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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해년 경제왜란 1편 - 밀약
[신경호 새 연재 소설 - 기해년 경제왜란]
 
신경호

[편집자주] 시각장애인으로 일본에서 살아가면서 느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신경호 동화작가가 새 소설 '기해년 경제왜란' 연재를 시작합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일간 무역 분쟁에 상상력을 덧칠해 그린 소설입니다. 거대 반도체 기업 세영이 위기에 빠진 오너를 구하고자 일본과 막후에서 협상을 벌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1. 밀약

 

대한항공 1201편 항공기는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김재환은 보고있던 자료를 가방에 넣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번 프로젝트는 그룹의 사활이 걸린 일이다. 그만큼 그의 걸음은 무거웠다. 잠시 활주로를 지나 유영하듯 달리던 비행기는 이윽고 멈췄다. 비즈니스석에 있던 이부장이 재빨리 퍼스트클래스로 뛰어왔다. 그리고 김재환의 가방을 들었다.  VIP 카운터를 통해 입국 수속을 마치고 청사 밖으로 나오자 한 젊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김재환과 이부장을 보더니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김실장님이 일본에 계시는 동안 모실 마나베 이치로라고 합니다.”

 

유창한 한국어였다. 아무리 한국어가 유창해도 일본인들은 한국어 발음이 서툴다. 일본 문자로 사람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고작 300여개에 불과하다. 특히 한국어 받침에 해당하는 발음을 가지지 못한 일본인으로서는 한국어의 발음을 제대로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마나베의 발음은 거의 한국인의 발음에 가까웠다.

 

마나베는 검정 양복에 흰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넥타이 가운데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빨간색 동그라미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일본의 국기를 표현한 것이었다. 마나베는 전체적으로 말끔한 인상이었다.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처럼 보였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면이 있는 인상이라고 김재환은 생각했다. 그러나 김재환은 유난히 눈에 띄는 그 넥타이가 왠지 거슬렸다. 김재환은 아무말없이 마나베가 안내하는대로 준비한 자동차에 올랐다. 이부장이 옆 좌석에 앉자 마나베가 조수석에 올랐다. 메르세데스벤츠 c63은 조용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 걸릴 것입니다.”

 

마나베가 말했지만 김재환은 대꾸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다. 오늘 저녁 미팅으로 세영그룹의 운명이 결정된다.

 

김재환은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자기가 낸 아이디어였다. 회장님이 승낙하였지만 모든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 아니 책임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패하면 자신뿐 아니라 세영그룹이 공중분해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재환이 이 계획을 고안했던 것은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국가정보원보다 앞선 정보력을 자랑하는 곳이 세영그룹 경영전략실이다. 그런데 최근 수집되는 정보는 모두 암울한 소식뿐이었다. 대법원 판결을 최대한 밀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불과 2,3달 안에 판결이 있을 거라는 정보였다. 정보제공자는 확실했다. 그리고 확인된 바로는 판결 내용 역시 암울한 것이었다. 2심 항소심에서 겨우겨우 집행유예를 이끌어 냈을 때 김재환은 지옥에서 기어나온 느낌이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철용 회장을 모시러 구치소로 갔을 때 자신을 쳐다보던 차가운 눈길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같았다. 회장은 아무말 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향해 던지는 시선으로 모든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회장은 그렇게 질책하듯한 시선을 김재환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김재환은 일주일간 이철용 회장을 만나지 못했다. 그가 세영에 입사한 후 가장 긴장한 시간이었다. 김재환은 눈을 떴다. 가볍게 두통이 찾아왔다. 신경을 집중하면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코너를 돌고 있었다.

 

문득 앞창으로 거대한 물체가 나타났다. 바다를 배경으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는 물체의 정체는 건담로보트였다. 옆에 이 부장이 핸드폰을 꺼내 건담을 찍었다. 김재환은 중학교 시절 극장에서 보았던 건담이 떠올랐다. 애니메이션 건담을 실제 공간에 저렇게 설치한 일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재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을 태운 벤츠는 오다이바 바닷가 옆에 있는 힐튼호텔로 들어갔다. 그동안 이 부장과 김재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부장도 뭔가 특별한 출장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는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다. 호텔 로비에서 김재환과 이부장이 내리자 마나베가 열쇠를 내밀었다.

 

"25층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 부장이 열쇠 두 개를 받았다. 두 사람을 향해 머리를 깊숙이 숙인 마나베는 다시 자동차에 올랐고 자동차는 그대로 호텔을 빠져 나갔다. 

 

창을 통해 보이는 오다이바 바다는 잠잠했다. 멀리 오다이바 상징인 관람차가 천천히 돌고 있었다. 그 뒤로 황금빛 저녁 노을이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작년 겨울 가족과 함께 일본에 왔을 때 보았던 풍경이다. 그 때도 이 호텔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 김재환이 보고있는 바다의 모습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작년에 보았던 바다는 겨울이었지만 따스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여름 더위가 시작되는 지금 보는 저 바다는 왠지 을씨년스럽고 추워보였다. 아니 자신의 마음이 그럴 것이라고 김재환은 생각했다. 똑똑하고 노크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호텔 방문이 조금 열리고 이 부장이 나타났다.

 

“실장님. 필요한 사항 있으십니까?”

“아니 괜찮소. 오늘은 특별한 일 없을 테니 이부장도 조금 쉬시오. 아니면 도쿄 구경이라도 하던지…”

“아니 괜찮습니다. 그럼 저는 제 방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하명하실 일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요.”

이부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 김재환은 픽~하고 웃었다.

“하명이라”

 

김재환은 느닷없는 그 단어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자기가 이철용 회장 앞에서 늘 하는 말이다. 

 

 “회장님. 하명하실 내용은 무엇입니까?”

 

처음 김재환이 이철용 회장을 알현했을 때 경영전략실 전신이었던 구조본부 김 전무가 했던 말이다. 김재환은 하마터면 이철용 회장앞에서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만큼 그 단어는 생뚱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 전무는 진지했다.

 

그러고보면 세영그룹의 문화는 독특하다. 세영그룹 밖에서는 관리의 세영이니 정보의 세영이라고 평하곤 한다.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글로벌회사의 이미지와 달리 매우 독특한, 뭐라고 말하기 힘든 문화가 세영에는 존재한다.

 

그 단편적인 것이 결재 서류이다. 세영의 결재 서류는 위로 올라갈수록 한자를 많이 넣어야 한다. 또한 결재 서류를 만들때도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한글이나 MS워드가 아닌 과거 20년 전에 세영이 만든 나랏말이라는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한다. 아마 20대나 30대 젊은 직장인들은 그 프로그램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김재환이 과장급 경력사원으로 세영에 처음 입사해 초급간부 교육을 받을 때부터 뭔가 달랐다. 초급 간부 교육내용이 좀 이상했던 것이다.

 

간부교육에서 세영이 언제 창업되었는지 창업주가 몇 년도에 무슨 사업을 시작했는지를 줄곧 들어야 했다. 또 이철용 회장의 선친인 전 회장께서 128kb 메모리 반도체 생산을 성공시켰는지, 언제 유럽 어느 도시에서 무슨 경영 구상을 발표했는지 그 내용이 무언지 들어야 했다. 심지어 교육을 마칠 무렵 초등학교 시험보듯 교육 내용동안 암기한 것을 테스트까지 하였다.

 

김재환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6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고 서류가방을 챙겼다. 김재환이 방문을 열자 낯선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짙은 밤색 양복에 머리를 짧게 깎은 차림이었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었지만 둔해 보이지는 않았다.

 

김재환을 태운 자동차는 한참을 달린 후 정원이 넓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 김재환은 히로오 아리스카 공원에서 아자부로 넘어가는 중간쯤인 듯했다. 종종 와본 도쿄였지만 시내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일행이 내리자 기모노를 차려입은 여인이 맞았다. 자갈이 깔려있는 바닥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뒤로 올린 머리 밑으로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문득 낮에 보았던 마나베의 넥타이가 떠올랐다. 흰색 바탕에 선명하게 보이던 빨간색. 저 여인의 목덜미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리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서오십시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인이 안내하고 김재환이 뒤를 따랐다. 여인의 안내로 건물에 들어서자 일본 목조 건물 특유의 공간이 나타났다. 좁고 기다란 복도를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 김재환이 준비된 방으로 들어서자 두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한 사내는 땅딸막한 키에 대머리였다. 아랫배가 불룩하고,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했다.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인상이어서 전체적으로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옆에 사내는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김 실장님 어서오십시오. 저는 총리대신 보좌관인 스미카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타니구치 겐지상. 역시 총리대신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대머리가 말했다. 대머리의 소개에 타니구치가 가볍게 목레를 했다. 김실장도 따라서 목인사를 했다. 일본인과의 미팅에서 기선제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일본 정치인과 협상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기모노 여인이 들어와 각자에게 차 한잔씩 따르고 나갔다.

 

“그럼 이야기부터 시작합시다. 식사는 이야기 끝나면 하도록 하고. 한국 세영그룹에서 갑자기 우리를 만나려는 이유가 뭡니까?”

 

스미카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번달에 참의원 선거가 있지요? 선거는 어찌 잘되갑니까?”

 

김재환은 말을 돌렸다. 스미카와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저희 세영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이 조금 어렵더군요.”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소만 잘못된 정보요. 이번 선거는 완승입니다. 완승.”

 

스미카와가 목에 잔뜩 힘을주며 말했다. 김재환은 빙그레 웃으며 서류가방에서 2장짜리 보고서를 스미카와에게 건넸다. 보고서를 대충 읽던 스미카와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옆에 타니구치에게 보고서를 건넸다. 타니구치는 천천히 보고서를 들여다 봤다. 스미카와와는 달리 그의 눈은 미동도 없었다.

 

”한국 세영이 이토록 우리 일본 선거에 관심이 있는 줄 몰랐소.”

“당연하지요. 우리 세영과 일본의 1년 거래가 얼마인줄 아십니까? 일본 선거 결과에 따라 우리 세영이 받는 영향도 적지 않으니 우리도 관심을 가질수 밖에요.”

“네. 그건 그렇고 참의원 선거와 이번 만남이 무슨 관계라도 있소?”

“네. 세영이 총리 각하를 도와드릴 수도 있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제가 왔습니다.”

“도움이라? 어떻게 돕는다는 것이요? 세영이 가진게 돈이니 선거자금이라도 지원하겠다는 거요?”

 

“그깟 돈이야 원하시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지요? 그런데 지금 선거 향방이 그깟 돈 몇 푼으로 방향이 바뀔 것 같습니까? 솔직히 말해 총리 각하께선 이번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수준으로 이겨야만 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그걸 가능하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김재환이 자신있게 말했다. 스미카와의 태도가 좀전과는 달라졌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이번 선거뿐이 아닙니다. 총리 각하께서 그토록 바라는 문제의 해결책이 될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총리각하께서 제일 골치 아파하는 문제가 뭡니까? 한일 양국간 외교문제. 특히 과거 문제로 인한 한일간의 갈등 아닙니까?”

 

“그거야 당연한 소리잖소. 한국에서는 8개월 전에 대법원에서 징용공에 대한 어이없는 판결까지 내려서 문제요. 도무지 한국은 왜 그러는거요? 이미 다 끝난일을 가지고 엉터리 같은 주장만 하고 말이요. 위안부 문제만 해도 그렇소. 지난 박근혜 대통령때 위안부 문제를 위한 협정을 두 나라가 맺지 않았소? 우리 정부는 약속대로 10억 엔이나 한국에 지불했소. 그런데 정권이 바뀌니 말이 바뀌잖소. 도대체 한국이 정말로 원하는게 뭐요? 돈을 얼마를 달라는 것이요?”

 

김재환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기가 목울대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생각대로 대꾸를 할 수는 없었다. 마음같아선 너희 일본이야말로 어거지를 부리고 있다고 따지고 싶었다. 과거 일본 총리가 사죄한 내용조차 부정하는 것이 지금의 아베이다. 일본 외무성에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자기네 국회에서 보고한 내용이 버젓이 있음에도 1965년 한일외교협정에서 모두 해결되었다고 어거지 주장만 하고 있는 것이 현 일본 정권을 틀어 쥔 극우 아베정권이다.

 

“그러니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고민하자고 이 자리를 마련한게 아닙니까?”

 

김재환은 부드럽게 말하며 눈 앞에 차를 한모금 마셨다. 은은한 챠향이 입안으로 퍼졌다.

 

”나 말 돌리는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오. 세영의 제의를 들어봅시다.”

“네. 간단히 말씀드리겟습니다. 저희 요구사항은 간단합니다. 일본이 과거 징용공 판결을 빌미로 한국을 상대로 경제 제재를 실시하는 겁니다.”

“경제 제재?”

 

스미카와 눈이 반짝 빛났다. 그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던 타니구치의 입에서도 순간 아~ 하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구체적으로 어떤 경제 제재를 말하는 것이요?”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두개의 축이 저희 세영이 담당하고 있는 반도체산업과 미래그룹이 담당하고 있는 자동차산업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소. 오호. 미래그룹을 공격해 달라는 말이군. 그런데 미래그룹 자동차는 우리 일본에 수입되는 양이 그닥 많지않아요. 자동차를 수입규제해도 별로 타격이 없을텐데…”

“자동차가 아닙니다. 반도체를 타격해야 합니다. 자동차 부문은 일본에서 공격해도 그리 크게 타격을 입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도체는 다릅니다. 일본에서 맘만 먹으면 한국 반도체 산업은 치명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뭐요? 반도체 산업을? 그럼 당신네 세영이 위태로워지는게 아니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스미카와가 황당하다는 듯 김재환을 쳐다보았다. 김재환도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 냈다. 타니구치가 스미카와 귀에 뭔가 속삭였다. 스미카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눠 봅시다. 어떻게 해달라는 거요? 그리고 그 이유가 뭐요?”

“현재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은 국가별 분업 구조입니다. 저희 세영이 포함된 한국업체가 전 세계 메모리반도체의 70% 이상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한다면 세계 모든 부문에서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의 반도체 생산라인에 반드시 필요한 부품 소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대한 톱니바퀴 맞물리듯 돌아가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작은 톱니바퀴 하나가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김재환은 다시 찻잔을 입에 갖다대었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더 이상 어떤 차향도 느낄 수 없었다.

 

“게속 들어봅시다.”

“네. 저희가 원하는 것은 바로 아주 작은 톱니바퀴 하나를 살짝 감추자는 것입니다. 일종의 놀이죠.”

“톱니바퀴를 감춘다?”

“네.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수백 아니 수천가지 부품과 소재가 필요합니다. 좀전에 말씀드린대로 우리 세영을 비롯한 한국의 반도체 생산업체는 상당수의 부품과 소재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고요. 일본이 몇 달만 아니 몇 주만 이 부품 소재의 공급을 제한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 반도체는 생산 라인이 멎고 반도체 산업은 위기에 처한다?”

 

스미카와가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씰룩였다. 타니구치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일 먼저 당신네 회사가 곤란할 것이 아니겠소?이런 느닷없는 제의를 하는 이유가 뭐요?”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 회장님이 과거 정권과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에 처해 계십니다.”

“물론 알고 있는 일이오.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네 회장이 더욱 곤경에 처하지 않겠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톱니바퀴 하나를 잠시 감추는 놀이를 하자고. 이건 놀이입니다. 혹시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허허. 나랏일 하는 사람이 한가하게 그런거 볼 시간이 어디 있소.”

 “한국 영화의 재미있는 장면이 종종 나타나지요. 물론 아주 오래된 영화들 이야기입니다만 말이죠. 좋아하는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부러 악당을 만들어 여인을 괴롭히고 주인공이 쨘 하고 나타나 그녀를 구한다. 뭐 이런 것이죠.”

 

스미카와는 돌연한 김재환에 말에 눈만 멀뚱거렸다. 

 

“일본에서 반도체 부품 소재를 당분간 중단한다는 발표만으로도 한국 언론은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리고 가뜩이나 경제 위기라는 말에 불안해 하고 있는 국민들의 민심도 요동칠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 한국의 정권은 어찌될까요? 또한 반도체 수급의 어려움을 예상한 미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나라들이 한마디씩하면 한국 정부는 상당히 곤란해 질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그럴 때 저희 세영 총수께서 일본으로 와서 이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죠.

 

건너와 일을 해결하는 모양을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형식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일본의 경제 제재로 어려움에 처한 한국 경제를 구한다는 스토리 하나만 만들면 됩니다. ”

 

“기발하군요. 그럼 거기서 우리 일본이 얻는 이득은 뭐요? 우리도 뭔가 얻는게 있어야 할게 아니오?”

 

“참의원 선거가 한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슴드린 것처럼 저희 세영이 판단하는 정세는 지금 자민당에 그리 낙관적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만약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문제를 빌미로 한국을 경제 제재한다고 하면 일본 국민들의 여론은 어떨까요? 현재 민심의 흐름이 단번에 바뀐다는 것이 저희 조사결과입니다. 그럼 총리 각하께서는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원하시는 대로 자민당은 과반수 이상을 획득하고 공명당등 연합정당과 합치면 개헌에 필요한 의원수를 확보할 수 있다는게 저희의 분석입니다.”

 

순간 스미카와의 눈이 빗났다. 김재환은 그런 스미카와의 변화를 놓지지 않았다. 지금이다. 지금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야 한다.스미카와라는 늙은너구리를 공격할 찬스다. 

 

“그리고 현재 자민당이 선거자금이 모자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세영이 어느 정도 감당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하하하"

 

갑자기 스미카와가 웃었다. 

 

“이야기가 길었군. 자 이제 식사를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자세한 건 이 타니구치와 상의하도록 하시고..”

 

스미카와가 말하며 타니구치에게 턱짓을 했다. 타니구치가 일어나 방문 옆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김재환은 스미카와를 살폈다. 몹시 기분좋은 얼굴이었다. 뒤이어 요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 카이세키라고 불리는 코스 요리였다. 음식은 정갈하고 맛있었다. 

 

 “김실장.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품목을 말하는거요. 좀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야 우리도 체면이 설 것 아니겠소?”

 

 “네. 우선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에칭가스로 불리는 고순도 불화수소, 그리고 리지스트 등 세 가지를 수출 규제하면 될 것 같습니다. ”

 

“아이고 머리아파. 그게 뭐요? 타니구치는 아는가?”

 

스미카와의 질문에 타니구치는 머리를 저었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TV와 스마트폰용 OLED 디스플레이의 핵심 재료입니다. 쉽게 말하면 스마트폰 액정 화면에 반드시 필요한 소재이지요. 에칭 가스는 반도체 제조 공정 중 회로 모양대로 깎아내는 데 필요한 소재입니다. 그리고 리지스트는 반도체 원판 위에 회로를 인쇄할 때 쓰이는 감광재입니다. 세 가지 모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작에 필수적인 소재입니다.”

“그게 없으면 반도체나 스마트폰을 못 만드는거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3가지 거의 대부분 일본 기업이 공급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대략 한국 반도체 생산에서 필요한 물량의 70-90퍼센트를 일본 기업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3가지 품목을 한국이 어느정도 수입하는지 아십니까? 대략 4억 불이 조금넘습니다. 일본엔화로는 약 5백억 엔 정도이지요. 반면 만약 이 3가지 소재가 없을 때 한국의 반도체나 스마트폰 생산 차질은 약 1500억 불, 엔화로 계산하면 17조 엔에 달합니다.”

 

“음 17조 엔이라…”

 

“네. 그러니 이런점을 특히 언론을 통해 홍보해보세요. 선거판이 확 달라질 것입니다.”

 

“역시 세영이로군. 왜 소니가 세영에게 밀린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겠소 세영의 뜻 잘 알았소이다. 내일 총리각하께 말슴드리겠소. 자세한 내용은 타니구치상과 의논하도록 하시오.”

 

스미카와는 그러면서 사케를 입으로 가져갔다. 김재환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술잔을 들었다.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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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29 [05:42]  최종편집: 1999/11/30 [00:00]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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