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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로봇가전 흑역사 (9회)
 
김명갑

미나는 사부로를 뒤집어 잘 익은 대게의 등껍질을 열어젖히는 것처럼 능숙하게 동체와 밑판을 분리했다. 드러난 기판은 단순한 동체에 비하면 꽤나 복잡해 보였다.

 

“나는 뭘 하면 되는 거지?”

야스다가 셔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제가 나사랑 부품을 분해하면 잘 가지고 있으셔야 해요.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작은 접시라도 빌려서 담아 두시면 더 좋구요.”

의외로 별거 아닌 일에 야스다는 약간 뻘쭘해졌다. 미나가 도와달라고 했을 때 그는 땜질이라도 하는 줄 알고 조금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별거 아니라고 실망하셨죠? 그래도 중요해요. 망가진 게 아니면 작은 나사하나까지 최대한 그대로 둘 생각이니까요.”

 

사사키 후미에는 야스다가 부탁도 하기 전에 이미 부엌으로 달려가 접시를 대 여섯 개 들고 왔다. 그 중에는 와인 안주를 올려 장식하면 예쁠 것 같은 꽃 무늬 접시도 있었고, 재떨이로 쓰면 어울릴 것 같은 투박한 과자 그릇도 있었다. 정신이 없어 이것저것 들고 온 모양이었다. 야스다는 그나마 평범해 보이는 앞 접시에 나사를 하나씩 세어 담았다. 손가락 마디 만 한 게 열 개. 그 반 만한 게 열 세 개였다. 미나는 그 사이 공구 상자에서 안경과 인두를 꺼냈다. 안경을 낀 미나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몸에 안 좋으니까 조금 떨어져 계세요.”

미나는 인두를 콘센트에 연결해 망가진 센서를 떼어 냈다. 매콤한 납 냄새 때문에 코가 매웠지만 야스다는 참아야 했다. 바로 코 앞에서 그걸 들이 마시는 사람도 있으니까.

 

수리는 그로부터 삼십분 훌쩍 지난 시간에야 끝이 났다. 미나의 앞머리는 땀에 푹 젖어 이마에 늘러 붙어 있었고 턱 끝과 목덜미에도 이슬 같은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야스다는 종이백에서 티슈를 꺼내 미나에게 내밀었다.

 

“수고했어. 나는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분명 내가 너보다 선밴데 부끄럽다야.”

“저는 이게 전문이니까요. 영업사원 중에 이걸 할 줄 아는 사람이 이상한 거에요.”

 

미나는 티슈로 얼굴과 목덜미의 땀을 찍어 내다가 강아지같은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후미에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자신이 아직 사부로를 그녀에게 돌려주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전원을 켜고 그녀의 앞에 사부로를 내밀었다.

 

“끝났으니까 깨워 보세요. 직접”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가 싶다가 한자 한자 또박또박 그 이름을 불렀다.

 

“사.부.로?”

시동어가 확인되자 미나는 바닥에 사부로를 내려 놓았다. 사부로는 사사키 후미에와 야스다 사이를 가로 질러 벽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그리고 벽으로부터 불과 몇 미리를 눈 앞에 두고 우아하게 몸을 돌려 그 때부터 바닥의 먼지를 빨아 들이기 시작했다. 미나에게는 그게 당연한 결과이고 예상했던 것이지만 사사키 후미에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후미에는 항상 많은 것을 체념하고 포기하며 살아왔다. 자식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보채지 않고 몸 한 구석에 돌덩이 같은 게 생겨도 덤덤히 받아들였다. 화내고 집착해봐야 안 되는 일은 안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부로가 망가진 날도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던 날이 불현듯 찾아 온 것처럼 서글픔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녀는 혼자가 되는 것에 익숙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자신은 외로움을 많이 타서 아이를 많이 가지고 싶다는 사사키 아키라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성을 사사키로 바꿨다. 그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녀 역시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집에 얹혀 눈칫밥으로 연명하던 차였다. 그녀보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던 아키라는 한 번도 가져 본적 없는 친 아버지나 오라비처럼 자상하게 대해주었다.

 

떠올려보면 한 겨울 코타츠에 마주 앉아 내피하나 없이 말끔히 깐 귤을 그녀의 입에 넣어주던 별 볼일 없는 추억도 있었다. 그 옆에는 두 아이들이 서로 자기가 먹겠다고 입을 벌리고 있었으나, 귤은 기어이 도리질 하던 그녀의 입으로 들어갔다. 이치로는 웃었고, 지로는 울었다.

 

볼은 냉골에 붉게 텄고 코타츠 아래는 한 없이 따뜻해 졸음이 슬슬 왔다. 귤은 한 없이 달고 셨다. 그와 있으면 정말로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이 마흔에 아키라가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도 장성해 도시로 떠나자 결국 다시 혼자가 되어야 했다. 외롭지 않게 해주겠다던 아키라의 약속은 거짓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의 의지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운명을, 순리를 이길 수 없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던 차에 히노는 사부로를 들고 자신을 찾아왔다. 녀석이 로봇 청소기건 강아지건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빈집이 아니란 것이 중요했고, 이 집에서 부를 이름이 남아 있다는 게 중요했다.

 

2년 전 정월 여드레, 후쿠오카에는 눈이 왔었다. 그때 후미에는 두꺼운 한텐을 입고 거실에 앉아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소설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회색 하늘 아래로 알 굵은 눈발이 겨울 갈대 위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후쿠오카에서 눈을 보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라 그녀는 이번이 태어나서 여덟 번, 어쩌면 아홉 번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두 자리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눈을 본 것이 지로가 오사카로 떠나는 날이었다. 벌써 십년도 전의 이야기.

 

마침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한 빙점(氷点)을 읽고 있지 않았다면 후미에는 그저 테이블 위에 턱을 바치고 밖을 내다보는 것에 만족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오랜만에 외출하기로 마음 먹었다. 두꺼운 외투를 꺼내 걸치고, 챙이 넓은 외출용 모자와 남편이 결혼 기념일에 선물한 머플러를 챙겼다. 그녀는 눈이 온다고 마냥 신기해할 만큼 젊지 않았다.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려 집 밖으로 나가 직접 눈을 맞고 싶었다. 일년 내내 따뜻한 후쿠오카에서 눈은 귀찮으면서도 반가운 존재. 저 굵은 눈발도 쌓이지 않고 땅에 닿자마자 녹을 것이다.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나 더 이곳에서 눈을 맞아 볼 수 있을 까. 아마 길면 두 세 번,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현관문 앞에 앉아 그녀는 이십년 째 신고 있는 굽이 높은 외출용 구두와 정원 일에 쓰는 흙투성이 고무 장화 사이에서 고민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눈발이 날리는 날에 굽이 있는 신발은 조금 위험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고무 장화는 영 기분이 나지 않으니.

 

‘혹시 다른 신발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신발장을 열어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던 그녀는 미츠코시(三越)백화점 봉투에 담긴 낯익은 신발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붉은색 몸체에 꽃 모양으로 비즈가 박힌 화려한 플랫폼(platform)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그녀가 아키라에게 프로포즈 반지 대신 받은 40년 전의 물건이었다. 한 때는 도쿄 멋쟁이들의 세련됨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컴컴한 박스 안에서도 색이 조금 바래 버려 헌 것 같은 새것이 되어 버렸다. 아끼다 아껴 한 번도 신어본적이 없는 구두에 사사키 후미에는 발을 넣어 보았다. 양말을 벗고 신으니 딱 맞았다. 길들여지지 않은 구두가 아킬레스를 파고 들었다. 조심스럽게 구두를 만져본 그녀는 이 구두와 십년 만에 내린 눈을 함께 볼 이가 없다는 것이 서글퍼졌다. 아이들이 있었다면 자랑이라도 했을 텐데. 그 때 로봇 사부로가 생각났다.

 

“사부로!”

로봇 청소기는 그 부름에 쌩하니 달려와 그녀 앞에 진공청소기 모드로 멈춰 섰다. 그는 마루 왁싱, 바닥 물청소 같은 걸 지정해주면 이제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이 큰집을 빨빨 거리며 휘젓고 다닐 것이다. 사부로는 센서를 반짝이며 그녀가 입력할 추가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아무런 추가 주문이 없으면 진공청소기 모드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산책 가자.”

후미에는 사부로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자동 충전된 전원을 끄지 않은 채로. 사부로는 메뉴에는 없는 그녀의 품에서 잠시 바퀴를 굴리며 발버둥을 쳤다.

 

“아이쿠, 간지러워 사부로. 가만히 있어!”

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구두가 빛 바랜 것처럼 색깔들이 빠져 조금은 썰렁해 보였다. 겨울 갈대밭이며 그 위에 조용히 덥히기 시작한 눈발도. 후미에는 사부로를 안고 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쓸쓸한 날씨야. 그렇지? 사부로? 후쿠오카는 눈이 잘 안와. 너도 잘 봐둬.”

집밖으로 나와 좌표를 잃어버린 사부로는 그녀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소리를 내며 바퀴를 굴렸다. 후미에는 그 소리가 왠지 자신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거 같아 계속 불렀다.

 

“사부로!”

-위잉

“사부로~”

-위잉

 

둘은 한 참을 걸었다. 조금 만 더 나가면 마을 공용도로와 만날 참이었다. 그 사이 어느 새 눈은 그쳐 있었고, 등 뒤 풍경도 언제 눈이 왔나 싶을 만큼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사부로.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후미에는 센서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품안의 녀석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그때 사부로의 바퀴가 소매를 밀어내며 크게 앞으로 움직였다. 품에 안고 있던 녀석은 그대로 그녀의 팔뚝을 타고 공중을 크게 날았다. 그리고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한 순간 날카롭게 울던 바람소리가 멈춰 섰고, 그 정적이 당황한 그녀를 깨웠다. '또 혼자가 되겠네'라고.

 

그 후로 사부로는 조금 씩 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몇 달 전부터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벽에 머리를 박았다. 후미에는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사부로를 들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집에서도 웬만하면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사부로가 있기 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썼지만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계속 - 내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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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7/09 [01:17]  최종편집: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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