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일제 강제징용피해자 등 모든 개인의 청구권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외무성이 29일, 그 주장의 근거라며 협정 체결 당시의 자료를 일본 출입 기자들에게 2건 공개했다.
공개된 것은 한국의 대일청구요강과 1961년 5월 10일 열린 한일회담 때 양측의 대화를 기록한 의사록이다.
일부에서는 미공개 자료가 공개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이미 2005년 8월에 한국정부가 세간에 공개한 자료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 1951년 5월 10일 일본청구권 소위원회 제13차호 회의록(의사록) © J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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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내용을 적어본다.
일본측: "전쟁으로 인한 피징용자의 피해란 어떤 것인가?"
한국측: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그리고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본측: "국민징용령에 의한 위족, 부조료, 매장료 등은 지불하기로 되어 있고 공장에 있어서는 공장법에 군인 군속에 있어서도 원호 규정이 있었는데 당시의 그러한 베이스에 의한 보상을 의미하는 것인가"
한국측: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서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일본측: "징용될때에는 일단 일본인으로서 징용된것이므로 당시의 원호 같은 것 즉 일본인에게 지급한 것과 같은 원호를 요구하는 것인가."
한국측: "그 당시 일본인으로서 징용되었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 사람은 일본을 위해서 일하였겠지만 우리들은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 이점 사고 방식을 고쳐주기 바란다."
외무성의 주장은 이렇다.
이 회담에서 한국 측은 강제징용자 대응에 대해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해, 그에 상당하는 보상을 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한국이 1961년 시점에 개인에 대한 보상을 언급했고, 1965년 협정에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명기했다. 이 일련의 흐름에 입각하면 한국 측도 당시 (협정을 통해) 문제가 결착됐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즉, 한국 측이 강제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요구해 이를 포함한 채로 협정이 체결됐고, 일본이 그에 대한 돈을 지불했다. 따라서 개인의 청구권 문제도 이 협정을 통해 모두 해결됐다는 게 요지다.
"이 자료는 어떠한 근거도 될 수 없다"
2005년 8월 한국정부의 한일회담 문서 전격 공개에 자극받아 일본정부에 한일회담 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을 만들었던 재일동포 3세 이양수(69) 씨는 "엉터리"라면서 이 자료가 일본 정부 주장의 어떠한 근거도 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1961년부터 65년까지 4년간에 걸친 협상 끝에 협정이 체결됐다"
"1961년 5월 10일 자료인데, 박정희 대통령의 쿠데타 6일 전의 회담 내용이다.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협정을 체결한 박정희 정권 이전에 이뤄진 협상 초기 의사록이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어떠한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해 한일 양국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강제징용피해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을 일본 기업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협정을 체결하는 데 있어서 당시 일본의 통치가 합법적이었다는 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합법적으로 행해진 징용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생긴 부상이나 희생, 임금 채권 등을 '보상'하겠다는 게 일본의 입장이었다. 이번 자료에서도 '보상'이라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
즉, 이 자료는 한국정부와 대법원의 논리를 전혀 반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의 이번 자료 공개가 오히려 일본과 한국의 입장차만 재확인시켜주었을 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모든 청구권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는 결론에서 한발자국도 굽힐 생각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한국 정부 또한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에서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다.
과연 한일관계의 얽힌 실타래가 풀릴 수는 있는 것일까.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