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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로봇가전 흑역사 (8회)
 
김명갑

히노는 트렁크에서 HIKARI-RAI의 박스를 하나 꺼냈다. 심호흡을 하고 코지마 수첩, 코지마 코타로 영업부 발령 72일 차에 적힌 명언을 떠 올렸다. ‘고객을 가족처럼.’

 

“그렇다는 이야기는 결국 가족도 고객이란 이야기지.”

 “무슨 소리예요. 선배?”

“지금 나는 누구에게 물건을 팔더라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설사 절친의 어머니라 하더라도.”

“이게 뭐 마약인가요.”

“하하 그렇지. 레지. 네 녀석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구나.”

“야스다에요.”

 

히노는 야스다를 데리고 갈대 밭 위에 성처럼 솟아 있는 목조 건물의 문을 벌컥 열었다. 사사키 후미에는 정원 나무에 물을 주다가 대문을 열고 성큼 들어오는 히노를 발견하곤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사노스케 아니니. 얼마만이야. 오면 온다고 얘기라도 해주지.”

“하하, 사사키 아줌마 오랜만이야. 저녁이라 후배 녀석이랑 밥 얻어 먹으러 왔어.”

“그래. 나도 아직 식사 전이야. 들어가자.”

 

밥상 위에 눈처럼 하얗게 튀겨진 가지 튀김과 따끈한 고등어 구이가 올라왔다. 아직 다섯 시 밖에 되지 않은 이른 저녁이었지만 히노와 야스다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뭔가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데 영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야스다 앞에서 실적을 위해선 과거의 친분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건만 히노는 아직까지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진짜 내가 해도 되는 일인가.

 

그 때 사사키 후미에가 밥술을 뜨다 말고 멍하니 있는 히노에게 말을 걸었다.

 

“도쿄 생활은 어때? 여관 사환보다야 대우는 더 좋을테고. 그래도 역시 고향생각이 가끔 나지 않아?”

“그렇지 뭐, 도쿄는 여기랑 많이 달라. 아 맞다. 저번에 긴자 은행에서 이치로를 봤어. 신기하더라. 그 넓은 도쿄 땅에서 둘이 딱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

 

아들 이야기에 사사키 후미에가 귀를 쫑긋 세웠다. 장성함과 동시에 도쿄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장남은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잘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내려와 약간의 용돈을 챙겨주고 떠나는 둘째 아들은 그렇다 치고, 첫째는 은행 일에 바빠 근 십년 째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몸소 실천이라도 하는지 10년 동안 감감 무소식이었다. 지로 역시 형의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지 후미에가 형 소식을 물을 때마다 늘 고개를 저었다.

 

“건강해?”

“뭐 그렇지. 좀 쪘더라구. 나나 녀석이나 이제 아저씨니까. 녀석이 먼저 알아 차리지 않았으면 아마 그냥 모르고 지나쳤을 거야. 녀석 이름이 워낙 흔해서 명찰을 봐도 알아보기 힘들어.”

 

히노는 지갑에서 사사키 이치로의 명함을 꺼내 사사키 후미에 앞에 내밀었다.

 

「사사키 이치로. 긴자 은행 대리」

 

그녀는 장남의 소식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남의 마지막 모습. 그러니까 가쿠란을 입고 짧은 머리의 까무잡잡한 소년이 이제는 살이 쪄 배가 나오고 얼굴에 살집이 생긴 넉넉한 인상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고 히노는 전한다.

 

“난 한 장 더 있으니까. 이 한장은 아줌마가 가져. 처음부터 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녀는 한 참이나 대리의 명함을 빤히 쳐다 보았다. 눈가가 벌겋게 변했지만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야스다는 히노의 말과 행동이 눈 앞의 여인을 기쁘게 한 건지, 아니면 슬프게 한 건지 도무지 가늠할 수 가 없었다. 분명 그는 영업의 기본은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예전에 담근 매실주 있는데 마실래?”

 “좋지!”

 

히노가 기분 좋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날의 히노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매사에 매너있는 그가 그 날만은 버릇없이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조만간 팬티만 입고 거실을 어슬렁거리다 허락도 없이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를 꺼내 입을 대고 마실지도 몰랐다.

 

야스다는 일을 시작하면 입에 술을 한 방울도 대지 않았다. 선배인 히노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었다. 외근 중 반주를 곁들이는 것 쯤이야 영업 세계에서는 다반사로 있는 일이었지만, 히노는 늘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작은 포차나 이자까야에서 야스다와 조촐한 술자리를 즐겼다. 야스다도 일은 일대로 열심히 하고, 술자리에선 친구처럼 허물없는 그의 깔끔한 성격이 좋았다. 그건 히노가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그의 사수, 마츠다 타케우치의 영업 방식이기도 했다. ‘업무 중 술에 취해 있는 사람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 없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고, 그 말은 코지마 수첩 마츠다 다케우치 편에도 그대로 실려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 얼굴이 불콰해진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사키 후미에는 히노의 간드러지는 음율에 맞춰 박수를 쳤다. 노래 교실을 찾은 전형적인 초보 수강생처럼 엉터리 엇박자 박수였지만 그러나 분위기는 더 없이 좋았다.

 

‘역시, 친한 사람에게는 하지 않을 모양이군.’

 

야스다는 긴장이 풀려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아까 전부터 속이 타서 얼른 털어 넣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던 차였다. 고객 앞에 앉아 있는 거야 일적인 일이니까 얼마든지 어색한 분위기를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히노의 사적인 지인 방문이었고, 야스다는 그녀와 전혀 안면이 없는 낯선 손님이 아닌가. 이런 종류의 불편함은 사양하고 싶었다.

 

“어이, 레지양반. 너는 운전해야지.”

“자고 가는 게 아니었어요?”

 

야스다가 막 술잔에 입을 대려고 하자 히노가 그를 제지했다.

 

“우리 아직 일하는 중이야. 저녁에는 본가에도 한번 가봐야 하고.”

“먼저 들린 게 아니니?”

“응, 떠나기 전에 들리려고. 내가 첫날부터 복잡스럽게 휘젓고 다니면 괜히 치에도 들떠서 하루 종일 실수를 하게 될 거야. 시코가 바쁜 거 보면 나도 마음 편히 내 일을 할 수도 없고. 쟁반을 들고 1,2층을 바쁘게 뛰어다니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 같아. 그래서 분명 하루 종일 여관에만 붙잡혀 있게 되겠지.”

 

그 뒤에 히노가 작게 “그것도 나쁘지 않는데”라고 덧붙이는 말을 야스다는 들어 버렸다.

 

“치에랑 준코가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사사키 후미에는 잠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술에 못이긴 듯 고개를 숙인 히노에게 말했다.

 

“너, 뭔가 고민이 있는 거지? 나에게 뭔가 팔려고 가져 온 게 아니야? 저거. 너 네 회사 물건 같은데.”

그녀의 손 끝이 가르킨 곳에는 신발장 위에 놓인 HIKARI-RAI의 하얀 박스가 있었다.

 

“비싸 저거.”

히노는 장난 끼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야? 아줌마 혼자 살아서 돈 많아. 사노스케가 출세한 기념으로 사 줄게.”

“로봇 청소기야. 현금으로 하면 16만 엔까지 해 줄께. 가족 할인가야. 원래는 20만엔 넘어.”

 

생각보다 높은 가격에 사사키 후미에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경쾌하게 말했다.

 

“연금을 부은 적금을 해약하면 살 수 있어.”

그 말에 히노는 배가 터져라고 웃어 댔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야스다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아니, 무슨 여윳돈이 이십 만엔도 없어서 적금을 해약해? 에이 안 팔아, 안 팔아. 내가 아무리 나쁜 놈이어도 그 돈에 손을 댈 수는 없지.”

 

손사래를 치는 히노를 보고 사사키 후미에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달라 붙었다.

 

“그러니까. 나를 설득시켜봐. 도쿄에서 이름난 회사에 들어간 영업사원이라며. 그 돈은 내 연금이랑 지로가 준 용돈을 조금씩 모은 거야. 아마 만기 때는 내 노후 자금으로 조금씩 쓰이다가 결국 장례식 비용으로 끝나겠지. 그것보다 가치 있으면 내가 저걸 살게. 어때 히노, 덤벼봐!”

 

이런 이야기까지 들은 마당에 히노는 더 이상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품에서 지갑을 꺼내 자신의 명함을 사사키 후미에에게 두 손으로 건냈다. 받는 그녀 역시 얼떨결에 두 손으로 받았다.

 

히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 거리며 거실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억지로 술을 깨려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히노가 사사키 후미에에게 말을 걸었다.

 

“고객님.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죠?”

 

움직일 기운도 없는지 그는 거실 벽에 기대어 졸린 눈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우연이겠지만, 야스다가 보기엔 그 모습이 소설 속에 묘사된 탐정 킨다이치 코스케처럼 느껴졌다. 물론 키는 히노가 훨씬 컸지만.

 

“62살입니다.”

“사진을 보니 장성한 자식이 두 분 계시군요. 한분은 여기서 레이란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도쿄 유명 은행에서 대리로 일하고 계시네요. 동생 분은 오사카에서 두부 요리점을 하고 있구요. ”

“네. 맞아요.”

“그리고...”

 

히노의 시선이 거실 구석에 놓인 사사키 아키라의 영정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남편까지 들먹일 수는 없었다.

 

“몇 년간 쭈욱 혼자 지내시는 군요.”

“....”

 

이번엔 그녀도 대답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가끔 둘째가 내려오긴 했지만, 워낙 붙임성이 없는 성격이라 ‘자식 된 도리를 하고 간다’는 식의 생색내기가 전부였다. 긴 운전 끝에 녹초가 된 지로는 저녁을 먹고 씻은 뒤에는 어렸을 적 자신이 사용하던 침실로 들어가 죽은 듯이 잠을 잤고, 다음날 에는 매년 그랬듯이 준비해 온 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고는 “잘 지내”라는 말 한 마디와 함께 점심도 먹지 않고 휑하니 떠나 가버리곤 했다. 후미에는 가게가 바쁘니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나마 일 년에 한번씩 꼬박꼬박 찾아와 얼마간의 용돈이라도 내 놓고 가는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기특한가. 둘째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오히려 고마웠다.

 

“이 집에 몇 년간 사셨죠?”

 “37년.”

 

그녀 나이 스물 둘에 사사키 아키라를 만나 스물 다섯에 이 집을 마련했다. 주변에 별다른 인가도 없는 후미진 곳이어서 한동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이 집에서 이치로를 낳고 지로를 낳았다. 남편은 40대에 세상을 떠났고, 그녀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 아이들은 이 집을 싫어했다. 학교가 멀어서 다니기 불편했고, 개천이 바로 옆이라 거실에서 자다 일어나면 입에서 죽은 날 벌래가 한 마리 씩 나올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사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간 이층 집 청소는 힘드셨을 테죠?”

“덕분에 관절염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고객님께 정말 딱인 상품이 하나 있네요. HIKARI-RAI. 로봇 청소기죠.”

 

야스다는 술에 취한 희노의 과장된 요식행위가 한편의 연극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미에는 처음부터 히노에게 로봇 청소기를 사 줄 생각이었다. 히노도 그것을 안다. 그걸 알면서 일부러 그런 민망함을 덮어버리기 위해 평소보다 과하게 영업사원 티를 내고 있는 것 뿐이다.

 

“모델 명이야 이 녀석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히노가 갑자기 박스에서 로봇 청소기를 꺼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스에서 제품을 꺼냈다고 반드시 사란 법은 없다. 대게 카탈로그로 먼저 설명을 하고, 그 다음 고객이 사겠다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 그 후에야 박스에서 로봇 청소기를 꺼내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히노는 분명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로봇 청소기에 전원을 넣자 센서에 불이 들어오고 전원이 붉게 들어왔다.

 

“하루 정도는 이 녀석을 돌봐 줄 필요가 있습니다. 집 구석구석 길들일 필요가 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집 밖으로도 청소를 하러 나갑니다만... 한번 집의 구조를 기억하면 설사 문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밖으로 나가질 않습니다. 그게 이번 신제품의 특징이죠. 딱 이집만 정확히 인지해서 청소하는 로봇 청소기, 신기하지 않나요? 그냥 로봇이 아니라 동거인, 아니 동거 로봇인 거죠.”

 

“과연!”

“더군다나 이번 모델부터는 로봇 청소기는 주인이 부르는 시동어에 맞춰 움직입니다. 매뉴얼에는 시동어니 뭐니 거창하게 써 있는데, 실은 그냥 이름을 붙여 주는 거에요. 혹시 생각해 두신 이름이 있나요?”

 

“포... 포치? 시로?”

“너무 흔하지 않나요?”

 

흔한 개 이름이 나오자 히노는 맥이 빠져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HIKARI-RAI는 시로와는 거리가 먼, 펄이 들어간 메탈블루였다. 히노는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했다. 그리고 갑자기 충혈된 눈을 부릅 뜨며 외쳤다.

 

“가만 보자. 사부로. 그래 사부로(三郎)는 어떨까요.”

 

후미에는 머리 한 가운데 정을 맞는 기분이었다. 사사키 아키라는 전쟁 고아라 늘 가족을 많이 낳고 싶어 했다. 장남의 이름을 이치로(一郎)로 짓고 그 다음을 지로(二郎)로 지은 것도 대가족을 낳은 뒤에 이름을 헛갈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입버릇처럼 사사키 고로(五郎)가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건 오늘 밤 잠자리를 갖자는 둘만의 은어임과 동시에 아이 다섯을 낳자는, 사사키 아키라가 생각하는 행복한 가족상이었다. 또한 그를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은 마을 제일의 미인이었던 후미에를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어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 산다고 놀려대곤 했다.

 

“그런 이름은...”이라 중얼거리는 그녀 앞으로 붉은 색 리셋버튼에 불이 들어온 HIKARI-RAI가 다가갔다. 야스다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시동어가 정해지면 본사에 들어가서 분해하지 않은 이상 되돌릴 방법이 없다.

 

“말해 보세요. 매일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거실로 뛰쳐나와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 줄 겁니다. 양말을 벗어 늘 아무데나 두는 게으름뱅이 남편이나, 집안 일에 무신경한 아들들이랑은 이 녀석은 확실히 다를 테니 두고 보세요. 자 이름을 불러 보세요. 앞으로 매일 부를 이름을.”

 

“사부로! 사부로!”

 

그녀는 울컥거리는 목소리를 겨우 달래며 그 이름을 불렀다. HIKARI-RAI, 아니 사부로(三郎)의 붉은 불이 초록 불로 바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배. 가끔 보면 선배가 혹시 악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존해 소작로를 달리던 야스다가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뭐가?”

“집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던 거죠?”

 

조수석 깊이 파묻힌 히노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네. 어느 정도는요.”

“내가 한 일이 옳은 일인지, 그렇지 않은 지는 나중에야 평가 받게 될 거야. 지금 당장은 홀로 사는 미부가 청소를 대신해 줄 로봇 청소기가 한 대 생겨서 좋은 거지. 나는 실적을 하나 올려서 좋고. 이 정도면 나름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히노의 입가가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나는 말이야. 이 일이 마음에 들어. 성공하고 싶어. 일 핑계대고 사람 만나는 게 좋아.”

“저는요.. 물건 안 산다고 하는 분들이 이제는 제일 무서워요. 거절당할 때마다 조금 씩 내상을 입는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쌓여서 나중에 꿈에까지 나오거든요.”

“그래. 그거 무섭지.”

 

히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래도 있잖아. 야스다, 처음 한번이라도 물건을 제대로 팔아보면 말이야. 그전에 거절 당했던 게 어떤 기분인지 모를 정도로 짜릿해. 난공불락 같았던 사람을 공략하면 그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쾌감을 느끼게 되지. 예전에 오사카에서 잡화점을 하는 친구한테 여섯 시간 설득해서 SOJI-X를 팔았을 때는 정말로 행복해서 죽을 것만 같았어. 오르가즘 같은 게 느껴졌다니까. 왜? 거짓말 같아? 사람들이 왜 오사카 상인, 오사카 상인 하는지를 알겠더라구. 그 땐 나도 실적이 없어서 죽기 살기로 달라 붙은 거였지만.”

 

아직 제대로 무엇을 팔아 본적이 없는 야스다는 히노의 말이 먼 미래의 일처럼 들렸다.

 

“그리고 말이야. 오늘 내가 한 일은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네?”

“앞에 사거리에서 우회전 해. 이십분 정도 직진하면 도착 할 거야.”

“어디요?”

“시코료칸.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 거기도 아직 한 대 정돈 팔 수 있잖아? 지금은 불황이고 회사가 어려우니까 모두들 이해 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히노는 눈을 감았다. 그는 가족도 팔아넘기는 악덕 사채업자처럼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왠지 힘이 없었다. 히노가 이내 골아 떨어지고, 어둠 속에서 사거리를 만나기까지 기약 없는 직진을 하는 동안, 야스다는 잠시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히노에게서 자신의 미래 일부를 엿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긴 상념을 뚫고 공구박스를 든 미나가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야스다는 저렇게 큰 공구박스를 언제 차에 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흰 장갑을 손에 끼우며 ER에 들어온 숙련의처럼 말했다.

 

“야스다 선배. 저 좀 보조해 주세요.” 

야스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 다음 주 토요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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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7/03 [09:37]  최종편집: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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