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에 경제 보복에 나섰다. 그 대상은 한국 경제의 주력분야인 반도체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소재 3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한국을 수출관리 우대국 명단인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에 대한 사실상의 보복조치다.
일본 기업으로하여금 강제징용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일본정부는 5월,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제삼국으로 구성된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고 대신 이달 19일 한일기업이 함께 자금을 모아 배상금을 지불하자는 안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일본 정부는 중재위원회 설치를 재차 요구했고, G20정상회의 때까지 답변을 요구했다. 결국 답변이 없자 일본 정부는 이전부터 엄포를 놓았던 경제보복 조치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조치란, TV와 스마트폰 OLED 화면에 사용되는 플루오린(불화) 폴리이미드와 반도체 제조과정에 필수적인 에칭 가스(고순도 불화수소), 리지스트 등 3품목의 수출 규제를 7월 4일부터 강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세 품목은 한국에 수출하는 데 있어 절차 간략화 등의 우대조치가 취해져왔다. 일본 정부는 이를 7월 4일부터 계약마다의 수출허가로 전환하기로 했다. 허가 신청 심사에는 보통 90일 가량이 소요된다.
폴리이미드나 리지스트는 세계 총 생산량의 약 90%, 에칭 가스는 약 70%를 일본이 점유하고 있다. 대량으로 필요할 경우, 일본기업외에는 대안이 마땅하지 않다. 이 때문에 이 세 품목을 수출 규제 품목으로 지정한 것이다.
더불어 일본 정부는 최첨단 소재 수출에 대한 수출허가 신청이 면제되는 '화이트 리스트'에서도 한국을 제외시키기로 했다. 7월 1일부터 약 1개월간 민간으로부터 의견을 수집한 뒤 8월 1일 무렵부터 운영을 시작한다.
제외된 이후에는 개별 출하 때마다 일본정부에 수출허가를 취득해야 한다. 화이트 리스트는 안보상 일본이 우호국으로 인정하는 미국, 영국 등 총 27개국이며, 한국은 2004년에 지정됐다.
이 규제는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면 '더이상 우리는 한국의 편의를 봐주지 않는다'이다. 절차상에서 편의를 봐주었던 조치들을 하나씩 없애겠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경제의 '급소'를 건드려 간담을 서늘하게 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의도다.
일본 아베 정권이 노린 '1석 3조'
이번 조치를 살펴보면, 일본 아베 정권에 있어서 세 가지 의도가 엿보인다.
첫번째는 국내여론용이다. 일본 아베 정권은 이달 2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 지지율에서 여타 정당을 압도하고 있어 연립여당인 공명당을 포함해 과반수 이상의 의석 획득이 확실시되고 있으나, 이들에게는 더 큰 목표가 있다. 바로 '개헌'이다. 개헌에는 중참 양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자민당은 이번 선거를 통해 단독 과반수 의석 이상을 노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대한 여론이 그 어느때보다 나쁘다. 위안부 재단이 해체되고 합의가 사실상 파기되고부터는 일본의 진보지식인이나 언론인조차 한국을 비난하고 있다. 일본 초계기를 향한 사격통제레이더 조준 논란은 이러한 비난 여론에 더욱 불을 지폈다.
이제 일반 일본 국민들은 한국이 관련되면 '한국을 좋아하지 않는데', '한국을 좋아하진 않지만'이라는 전제조건을 습관처럼 붙인다. 이처럼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 정도다.
아베 정권은 보수파답게 '강한 일본'을 내세운다. 지지층도 한국에 대한 강경대응을 원한다. 요새들어서는 대다수 일본 국민 또한 이에 동조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강경 조치가 여러 언론을 통해 선거용으로 분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명 '표심'을 잡을 수 있다.
더구나 근래 들어 아베 정권에 악재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최근 있었던 '노후자금 2천만 엔 부족 보고서' 파문은 6월 일본 정국을 내내 흔들었다.
금융청은 노인들의 노후자금이 노령연금을 받아도 평생 동안 2천만 엔 부족하다는 보고서를 만들어 아소 다로 재무상에 제출했으나, 재무상은 "부적절한 보고서"라며 받기를 거부했다. 국민들의 불필요한 불안을 자극한다는 이유에서다. 보고서 내용을 보고 대책을 세우려하기는 커녕, 왜 보고서를 만들었냐고 불만을 터트리는 재무상의 모습에 일본 국민의 불만이 폭발했다.
선거를 위해서도, 그리고 국내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어떤 강경한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면서도 일본 기업의 피해를 원치 않았다. 그 타협점이 바로 이번 조치다.
1. 화이트 리스트 배제
2. 반도체 소재 주요 3품목의 수출간소화 우대 중단
분명 계약마다 심사를 받으면 심사에 떨어질 가능성이 생긴다. 사실상의 금수조치처럼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다. 즉, 금수 조치와 같은 인상을 주어 국내 강경론자들에게 호감을 사고, 그러면서 일본 기업에 피해를 주지 않으며 WTO에 제소당해도 빠져나갈 수 있는, 더불어 한국에 경고성 엄포를 놓는, 일본정부로서는 '1석 3조'의 묘책이었던 것이다.
일본기업에 피해가 가길 원치않는 일본 정부로서는 실제 수출길을 막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즉, 2004년도 이전의 불편함으로 돌아갈 뿐 수출은 계속 문제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번 조치는 한국경제에 대한 직접 타격에 있기보다는 엄포에 그 방점이 찍혀있다.
사실상의 금수조치로 연결되면 이는 빼도 박도 못하고 WTO 제소와 패소로 이어진다. 닛케이 비지니스 온라인판에 오늘(3일) 올라온 호소카와 마사히코 전 경제산업성 무역관리과장(현 주부대학 특임교수)의 글이 인상적이다.
"(일본정부는) 기본적으로 수출을 허가하지 않을 방침이며 사실상의 금수조치라는 말이 돈다. 그러나 법치국가에 있어서 이러한 자의적인 운용은 있을 수 없다. 명백히 틀렸다. 만약 그러한 운용을 한다면 나라가 수출자로부터 고소 당해 패하는 건 명백하다. 한국에 대한 대항조치를 강하게 요구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운용을 기대하는 기분은 이해하지만 법제도 차원에서도 무리가 있다"
"어디까지나 이번 조치는 절차를 '포괄적 허가에서 개별적 허가로' 돌리는 것, 즉 우대조치 이전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대항조치로 미적지근하다고 느껴진다면, 미국처럼 수출을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려면 의원 입법을 할 수밖에 없다"
"사실 대항(보복)조치라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 그러한 우려는 온당치 않다"
이번 우대조치 중단이 금수조치로 이어지면 재판에 회부돼 패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소재를 수입하는 삼성 등 한국기업이 타격을 입으면 전세계 반도체 공급망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 일본기업에게도 타격이 있다. 아베정권으로서도 이는 좋은 방안이 아니다.
NH 투자증권의 분석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3일자 연합뉴스에 따르면, NH투자증권은 "일본의 규제대상 리지스트 관련세부품목을 확인한 결과, 일본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조치는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 영향을 주지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일본의 이번 규제는 삼성 등이 아직 도입하지 않은 극자외선(EUV) 공정에 사용되는 리지스트에 한정됐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밖의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에칭가스 등에 대한 영향도 한정적이라고 한다. 만약 일본이 한국 경제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을 목표로 했다면, 한국업체가 주로 취급하는 리지스트나 소재를 가장 먼저 포함시켰어야 한다.
일본 정부가 규제를 발표한 뒤 한일언론이 대서특필했고 여론의 반응도 대단했다. 일본 정부가 한일관계 악화가 이번조치로 이어졌다고 시인하면서 사실상의 보복조치, 금수조치로 여겨졌다. 여기까지는 일본 정부의 각본대로다.
만약 여기서 한국 정부가 움찔하여 꼬리를 내렸다면 아베 정권으로서는 가장 행복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오산이 있었다. 한국 업체들이 일본을 리스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오산, '일본'을 리스크로 인식하기 시작한 한국 기업들
한국 정부는 이번 조치와 관련해 강경하게 대응해나가기로 결정했다. 산업부는 WTO제소뿐만 아니라 반도체 소재 수입선 다변화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사실상의 금수조치로 이어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한 대비를 해야하는 만큼 정부로서는 온당한 조치였다.
더불어 당정청은 3일, 대책으로서 반도체 소재 및 부품, 장비 개발에 매년 1조원 투자를 추진하기로 했다. 한국 기업들도 소재 국산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기술격차가 상당한 만큼, 시일이 걸린다는 것이 업계 반응이지만. 문제를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데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소재 조달을 일본에 의존하는 데에 리스크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중국 사드 때와 같이 이번에는 일본 의존으로부터의 탈피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이번 조처로 단기적으로는 국내 여론몰이에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기업이 장시간 쌓아온 한국 기업과의 신뢰를 단번에 허물어뜨렸다. 한국기업은 일본 기업과 거래를 지속하겠지만 리스크를 없애기 위해 분주할 것이고 결국에는 일본 기업과의 거래를 줄일 것이다. 그 때도 여론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G20에서 자유무역을 주장하던 의장국 일본이 끝나자마자 안색을 바꿔 수출규제를 선언하며 세계적으로 '위선자'(1일자 미국 파이낸셜 타임즈)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덤이다.
이쯤되면 누가 득인지 실인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일본 언론도 경제지와 진보 매체를 중심으로 이번 조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아사히, 교토, 니혼케이자이 신문, 지지통신 등 유력 언론매체들이 2, 3일자 사설에서 이번 조치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제와서 물러서기도 어렵다. 아베 총리와 세코 경제산업상도 이 조치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과연 일본이 이번 조치를 후회하게 될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