
스포츠
역사
인물
국제
뉴스포토
뉴스포토2
동영상
동영상2
독자 게시판
회사소개
회원약관
개인정보취급방침
광고/제휴 안내
사업제휴 안내
소액투자
기사제보
HOME > 뉴스 > 인물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역도산의 프러포즈는 어땠을까?
日프로레스링계의 아버지, 역도산의 마지막 부인을 만나다
 
오석준 기자
전설의 프로 레슬러 '역도산'의 세 번째 부인 다나카 게이코 씨(71).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7월 9일, 요쓰야 한국 문화원 한마당 홀에서 있었던 한일 야구 이벤트 현장이었다.

이날, 행사가 끝날 무렵 일본의 어느 야구 인사가 "여기에 역도산 부인도 참석했다"며, 다나카 씨를 무대 위로 올렸다. 

 
역도산으로 말하자면, 일본 프로 레슬링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 아닌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전 국토가 폐허가 된 가운데서 몸집이 큰 미국선수들을 가라테춉 한방으로 차례차례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희망을 가졌다.
 
1963년 5월 24일, 도쿄 체육관에서 열린 WWA세계 선수권 더 디스트로이어(The Destroyer) 전은 평균 시청률이 무려 64%에 육박하기도 했다. 이 기록은 일본 역대 시청률 4위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당시 역도산의 일본 내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 왼쪽이 역도산 ©JPNews/ 오석준

 

다나카 씨는 역도산의 마지막 부인이었다. 전 일본항공 승무원으로, 역도산의 구애로 결혼에 골인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불과 반 년만에 역도산이 칼에 맞아 사망, 22세의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비록 역도산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적지만, 반 세기동안 역도산을 지켜온 이 중 하나였다.
 
▶ 관련기사: 역도산의 아내 다나카는 조연이 아니다
 
야구 이벤트가 끝난 뒤, 필자는 재빨리 다나카 씨를 쫓아가 인사를 건넸다. 한국 기자라고 말을 꺼내니 반갑게 인사를 받아 주었고, 이내 인터뷰 요청 의사를 전달했다. 그녀는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승낙해주며, 연락처를 건네받았다. 이후 여러차례 연락을 거쳐 인터뷰 일정을 확정지었다.


▲ 다나카 씨가 일을 도우고 있는 프로 레슬링 관련 숍     ©JPNews/ 오석준


마침내 인터뷰 날이 다가왔고 8월 3일, 도쿄 스이도바시의 한 프로레슬링 숍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나카 씨는 나갈 채비를 마쳤고, 필자와 함께 근처 카페로 향했다. 카페의 구석진 위치에 자리를 잡고, 커피 두 잔을 주문한 뒤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됐다
  

Q: 역도산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
 
A: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그 당시, JAL 스튜어디스 일을 하고 있었다. 입사 2년째였고, 국제선을 주로 담당했다. 일본에서 미국 LA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회사 동료가 당시 톱스타였던 '역도산'이 비지니스석에 있다고 넌지시 알려줬고, 넌 신입 사원이니까 가서 인사하고 오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다나카 게이코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하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 역도산이 "자네가 게이코인가"라며 되물었다. 이렇게 첫 만남이 이뤄졌다.
 
장시간 비행을 거쳐 LA에 도착했고, 역도산은 기장을 비롯해 스튜어디스들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권했다. 나 역시 특별한 약속이 없었기에 함께 식사했고, 선배가 "자주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신다"고 말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도쿄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전화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는 역도산에게 갑자기 전화가 온 것이다. "전에는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식사 대접을 하고 싶습니다"라며 정중히 말하는 것이다. 속으론 "특별히 해준 것도 없었는데"하며, 갸우뚱했다.
 
나중에 교제를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됐는데, 첫 만남부터 만들어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역도산은 이미 나의 사진을 본 상태였고, 비행 스케줄을 확인해 일부러 LA행 비행기를 탔다. 또, 회사를 통해 전화번호도 알아낸 것이다.
 
처음 같이 밥을 먹자고 얘기했을 땐 거절했지만, 두 번째인가 세 번째엔 승낙했다.
  
함께 밥 먹기로 한 날, 나는 오히려 역도산을 기다렸다. 역도산이 취재 건으로 늦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늦게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했다.
 


Q: '역도산'하면 왠지 굉장히 딱딱하고, 무뚝뚝한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로 '역도산'은 어떤 사람이었나? 
 
A: 나는 전혀 무서운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여자, 아이, 노인에게는 항상 친절하게 대했다. 그런데 남자나 자신의 도장 직원들에게는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특히, 재미있었던 사실은 뭔가 잘못하거나, 실수한 사람을 직접 혼내는 일은 없었다. 만약, 누군가 실수하거나 잘못 하면 꼭, 그 위의 선배를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혼내는 것이었다. 또한, 그 선배는 갑작스럽게 왜 역도산에게 꾸지람을 듣는지도 몰랐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자신이 혼낸 그 선배를 다시 불러 이러저러한 상황을 설명했고, 미안하다는 의미에서 용돈을 챙겨줬다.
 
그는 정말 신사적이고, 착한 사람이었다.
 
또, 역도산이 술을 많이 마시고 행패를 부렸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는 평소에 그다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한번은 비행 중, 술을 계속 마셔 대길래 이유를 물어보니 고소 공포증은 아니지만, 비행기가 무서워 그 공포를 잊기 위해 계속 술을 마셨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Q: 프러포즈는 어떻게 받았나?
 
A: 역도산은 나와의 세 번째 만남 때부터, 프러포즈와 비슷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한번은 친척과 함께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역도산의 아파트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그의 집은 마치 할리우드 스타의 집과 같았고, 그랜드 피아노가 작아 보일 정도로 넓은 집이었다. 또, 8층이었는데 자신의 전용 엘리베이터도 있었고, 운전사에 가정부도 3명이나 있었다.

역도산은 나에게 "40세가 되도 결혼할 상대가 나타나지 않으면, 독신으로 산다"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나는 "연예는 괜찮은데, 결혼을 생각하고 있진 않다"라고 말했고, 그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날, 친척과 함께 3명이서 자리한 곳은 일본 전통 다다미방. 리키는 나에게 "친척분 앞에서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다"라고 말하곤 금세 자리를 떴다. 

친척은 나에게 "이렇게까지 말해주는데, 분명히 널 행복하게 해 줄거야. 어차피 결혼은 게임이다. 역도산은 너의 주사위를 던질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이에 나 역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고, 역도산이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결혼해 주겠습니까"라고. 그때, "네"라고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역도산은 또다시 자리는 뜨는 것이었다. 몇 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자, 친척이 한번 보러 가보라고 해 방으로 들어가 봤더니 침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나를 꼭 안으며 입술을 맞췄다. 그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이 흘렀다. 이런 모습 보여주기 싫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역도산은 약혼 사실을 기자들이 시끄러우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역도산 주변에 많은 여자들이 있어 이것을 정리하기 위해서 였던 거 같다.
  
또, 약혼 뒤 물어봤다. 왜 나였냐고. 그는 "내 주위에 있던 여성들과 조금 달랐다. 보통은 스타인 나를 보면 어떤 반응이든 보인다. 그런데 당신은 무관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날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이런 여성을 나는 계속 찾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어느 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기로 했던 결혼 얘기를 어머니의 잘못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역도산의 행동 변화를 감지한 한 기자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 어머니에게 "딸 일, 축하드립니다"라고 한번 말해 본 것인데 이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공식 발표 이전에 기사가 나가 버렸고, 역도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닛칸 스포츠 기자로 기억되는데, 한동안 이 신문사는 역도산 기자회견에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다.
 
어쨌든 1월 7일, 모든 기자들을 모아놓고 약혼 발표를 했고, 역도산은 나의 21살 마지막 날인 6월 5일 결혼식 올리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Q: 그가 조선 국적인 것은 언제 알았는가?
 
A: 약혼한 뒤, 둘이서 함께 팝송을 듣고 있을 때였다. "내가 조선 국적인 거 알고 있었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뜬금없어 "무슨 얘기?"라며 되물었다. 그때, 처음 알았지만 나는 "상관 없다. 당신이 어느 나라 사람이건, 당신이 좋아서 함께하는 거지..."라고 그에게 말하니, 역도산은 조금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정말 어느 나라 사람이건 상관이 없었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도 관련이 있다. 내가 살던 집의 바로 옆엔 미국 사람이 살았고, 조금만 걸으면 조선인 마을도 있었다. 친한 친구가 조선인이라 조선인 마을에 자주 놀러가니, 주변 사람들이 거기 가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다.
 
이 또한, '왜?'라는 의문만 가졌을 뿐, 계속해서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왕래도 잦았다.  

▲ 다나카 게이코 씨     ©JPNews/ 오석준



Q: 역도산과 결혼 생활 중, 에피소드는?
 
A: 그와 함께 한 신혼여행에서 그가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많이 느꼈고, 새로운 것을 접하는 방식 또한 달랐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새로운 것을 보면, 아무 생각 없이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가져가면 인기 있겠다, 좋겠다 등 사업가로서 여러 나라의 문화를 관찰하는 모습이 보였다. 
 
또, 그는 스위스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좋은 토지가 나오면, 구입하려고 전문가에게 명함을 건네기도 했다. 이후, 허니문 베이비를 가진 사실을 알고, 스위스에서 키우자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진지하게 생각한 거 같다.
 
깜짝 놀란 사실도 있었다. '역도산' 하면, 운동만 할 거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현지인과 큰 어려움 없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 그에게 대단하다고 했더니, "글로 쓰진 못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어 어떻게 영어를 배웠느냐고 물으니, "하와이 가기 전, 일본에서 미국사람에게 영어 인사를 알려 달라 했는데, 이 미국인이 'Fuck you'라고 알려줬다. 그래서 하와이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됐다. 이후, 바보 취급당하기 싫었고 매일 영어 공부를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조선어는 잘 모른다고 귀띔했다. 
 
또 하루는 내가 뱀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장난을 쳤다. 침대 속에 뱀 가죽 벨트를 숨겨놓고는 나에게 먼저 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침대에 들어가는 순간 뱀인 줄 착각하고 비명을 지르며 놀라니, 역도산이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곤 껄껄대며 웃는 것이었다. 많이 놀라긴 했지만, 천진난만하게 웃는 그이를 보니 나 역시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Q: 아이가 생긴 걸 알았을 때, 역도산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A: 신혼여행을 갔다 온 뒤, 여름쯤이었다. 몸이 평소와 달라 병원에 가봤다. 임신이었다. 사실 조금 더 있다가 가질 생각이었지만, 이미 아이가 생겨버렸고 싫지도 않았다.
 
임신 사실을 역도산에게 말하니, 너무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리곤 조용히 포옹해 줬다.
 

Q: 역도산은 죽음은?

A: 사귀고 1년 반, 임신하고 반년만인 12월 8일 칼에 찔렸다.
 
당시, 그가 자주 가는 클럽이 있었는데, 그날 따라 만석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사건이 일어난 클럽에 가게 된 것이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봉변을 당했다. 술김에 조직 폭력단원과 말싸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역도산을 찌른 이의 말에 따르면, 말싸움 도중 역도산이 손을 올렸고 반사적으로 찔렀는데, 이를 맞은 역도산은 그대로 쓰러져 칼이 더 깊숙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피의자는 역도산의 굉장한 팬이라며, 이런 사건 일으켜 죄송하다고 몇 번이고 사죄했다. 또, 그의 두목도 함께 집으로 와서 사죄했지만, 이미 그 일은 돌이킬 수는 없었다.
 
결국, 역도산은 일주일 후인 12월 15일, 화농성 복막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의료 사고도 있었지만, 당시엔 의료 사고가 워낙 잦았던 시절이라...
 
그때, 역도산이 눈 감은 사실도 모르고 난 그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 울기 시작했고, 그때야 나도 그가 저세상으로 간 사실을 알았다. 그 사실을 인식한 난, 그대로 쓰러졌다. 
......


Q: 한국 팬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A: 좋은 의미로, 싸우는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젊을 때, 많은 시련을 겪으며 많은 싸움을 해 나갔으면 한다.

▲ 다나카 게이코 씨     ©JPNews/ 오석준

 
다나카 씨는 인터뷰 도중에 역도산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고, 그의 죽음을 얘기할 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1년 반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나카 씨가 역도산에 대해 말을 할 때는 마치 한평생을 함께한 사람 같았다. 


 
◆ 역도산

그는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아버지였다. 
 
김신락이라는 본명을 가진 그는 본래 씨름선수였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모모타 미쓰히로'로 개명한 뒤, 이듬해부터 역도산이라는 별명으로 스모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심했던 터라, 요코즈나(씨름의 천하장사)가 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역도산은 미국으로부터 프로레슬링을 도입, 창단부터 프로모션까지 담당하고 자신도 레슬링선수로 전향한다.

그리고 1958년, 세계선수권자인 j.s.루테스를 물리치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전 국토가 폐허가 된 가운데에서도 몸집이 큰 미국선수들을 가라테춉 한방으로 차례차례 쓰러뜨리는 역도산의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희망을 가졌다. 

 
당시 일본에서 역도산의 인기는 대단했다. 1963년 5월 24일, 도쿄 체육관에서 열린 WWA세계 선수권 더 디스트로이어(The Destroyer) 전은 평균 시청률이 무려 64%에 육박했다. 이 기록은 아직도 일본 역대 시청률 4위로 남아있다.
 
그는 같은 해 겨울, 도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한 일본인의 칼에 찔렸고, 일주일 뒤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2003년, 다나카 게이코 씨는 의료사고라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 일본이 보인다! 일본전문뉴스 JPNews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기사입력: 2012/09/04 [23:07]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김신락.......;; 그냥 12/09/05 [22:49]
김신락(金信洛)1924 ~ 1963

함경남도 흥원군 출생 역도산(스모 선수시절 명),일본이름(모모타 마츠히로) 모모타가문 양자입적
1940년 조선의 씨름대회에 출전한 역도산을 일본인 형사가 발견,일본 스모도장에 소개했다는 설
일본에 건너가기전 결혼해서 자녀가 있었으므로 실제나이는 호적보다 5살가량 많을것이라 추정하는
설도있으나 ,북한내 자녀는 부모가 스모 선수가 되기 위해 일본에 가려고 하던 아들을 막기 위해
근처 마을에 살던 박신봉이란 처녀와의 결혼을 무리하게 추진했었고 ,차후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번 고향 방문중 부인이 임신을 했다함.

당시 스모 선수는 전쟁터의 군대를 위문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군 위문차 만주로 갈 때
잠시 짬을 내 고향에 들렀던 것, 이때 고향에 있던 그의 첫 부인과 하룻밤을 보냈는데,
이로 인해 그 부인은 임신을 했다는설이 신빙성이나 추정상 가장 정확할듯.


일본에서의 대단한 인지도 및 인기만큼이나 풍문이 많은사람.
풍문중엔 틀린부분도 많고 맞는 부분도 있겠지만 풍문만큼이나 적이 많았던 사람임에는
분명해보임. 한국은 물론 재일한인 사회에서도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못함.

가급적이면 조선인임을 숨기고 살아왔으며 ,일본출생 자식들에게까지 함구,
오직 성공을 꿈꾸며 모욕과 차별속에 혈혈단신 외지생활을 버텨나갔을 그의 심정을 전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조선인이란 사실은 일본내에서 주류로서의 성공을 꿈꿨던
청년기 마츠히로에게 열등의식의 근원이며 제약이자 애증의 이름이였지 않았을까 짐작해봄.

이는 한일 근대 격투계의 또 한명의 거두 최영의(최배달,일본명 오야마 마스타쓰(大山倍達)와
크게 비교되며 후세 평가의 대척점에 있음.
다만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엔 일본사회 특유의 멸시와 차별때문에 일본사회내 이런 사정의
재일교포 중간자가 적잖아 특별히 예외적으로 거론될 문제는 아님.

그렇다해서 조선에대한 애정이 증오로 변질되지는 않았던듯 , 정치적,처세적 이유도 컸겠지만
재일동포 야쿠자등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역도산을 흠모해 밀입국한 김일을 수용소에서 꺼내
제자로 받아들여 가장 아꼈다함.
다만 김일에게 오오키 킨타로라는 링네임을 붙여주었는데, 한국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다고하며
김일과 대화할 때도 한국말을 사용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중년이후 사망 수년전부터는 친지와 가족이남아있는 조국에대한 향수인지 심경의 변화인지
남북을 모두 방문하며 스포츠 부흥을 꾀하기도했고 여타 변화된 행보를 보이기도 했음.
특히 친지와 가족이있는 북한과의 관계에 신경썼으며 김일성에게 벤츠를 선물하기도 했고
북한내 친지, 자녀들은 현재도 요직에 앉아있음.
다만 조국방문등 관련 내용이 일본에 알려지는건 극히 경계하고 크게 민감해 했었다함.

http://www.ddanzi.com/blog/archives/6504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843711
http://jbcxfile.tistory.com/91
http://blog.naver.com/mettro77?Redirect=Log&logNo=40008645946 수정 삭제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역도산 관련기사목록
  • 역도산의 프러포즈는 어땠을까?
  • 최근 인기기사
    일본관련정보 A to Z
      회사소개회원약관개인정보취급방침 ㅣ 광고/제휴 안내사업제휴 안내소액투자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한국> 주식회사 올제팬 서울 송파구 오금로 87 잠실 리시온 오피스텔 1424호 Tel: 070-8829-9907 Fax: 02-735-9905
    <일본> (株) 文化空間 / (株) ジャポン 〒169-0072 東京都新宿区大久保 3-10-1 B1032号 
    Tel: 81-3-6278-9905 Fax: 81-3-5272-0311 Mobile: 070-5519-9904
    Copyright ⓒ JPNews. All rights reserved. Contact info@jpnews.kr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