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평소 수려한 글솜씨와는 별개로 한일 양국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테츠를 제이피뉴스에서 잠시 빌렸다. 형태는 마음가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쓰는 것. 앞으로 많은 독자 여러분의 열독을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여기 한국인들은 잘 살고 있다.
집에서는 아사히 신문을, 회사에서는 니혼게이자이 신문을 받아봐서 그런지 모르겠다. 아베 신조 총리가 7월 4일부터 행동에 옮긴,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에 따른 3대 소재(에칭가스,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수출규제가 그렇게 큰 뉴스가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오히려 이들 신문에선 아베 총리의 이러한 조치를 비판하는 기사 및 논설이 더 많다. 물론 산케이신문을 구독했다면 전혀 달라지겠지만, 요즘 누가 산케이 같은 걸 보겠는가. 젊은 사람들은 종이신문 안 본 지 오래 됐고, 연배가 지긋한 이들은 산케이 볼 바엔 요미우리 신문을 읽는다.
그러다 보니 오후 뉴스 버라이어티 방송의 대표격인 정보라이브 미야네야(ミヤネ屋)가 이번 일본정부의 조치에 대한 한국사회의 불매운동, 반일 움직임을 다룰 때 일본인 아내가 “와! 미야네야에 진출했어. 그 뉴스”라고 일부러 화면을 캡쳐해서 라인메시지로 보내 올 정도였다.
일본 현지에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다보면 싫든 좋든 한국의 일본제품 불매운동 등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과거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방문이 가져온 파국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이후 극우세력의 헤이트스피치 집회가, 코리아타운으로 불리는 오쿠보 거리를 휩쓸었고, 동일본대지진마저 겹쳐 수많은 한국인들이 피해를 입었었기 때문이다. 시위가 주로 열리던 주말에는 일본인들의 발길이 뚝 끊겼고, 빈 점포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 헤이트스피치를 금지시킨 것도, 그리고 다시 오쿠보를 살린 것도 일본인들이었다. 차별방지 법안을 만들었고, 이른바 치즈핫도그와 트와이스, BTS로 대표되는 제3의 한류를 스스럼없이 즐기고 향유하는 이들도 보통의 일본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심경이었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본제 불매운동에 대해, 일본정부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그렇게라도 하는 게 좋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일본에서 터를 잡고 사는 사람이다. 혹시 이 불매운동이 커져서, 과거 이명박 씨의 독도방문이 가져온 후폭풍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안될 수가 없다.
게다가 일본언론은 일본정부의 조치를 비판하는 논조가 확실히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이러한 불매운동이 일본사회에 크게 알려질 경우 보통의 일본인들도 ‘배신감’에 한국제품 불매운동에 나서지나 않을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인테리어 공무점을 운영하고, 하필이면 지금 오쿠보에 공사현장이 있어 매일같이 그 거리를 방문하는데,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우리 현장에서 일하는 일본인들 몇몇에게 물어봐도 “그게 뭐 오래 가겠어요?” 혹은 “아베니까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긴 아베 총리에 대한 불신감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인터넷에선 하나의 밈이긴 하다. 일본사회에 좋지 않은 뭔가가 발생하면 일본의 각종 커뮤니티에는 “톱이 아베니까 어쩔 수 없다”라는 자조가 반드시 나온다.
마치 십수년전 ‘이 모든 게 노무현 전 대통령 탓이다’라며 노 대통령을 욕하는 것이 국민스포츠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혹자는 아베를 그렇게 싫어하는데 왜 정권교체는 안되는가라고 의문을 표하기도 하는데, 그건 일본 정당의 지형도만 보면 금방 알 것이다. 야당이 7개로 나뉘어져 있는 의원내각제 국가다. 정권교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논다.
일본사회 분위기를 보면 아베 총리를 전폭적으로 옹호하기가 힘들 수 밖에 없다. 아베 총리는 숱한 스캔들로 2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높은 고용율과 낮은 실업율로 어떻게든 버텨왔는데 이것도 통계상의 부정이 발각되면서 말짱 도루묵이 됐다.
심심하면 내각 장관들의 경솔한 발언이 터져 나온다. 아베정권을 뒷받침해왔던 건설버블도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다. 오쿠숀으로 불리는 1억엔이상 가는 고급맨션이 2018년부터 안 팔리고 있다는 데이터는 차고 넘친다. 대형 디벨로퍼들은 투자금 회수를 위해 고급맨션의 땡처리도 불사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베내각은 도쿄올림픽을 항상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도쿄올림픽 이후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숱한 정치평론가들이 과거의 일본 민주당이 지금 그 덩치 그대로 존재한다면 무조건 정권교체, 아니 적어도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는 압승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베 총리가 이번 수출규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치적, 사법적인 것을 이유로 들어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겠다는 발상, 게다가 그 경제적 제재가 자국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보통 꺼내지 않는다. 아사히나 니혼게이자이가 아베 총리의 이번 조처를 비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왜 그러했는지 그 근거를 묻자 집권 자민당의 넘버2인 간사장이 “불화수소(에칭가스) 등이 사린가스에 전용될 우려가 있다”라는 주장을 하며 그 근거로 한국의 조선일보 기사를 예로 든다. 조선일보의 위상을 잘 알고 있는 한국 국민들이 설득될 리 만무하며, 이 발언을 보도하는 일본언론들도 스트레이트 보도에만 그친다. 이렇게 큰 사안인데 과거와 달리 일본언론을 서치하다 보면 기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왜?!"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왜 이런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일본언론도 당황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확신한다.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의 사설은 과거 10년간의 한일갈등이 촉발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것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한겨레신문의 일본통 길윤형 기자는 “단두대 매치”라고 표현했다. 이 말도 맞다. 저간의 사정이 어찌되었건 실제적인 경제문제로 비화된 이상 문재인 대통령도 아베 총리도 양보할 수 없는 물러날 수 없는 게임이 되어버린 것만은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걸 한일양국 지도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 출구전략을 짜내어야 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기엔 한일 양국이 쌓아온 교류의 역사가 너무 아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류는 오늘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보통의 일본인들은 오늘도 치즈핫도그 먹고 먹방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유튜브에선 일본과 한국의 우정이 강조된다. 트와이스 앨범은 예약 판매만으로 백만장이 팔려 오리콘 차트 1위를 찍었다. 당연히 우리 한국인들은 변함없이 잘 살고 있다. 이런 보통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애정도 떠올려가면서 ‘일본정부 및 아베총리’를 비판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박철현
1976년 2월생.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졸업 뒤,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마이뉴스와 여기 JP뉴스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무척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그러다 어느새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네 아이의 아빠가 됐다. 생계를 위해 술집도 해봤고, 현재는 인테리어 업체 대표로 일하고 있다. SNS, 페이스북에서 '노가다 뛰는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알리며,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박철현의 일기일회’를 연재했다. 아내 미와코와의 결혼 과정을 그린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받다』(창해), 네 아이의 육아 과정을 담담하게 적어나간 『어른은 어떻게 돼』(어크로스) 등의 저서가 있다. 그리고 최근 신작 『이렇게 살아도 돼』가 나왔다. 서점에서 절찬리에 판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