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놔. 돌겠네. 그러니까 여긴 취재하면 안된다니까. 일본어 몰라요?" 17일 오후 일본의 국민적 아이돌이었던 사카이 노리코(애칭 '노리피')가 오다이바 완간(湾岸)경찰서에서 보석으로 석방된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나갔다.
원래는 15일 풀려난다고 해서 갔다가 시원한 바닷바람만 6시간 동안 쐬야만 했다. 완간 경찰서 정문 근처에 기다리던 기자들은 200명 정도? 14일밤 촬영용 사다리로 자리를 맡아놓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취재용 포토라인이 설치되어 있었고, 매스컴은 그 뒤에서만 취재가 가능하다고 '대표 간사'라는 니혼tv의 스탭이 정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서 서성거리는 나에게 다가와 비켜달라고 한다. 왜 비켜야 하는지 물어보니, 내가 있는 곳에선 취재하지 않기로 경찰들과 약속을 했다고 한다.
▲ 17일 도쿄 오다이바 완간경찰서 앞에는 약 300명을 넘는 보도진이 집결했다 ©박철현 / jpnews | |
하지만 그런 소식을 듣지 못한 나는 이해가 안갔다. 경찰이 와서 뭐라 그러면 몰라도 같은 처지끼리 '대표 간사'라는 누가 부여한 건지도 모르는 완장질을 해대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서로가 양보해야 하는 실내의 기자회견이나 공적기관의 스피치라면 또 모를까 '대표 간사' 어쩌고 하는, 이른바 '기자클럽' 마인드를 이번처럼 옥외에서 발휘하는 건 좀 웃기다. 촬영용 사다리 몇대와 수십명의 스탭을 동원해 자리를 미리 선점해 놓은 사람들이 누구였지?
실제 각 민방은 이번 사카이 사건에 총 5, 6개팀을 풀었고 헬기까지 동원했다. 이들이 3개팀 정도만 투입했다면 그만큼 다른 미디어들이 취재할 공간도 생길 것이고, 아마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관점의 컨텐츠가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헬기와 위성을 풀가동시킨 니혼tv, tbs, 후지tv, tv아사히는 15일부터 17일까지 하루 왠종일 사카이 노리코로 채웠다. 특히 와이드쇼 '오모잇키리don'과 '미야네야'의 원투펀치를 가지고 있는 '대표 간사' 니혼tv는 전파낭비라고 해도 될 정도로 집요하게 별 진전도 없는 사카이를 가지고 놀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사자는 경찰서에 있는 상황이고 관계자들은 일제히 함구령을 내렸다. 남편인 다카소는 16일 풀려나 매스컴을 피해 도주극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뉴스꺼리가 나올 게 없다.
뉴스가 되려면 사카이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려면 보석금이 지불되어야 한다. 그런데 15일 현재 보석금이 지불되지 않았다는 정보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주구줄창 기다리면서 30분에 한번씩 완간 경찰서 앞을 중계로 연락해 현장리포트를 따고 있었다.
이런 말을, 사실은 '대표간사'인 니혼tv의 스탭이 '여기서 취재하지 말라'고 했을때 했어야 했는데, 한편으론 그네들이 무슨 잘못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실황 혹은 극장식 중계로 불리는 와이드쇼의 특성상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럴 땐 그냥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대답한다. 이를테면 이렇게.
"왓스 민? 나는 '제이피뉴스'인데(한국어), 와이 낫? 왓츠 프라블럼?"이렇게 대답하면 대부분이 '아놔, 돌겠네' 표정을 취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 영어가 안되는 것도 있겠지만 영어가 된다 할지라도 포기한다. 왜냐면 내가 외국어를 하는 순간, 자기네들의 룰을 벗어난 존재라는 걸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일본 매스컴은, 사실 잡지 언론을 제외한다면 일정한 룰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 룰을 벗어날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의 룰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기자클럽' 이고, 전파 및 자원 낭비임을 뻔히 알면서도 "타사에서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민방 관계자)이라는 '따라하기' 습성이다.
'기자클럽' 존중해주고 싶지만, 해도 해도 너무해?!일본의 기자클럽은 정말 독특하고 폐쇄적이다. 예전에 나는 일본 최대의 누명사건 의혹을 받고 있는 사형수 하카마타(袴田) 사건을 약 1개월간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기간중 도쿄지방재판소에서 하카마타 변호단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도쿄지방재판소에 취재신청을 하려고 전화를 걸자 재판소가 '기자클럽'에 문의하라면서 번호를 알려준다.
당시 도쿄지방재판소 기자클럽의 '대표간사'는 <산케이신문>이었는데 취재신청 전화를 하자 "누구냐?", "왜 취재하느냐?"등을 묻더니만 "기자회견 당일 와봐라, 다른 회원사들의 의견도 구해야 한다, 한군데라도 반대하면 취재가 어렵다, 또 전원이 상관없다 하더라도 회견장에서의 질문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처음엔 기자가 아니라 법무성의 무슨 직원이 나온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데서도 마찬가지였다. 관청에서 이루어지는 기자회견을 취재하기 위해선 반드시 기자클럽을 통해 취재허가를 받아야 되는 웃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진보 보수가 없다. 독점적 담합구조가 이미 뼈속까지 박혀 있었다.
▲ 지난 5월 후생노동성을 찾았을 때 '기자클럽'의 카르텔을 또다시 경험할 수 있었다 © 박철현 / jpnews | |
최근의 예를 든다면 지난 5월 신종 인플루엔자 취재를 위해 후생노동성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는 대표간사를 통하지 않고 후생노동성을 출입한 경험이 있는 친한 기자를 통해 회견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후생노동성 관료들과 기자들이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었다.
그들은 "잡지쪽이 먼저 빼가면 안되니까, 용어는 이렇게 정리하고 팩트는 일단 이정도 수준에서..."라는 말을 나누었었는데, 관료와 기자가 짝짜꿍이 돼 서로 정보누설에 조심하자고 입을 맞추는 그 광경이 얼마나 신선했는지 모른다.
그때와 이번 사카이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심정은 똑같다. 뭐하러 다들 나와서 아까운 시간과 자원, 그리고 돈을 낭비하냐는 말이다. 그냥 '대표간사'가 책임지고 취재, 촬영해서 그냥 '회원사'들에게 좌악 돌리면 해결될 것을.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일본의 기자클럽 제도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게 아니다. 기득권을 획득하기 위해 고생했던 게 있을테니까 그것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룰은 자기네들 홈그라운드인 관청같은데서나 써야지 이번처럼 자기들은 '담합'해서 자리배치 다 해놓고 나중에 나타난 이에게 '대표간사'라면서 완장질하는 건 일반적인 '저널리즘의 룰'을 어기는 행위가 된다.
일반적인 저널리즘의 룰을 어긴 대표적인 예가 1996년 12월부터 1997년 4월까지 만4개월에 걸쳐 페루에서 발생한, 속칭 '페루 주일대사관 점령사건'이다. 페루대사관을 점령하고 있던 테러리스트 집단 mrta측을 취재하기 위해 <tv아사히>의 히로시마 팀이 자체적으로 돌입을 감행했던 것이 있다. 정체조차 불분명한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실히 알려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tv아사히>의 돌입 및 교섭은 최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이들이 밖으로 다시 나오자 ap, 로이터, bbc 등 세계의 유수 언론사들은 대단한 용기였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런데 이때 '대표 간사'를 맡아보던 다른 일본 방송국 디렉터가 이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큰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도대체 누구 허락받고 들어간 거야! 엉?!"정작 세계적인 매스컴들이 극찬한 이들의 저널리즘적 행위는 같은 일본 매스컴에 비난받았고, 결국 <tv아사히>의 이토 구니오 사장은 사죄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때 이토 사장은 사죄회견을 연 이유로 "인질에게 위협이 갈만한 행위로 경솔했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히로시마 팀은 이미 별도의 루트를 통해 테러리스트들이 인질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돌입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이들의 '대사관 돌격'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인질들은 한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결국 기획 및 과정이 문제였다는 말이 되는데, 경영자는 이런 식의 언급을 함부도 해선 안된다. 왜냐면 '기획'을 건드리는 순간 편집권에 심각한 훼손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일본에서나 통용되는 '로컬 룰'을 17일 사카이 노리코의 보석석방을 취재하러 온 외국 미디어, 이를테면 홍콩 cen tv, 로이터 통신, jpnews 등에 들이대려는 행위는 볼썽 사납다.
▲ 생방송으로 진행된 사카이 노리코 석방의 순간. 속보에 라이브. 모든 민방이 그랬다 © 니혼tv 화면 캡쳐 | |
또 하나는 (방송국에 국한된 것이지만) 어느 채널이고 내보낸 "사카이 노리코 석방의 순간", "사카이 노리코 기자회견" 영상이 같다는 것이다. 보통 일본의 와이드쇼는 어떤 영상을 내보내면서 메인mc가 스튜디오에 초청된 평론가(코멘테이터)들의 견해를 물어보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이번 사카이의 경우 영상이 어디든 다 똑같다.
그런데, jpnews처럼 단 한명이 투입되는 것조차 컨트롤하려는 대표간사 및 그 회원사들은 안 그래도 비좁아 죽겠는데 각각 2, 30여명의 스탭을 동원했다. 와이드쇼 형식의 프로그램을 아예 안가지고 있는 <tv도쿄>를 제외한다면 민방 4개사 만으로 무려 80여명이 되어버린다. 왜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필요하냐면 프로그램이 와이드쇼라서 그렇다.
도대체 와이드쇼가 무엇이길래?와이드쇼(wide show)는 전세계적으로도 일본에만 존재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뉴스정보방송으로, 정치, 사회, 경제, 예능, 스포츠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또 방송시간이 짧아도 최하 1시간이며 긴 것은 3~4시간에 육박하기도 한다. 스튜디오가 중심이 되어 속칭 전문가라는 이들이 나와 준비된 영상을 보면서 다양한 대화를 나눈다. '와이드 쇼'는 긴 시간의 다양한 분야(wide)에 걸쳐 일어난 것들을 보여준다(show)는 의미에서 정착된 말이다.
지금 일본의 지상파 방송국은 nhk와 <tv도쿄>를 제외한 4개 민방이 대표적인 와이드쇼 방송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들을 훑어보면 <니혼tv>는 '슷키리', '오모잇키리don', '정보라이브 미야네야', '리얼타임'을 내보내고 있고, tbs가 '미노몬타의 아사즈밧'와 '히루오비', <후지tv>가 '메자마시 테레비', '도쿠다네', '도모 키니나루', '슈퍼 뉴스', <tv아사히>가 '슈퍼 모닝', '스크램블', 'j채널' 등으로 이것들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 골든타임 전까지 매일 방송된다.
다양한 취재를 통해 어떤 사건을 조명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좋은 일인데, 이렇게 각 방송국이 비슷한 시간대에 배치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청률 경쟁에 돌입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다른 방송국보다 시청자들의 눈을 끌어모이기 위한 취재 및 편집기술이 들어간다. 팩트를 초월해버리는, 마치 드라마나 추리소설을 보는 듯한 스토리의 요소는 물론 '미디어 스크럼'(media scrum)이라 불리는 집요한 과열취재도 다 시청율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다.
혹 독자들 중에서 사카이 노리코가 석방돼 기자회견을 가진 영상을 tv를 통해 보신 분이 있다면 떠올려 보길 바란다. 마치 영화처럼 편집된, 사카이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할 때 다양한 각도에서의 컷들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기 전까지 정면에서 잡은 장면이 고개를 숙이는 도중 오른쪽에서 잡은 컷으로 바뀌고, 다시 고개를 들때 왼쪽컷으로 바뀌는 것 말이다. 뉴스라면 가운데 정중앙 컷만 찍으면 된다.
그런데 와이드쇼이기 때문에 다양한 편집기술을 동원하기 위해선 여러 곳에서 찍은 그림(컷)들이 필요해진다. 사카이가 보석으로 일단 풀려난 후 가진 기자회견장 죠수이(如水)회관, 그 비좁은 곳에 타사를 이기기 위한 좋은 영상을 얻기 위해 다른 매체의 취재를 방해하면서까지 자리를 잡고 보는 것이다.
와이드쇼의 문제는 일찌기 옴진리교의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에서 증명된 바가 있다. 이 사건은 1989년 당시 tbs의 '3시에 만날까요' 디렉터가 옴진리교(현재는 '알레프'로 개명)에서 탈퇴한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영상을 보여줘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족이 살해당하는 계기를 만든 사건이다.
'3시에 만날까요'는 물론 와이드쇼였고, 특종에 눈이 어두워 범죄집단에 정보를 팔아넘긴 이 사건은 와이드쇼라는 방송형태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극한적 형태를 그대로 보여준 사례로 기록된다. 그때 tbs의 '뉴스23'를 진행했던 고(故) 지쿠시 데쓰야는 "tbs는 오늘부로 죽었다"고 선언했고, tbs 역시 와이드쇼 방송을 전면적으로 철폐시켰다.
하지만 어느샌가 슬그머니 와이드쇼는 부활했고, 지금 tbs는 <니혼tv>와 <후지tv>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장에서는 그들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보도행태를 선보이면서 활약중이다.
▲ 바이크나 추적취재는 안되지만 헬기취재는 가능하다? © 박철현 / jpnews | |
물론 현장에서는 정말 열심히 뛰는 기자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시청율에 좌우될 수 밖에 없는 민방들이 일정한 시청율을 획득가능한 와이드쇼를 전면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와이드쇼라는 방송의 본질적 특성이 언제 무슨 사건을 일으킬지 모른다.
사카이 노리코 측이 17일 완간 경찰서 앞에서 보도진들에게 나눠준 사죄기자회견 안내문에 "바이크나 자동차등을 사용해 추적취재하는 것은 사고를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은 행위이며 이런 행위를 한 매체는 기자회견장 출입을 금하겠습니다"고 넣은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불과 10분만에 끝난 사카이 노리코의 사죄기자회견, 질의응답마저 없었던 그 기자회견은 과연 무엇이었던지 현장에 있었던 나는 내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또 와이드쇼는 그런 형태의 일방적인 기자회견에 대해선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 기자회견장에 빅터라는 초대형 음반회사이자 스폰서의 회장이 출석했기 때문이다.
수십명의 인원과 헬기까지 동원해 마치 실황중계하듯 며칠 내내 북적거렸던 사카이 노리코 보석 석방 소동. 결국 기억속에 남아 있는 건 탁자위에 준비된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기자회견장에서 보여준 사카이 노리코의 '눈물연기'가 아니라, 경찰서에서 풀려나던 그 순간 40대팬의 "노리피!"라는 함성에 살짝 보여준 '미소' 뿐이다.
결국 사카이 노리코의 '미디어 잭킹'이 성공한 셈이다. 축하한다. 노리삐.
▲ 이번 와이드 극장은 노리삐의 승리로 끝났다 © jpnew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