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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권철, 16년간 日환락가 찍은 이유
가부키초를 16년 동안 사진에 담아온 사진작가 권철 인터뷰
 
이지호 기자
지난 2일 토요일 늦은 저녁, 일을 마무리하고 사무실을 나와 도쿄 도심을 순환하는 야마노테 선을 타고 도쿄 신주쿠 구 가부키초로 향했다.

가부키초(歌舞伎町)는 일본 최대 유흥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말 그대로 가부키 극장이 있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전후 폐허에서 새롭게 조성됐다.
 
본래 이곳에 일본 전통 연극인 가부키 공연이 열리는 극장을 건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건전하고 문화적인 마을을 조성하는 전후 부흥 계획이 잡혀 있었고, 이 같은 계획 아래 '가부키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자금문제 등 여러 연유로 무산돼 지금은 일본 최고, 최대의 환락가가 됐다.
 
밤 9시 가까운 시간에 되어 이곳에 도착했지만,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현란한 네온 사인과 수 많은 인파가 시야를 자극했다.

이곳을 상징하는 '가부키초 1번지' 네온 간판 아래에 도착하니 인파 속 거리 한복판에서 검은 점퍼 차림을 한 남성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바로 재일 사진작가 권철(나이) 씨다. 그는 2000년대 초부터 프리랜서로 일본 언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진 작가로, 지난해 '한류 10년'이라는 주제로 개인 사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가 사진을 찍을 때면 어딘가 야생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사냥감을 노리는 한 마리의 야수같다고나 할까.

사실 그는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에 더구나 ‘일당백’이라는 저격수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그와 관련된 기사는 늘 ‘스나이퍼’라는 문구가 들어간다. 사진작가와 스나이퍼. 결정적인 순간에 셔터와 방아쇠를 누른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기자가 가부키초를 밤늦게 찾아간 것은 아쉽게도(?) 유흥 목적이 아닌, 바로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진 찍기에 열중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약간 떨어져서 잠시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는 동물적인 육감으로 기자의 시선을 느꼈는지 금세 이쪽을 쳐다봤고, 이어서 반갑게 악수를 청해왔다.

이날 그를 만난 이유는, 최근 그가 책을 출판했기 때문이다. 무려 16년 동안 매 주말마다 밤을 새워가며 가부키초에서 사진을 찍어, 이를 한 데 모아 한 권의 사진집으로 엮은 것이다.
 

▲ 권철 - 가부키초의 상징인 '가부키초 1번지' 간판 앞에서 ©JPNews

 
사진집의 타이틀은 '가부키초'.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사진집부터 내밀었다. 지난 16년간의 자신의 인생이 모두 들어있다고 말했다. 그 인생을 사진집 형태로 대중 앞에 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잠시 사진집을 훑어보았다. 제법 페이지가 있는 사진집에는 경찰과 야쿠자, 호스트, 호스티스, 가출 소녀를 비롯한 폭력과 성, 사건의 현장, 각종 범죄, 그리고 가부키초에서 서로 부대끼고 사는 이들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 중에는 가부키초의 현란함 속에 감춰진 한국인의 모습도 들어 있었다.

가부키초는 바로 옆 쇼쿠안도리, 신오쿠보와 더불어 코리안 타운의 일부분이라고 할 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야쿠니쿠라고 하는 불고기 전문식당, 그리고 일본진출 역사가 꽤 길다는 코리안 클럽에까지 한국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도 찍었고, 또 때로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기에 촬영이 용이한 부분도 있었다. 만약 일본인이었다면 가부키초의 전체적인 모습을 잡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사진에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의 사진이 가부키초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왜 가부키초 사진을 찍은 것일까?

야쿠자들의 사무소에서 찍은 사진부터 도오리마(무차별 살상) 사건 현장, 야쿠자와 흑인 호객꾼의 싸움 등 사진을 찍는 데 어려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어떤 매체에서 매번 취재비나 사진을 사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매주 금, 토요일이 되면 밤을 새워가며 사진을 찍는다. 여기에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또 매 주말 그의 눈에 비친 가부키초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 스나이퍼 사진작가가 본 가부키초 16년

기자) 가부키초 사진을 찍게 된 동기는?

- 1994년에 사진을 공부하러 일본에 왔다. 1996년부터 유명 보도사진가인 히구치 겐지가 있는 보도사진학교에 들어가 사진을 공부했다.

그 당시에는 현재 코리안 타운으로 불리는 신오쿠보 보다는 가부키초와 바로 옆 쇼쿠안 도리가 한국인 거리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주변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다 1996년, 사진학교 1학년 때 쇼쿠안도리 쪽에서 볼일을 보고 집에 돌아가던 중, 가부키초의 한 파출소 앞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야쿠자와 경찰 3,40명이 웃통을 벗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각목, 쇠파이프를 들고 싸우는데, 사실 그 때 사진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못 찍었다. 그런 일을 처음 봤거니와, 문신 있는 야쿠자를 직접 보는 것도 처음 이어서 솔직히 몸이 얼어붙어버렸다.

이 때의 아쉬움 때문인지, 그 이후 가부키초라는 지역에 흥미를 가지게 됐다. 그래서 학교 과제 테마로 가부키초를 찍게 되었다. 이것이 가부키초를 찍게 된 계기다.

기자) 막상 가부키초를 찍어보니 어떠했나?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도 병행했었기 때문에 밤에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가부키초가 밤 문화 지역이어서인지 오히려 찍기가 더 좋았고 재밌었다. 마치 전쟁터 같았지만,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곳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새벽까지 치열하게 사는 모습도 보았고, 삶의 풋풋한 냄새 같은 것도 느꼈다. 그래서 가부키초를 계속 찍게 됐다.

아, 중간에 그만 둘 뻔한 적도 있었다.

내가 90년도 후반부터 학교 다니면서 나병 환자 취재도 했는데, 정말이지 2000, 2001년도에는 너무 힘들었다. 돈도 없고, 생활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00년도에 한센병 환자들의 사진으로 주간 금요일과 아사히 신문 등 메이저 언론을 통해 데뷔하게 됐다.

이후 일본 주간지와 한국의 ‘지오’라는 잡지 등을 통해 사진을 판매하면서 근근이 생활할 수 있었다. 이때만해도 생활이 어려워 한국에 귀국하는 것도 생각했다. 일본에서 한국인이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다. 나는 이 때를 한국인 거리에 봉선화 꽃이 피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이전부터 한류의 조짐이 있었지만,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한일 월드컵이었다. 나 또한 월드컵을 계기로 일이 계속 늘어났고, 일본에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기자) 가부키초와 한국인은 역시 떼어 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 사실 한류의 성지는 신오쿠보가 아니라 가부키초와 쇼쿠안도리였다. 하지만 가부키초에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의, 일명 ‘정화작전’으로 한국인 가게들이 초토화되면서 신오쿠보 쪽으로 코리안 타운의 중심이 옮겨갔다.

솔직히 내가 볼 때 정화작전의 계기는 '파리젠느 사건'이었다. 월드컵이 끝난 2002년 9월, 가부키초의 ‘파리젠느’라는 카페에서 권총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마피아가 일본 야쿠자 간부 두 명을 쏴서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중상을 입은 사건인데, 당시 파리젠느 안이 피바다가 됐었다. 그 때 현장을 찍은 사진이 이번 책에 들어가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시하라 도쿄 도지사가 2003년도부터 가부키초 정화작업을 시작하고, 불량 그룹이나 불법체류자, 불법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됐다. 당시 가부키초에는 한국인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정화작업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이들이 바로 한국인들이었고, 이시하라 도지사 또한 한국인을 주요 타깃으로 삼았다.

2003년 4월부터는 매일 호송버스, 기동대가 와서 한국인 클럽, 술집, 미용실, 식당에서 불법 체류자 한국인들을 적발해서 몇 십 명씩 새끼줄로 묶어가는 등 완전히 싹쓸이했다. 거의 1년간 그렇게 불법체류자 한국인들을 초토화시켰다.

▲ 대대적인 단속작업 벌이는 일본 경찰  ©권철

 
그 때 이 지역 한국인들의 존립이 상당히 위태로웠다. 2003년도 가부키초 정화작업에서 한국 인들이 거의 전멸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많이 잡혀갔다. 이후부터 가부키초의 한국인들이 대거 신오쿠보 쪽으로 이동하게 됐다.

기자) 한국인 불법체류자가 그렇게 많았나

불법체류자도 많았고, 불법노동자도 제법 됐다. 체류자격이 안 되면서 일하던 사람은 모두 다 잡혀갔다. 어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그러면서 가부키초에 점점 한국인들이 줄어들었다. 가게들도 문을 닫았다. 큰 식당, 큰 술집 모두 문을 닫고 사람들이 손을 씻고 나가는 이들이 많았다.

(덧붙이면, 당시 한국인 식당 종업원은 일본 비자가 잘 나오지 않아, 식당 종업원들 상당수가 일할 수 없는 비자자격이거나, 불법체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하라 도지사의 정화작업은 한인사회에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단속이 심할 때는 거리에 사람이 안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식당 직원의 비자 취득이 이전보다 용이해졌고, 불법체류자 또한 상당히 줄었다.)

이후로 한국사회가 많이 바뀌었다. 한류의 기본 성지는 가부키초였지만, 정화작업과 더불어 2004년에 겨울연가 붐이 일면서 신오쿠보 역 부근이 한류의 중심지가 됐다. 또한 예전에 비해 가부키초의 활기가 훨씬 줄어들었다. 대신, 어른이 즐기는 가게가 줄고 가라오케나 술집 등 건전한 가게들이 많이 들어섰다.

환락의 마을에 네온 사인이 이전에 비해 많이 꺼진 것이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 가부키초라는 마을은 완벽하다. 록본기 등 다른 지역과 비교를 해봐도 가부키초 만큼 완벽한 마을은 없다.

기자) 어떤 의미로 완벽하다는 건가?

피사체로서도 그렇고, 놀이문화, 풍속 문화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시부야는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곳이고, 롯본기는 외국인이 중심인 마을이다. 그런 것들을 총망라해서 집대성한 곳이 바로 가부키초다. 이곳은 참 에피소드도 많고 그렇다.

나 또한 보도 사진가, 저널리스트로서 가부키초를 통해 저널리즘을 배웠고 권력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사진작가 저널리스트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걸 가부키초를 통해 공부했기 때문에 이 마을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가부키초 취재 16년째지만, 취재하면 할수록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마을 같다. 인간의 욕망은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데, 맨 정신에는 본능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취했을 때는 본성, 본능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밤의 마을 가부키초는 인간의 욕망이 잘 표현되고, 잘 나타나는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보다 더 적절한 피사체는 없다.

앞으로 얼마나 가부키초를 더 취재할지 모르지만, 취재하는 동안은 가부키초의 네온이 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불경기지만, 역시 가부키초는 가부키초다. 얼마 전에는 칼 휘두르는 젊은이를 경찰이 포위해서 잡는 장면을 달려가면서 찍었다.

기자) 그런 건 어떻게 포착하나?

경찰이 무선 받으면서 뛰어가고 하니까. 이런 것을 잘 포착해서 단숨에 달려간다.

난 한 번 노린 타깃은 절대 놓지 않는다. 난 해병대 출신이고, 평소 몸관리도 하는 편이라 달리기도 빠르다. 신문사 카메라맨과는 달리 나는 현장의 저널리스트이기 때문에 더욱 리얼한 장면을 찍어야 한다.

그래서는 나는 촬영할 때 초광각 아니면, 초망원 렌즈를 쓰지, 어설픈 렌즈는 쓰지 않는다. 금, 토요일에는 가부키초에서 밤을 새우며 촬영하는데, 카메라 장비를 가볍게 하기 위해 카메라 하나에 광각, 망원 렌즈 각각 한 개씩 준비한다. 대부분은 초광각 렌즈로 찍는데, 누가 싸우는 장면을 찍을 경우, 피가 튈 정도로 가까이 접근한다. 그 안에서 사진을 찍는다든가, 체포하는 장면 같은 경우는 경찰 다리 사이라든지, 경찰이 범죄자와 대치하는 와중에 밑에다 놓고 사진을 찍는다. 결국 나만의 철학이 담긴 사진을 찍는 것이다.

기자) 살벌하겠다.

그렇다. 그러다 보니 가끔 카메라가 부서질 때도 있다. 필름 카메라 쓰는 학생시절에는 카메라를 내동댕이치는 야쿠자도 있었고, 그 바람에 카메라 뚜껑이 열려 필름을 못쓰게 된 적도 있었다. 어떤 때는 감금당한 적도 있다. 그래도 나는 내 소신을 가지고 사진을 찍는다. 이제는 가부키초 담당 경찰관들과도 안면이 있고, 거리의 사람들도 날 알아본다. 그들은 날 ‘가부키초 카메라맨’이라 부른다.

기자) 평소 가부키초에서 어떤 사진을 찍으려고 하나?

가부키초에서는 내 나름대로 인간 냄새 나는, 정감 있는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한다. 또, 아스팔트 위 네온에 휩싸인 마을에 사는 인간의 삶이라든가, 생과 사의 이런 치열한 전쟁터 같은 냄새라든지 이런 것들을 많이 찍으려고 노력한다. 연예인이 있으면 찍기도 하고, 야쿠자가 있으면 찍고. 인간의 욕망이나 삶, 사람 냄새, 가부키초의 향기를 찍으려고 노력한다.

기자) 책이 나온 감회는 어떤가.

감개무량하다. 가부키초와 관련된 책은 이번이 세 번째다. 이번 책은 내 16년을 집대성했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가고, 실제 사진집이 잘 나와 마음에 든다. 후소샤(일본의 유명 출판사) 편집자들과 한달 동안 일주일에 두 세번 씩 만나 논의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사람들은 가부키초를 쉽게 이야기하는데, 가부키초라는 마을이 한국인들과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가부키초가 왜 한류의 성지가 되었는지도 이 책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기자) 권철에게 가부키초란?

가부키초는 나의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또 쉽게 이야기해서, 사진, 저널리스트로서의 철학을 심어준 곳이다.

기자) 사진 찍을 때 중요시하는 부분이나 사진 철학은 무엇인가?

나는 되도록 사실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보고자 한다. 이를 중점적으로 보고 있다. 또한, 항상 사진 촬영 대상이 되는 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가부키초의 나이 어린 노숙자 여자 아이에 대한 사진집 ‘가부키초 고코로 짱’이라는 책을 냈을 때의 이야기다. 내가 고코로 짱이라는 나이 어린 노숙자 여자 아이의 사진을 공개하고 나서, 일본이라는 경제대국에서 나이 어린 노숙자가 있다는 사실이 크게 이슈가 되어 이 이야기가 일본 주요 언론에 오르내렸다.


▲ 가부키초 코코로짱     ©권철

 

당시, 나는 그 아이의 가정환경이라든가, 엄마, 아빠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지만, 책에 가능한 한 쓰지 않았다. 쓴다면 더 이슈가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책을 혹시라도 이후에 본인이 보게 된다면 어떨까 란 생각을 했고, 그 아이가 보더라도 마음 아파할 부분은 최대한 제외했다. 그렇다고 거짓기사를 쓴 게 아니다. 말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뿐이다. 반드시 알리는 것만이 저널리스트가 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가부키초를 통해 배웠다.

에디 아담스의 베트콩 공개처형 장면을 찍은 유명한 사진이 있다. 취재진이 주위에서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공개처형한 것이다. 만약 그 자리에 저널리스트가 한 명도 없었다면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거다. 저널리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가령, 가부키초 같은 경우를 보면, 노숙자가 요시노야에서 소고기 덮밥 한 그릇을 무전 취식한 적이 있었다. 경찰이 왔는데, 이 경찰이 이 노숙자를 과잉 진압했다. 수갑을 채우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서 얼굴을 발로 밟았다. 책에도 8페이지에 걸쳐 나오는데, 그 상황에서 저널리스트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 경찰이 내가 찍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 내가 찍는다는 사실을 일부러라도 티를 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럴 때가 종종 있다.

기자) 그런 부분은 딜레마가 있을 듯하다. 마무리할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가부키초 촬영은 계속 할 것 인가.

프리 카메라맨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 할지 모르겠다. 힘 닿는 한 가부키초 카메라맨으로서 이 일을 해나가고 싶다.
 

◆ 권철 사진집 '가부키초'
(가부키초 스나이퍼가 본 16년)
 
지금은 없는 코마극장, 사건현장, 경찰의 적발, 범행의 순간, 밤의 환락가, 가출소녀와 노숙자, 상점가의 일상, 한국인과 한류 등이 담긴 재일사진작가 권철의 사진르포집.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그의 특종사진이 다수 수록돼 있다.
 
사진·글: 권철
발매일: 2월 6일
정가: 1900엔
출판사: 후소샤
 
※ 이 책은 일본에서만 판매됩니다.
 
 
◆ 사진작가 권철은 누구?
 
1967년 한국 출생. 대학 재학 중이던 1988년에 휴학하고 해병대로 입대했다. 대학 졸업 뒤인 1994년에 일본에 와서 일본사진예술전문학교에 입학. 보도사진가인 히구치 겐지(樋口健二)의 가르침을 받는다. 1999년에 한센병 환자의 사진기사가 잡지에 실려 언론계에 데뷔한다.
 
신주쿠 가부키초, 오쿠보 한류, 한센병 환자, 재일조선인 등을 취재했다. 중국 스촨성 지진, 3.11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에 들어가 열띤 취재를 벌였고, 다수 언론을 통해 그의 사진이 발표됐다. 저서로는 '가부키초의 고코로 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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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2/11 [10:51]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제목은 무슨 이가서 13/02/12 [01:10]
기자님 가부키쵸에 가부키극장이 있어요? 어디에 있어요? 있었던 적은 있나요? 가부키쵸라는 명칭의 유래는 가부키좌를 유치하려고 유치결정이 나기도 전에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눈으로 확인되지 않은 짐작이나 추론으로 얻어진 지식으로 기사를 쓰면 안돼요. 언론고시 안봐도 기자 타이틀 달 수 있는 세상이라도 그러면 안돼요. 수정 삭제
가부키초 정화작업이 마치 한국인만을 타깃으로 한듯한 뉘앙스는... jeje 13/02/12 [04:30]
역시 한국인들이기 때문에 생각의 한계같은게 보이는군요. 거기에 불법 영업을 하는 한국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화작업의 대상이 된 것이지, 특별히 한국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한 일이 아님을 확실히 얘기해야지요. 괜히 두루뭉술하게 얘기하니까 쓸데없는 오해들이 또 생기는 거잖아요. 수정 삭제
쪽바리도 여기 오나요? JAP 13/02/12 [12:36]
역시 한국인들이기 때문에 생각의 한계같은게 보이는군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다음 쪽바리 수정 삭제
비판도 좋지만 제대로 읽고 나서 보메 13/02/16 [02:24]
이가서님. 3번째 단락 잘 읽어보세요. 무산된 계획이라고 나오잖아요. 수정 삭제
뇌에 주름이 없음? 이가서 13/03/04 [10:37]
보메님 내가 쓴글 보고 쳐고쳤으거라곤 생각이 안됨?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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