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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해년 경제왜란 2편 - 굴뚝새
[신경호 연재 소설 - 기해년 경제왜란]
 
신경호

2편 - 굴뚝새

 

사위는 아직 어두웠다. 그러나 캄캄했던 동쪽 하늘이 조금씩 희끄므레 밝아오기 시작했다. 열기를 머금은 새벽 공기는 끈적했다. 편의점을 나온 기현은 공장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길고 높다란 굴뚝이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었다. 그 굴뚝위로 아주 작은 물체가 하나 보였다. 마치 작은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기현은 자리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길게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 어스름한 새벽하늘로 하얀연기가 길게 올라갔다. 어제 회의에서 들었던 단어들이 머리속을 어지러히 돌아다녔다.

 

손해배상 강제집행.

 

사장을 비롯한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들 일본의 수출 규제 문제로 호떡집에 불난듯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기현은 스치듯 들었던 그 단어가 신경쓰였다. 사장이 말한대로 일본이 당장 불화수소를 포함한 소재를 수출규제 품목으로 묶을 경우 대붕전자의 피해도 심각할 것이다. 특히 기현이 맡고 있는 디스플레이 부문뿐만 아니라 회사 전체가 휘청일 수 있다. 대붕전자는 직원수가 2천명이 넘는 건실한 기업이다. 스마트폰 부품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일로 동종 업계에선 선두를 달렸다. 직원들에 대한 처우나 보수도 업게 최고였다. 작지만 강한 강소기업. 그것이 대붕전자를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었다.

 

그런 대붕전자의변화는 어느날 느닷없이 찾아왔다. 그 첫번째가 3년전 돌연 발표된 개성공단 폐쇄 결정이었다.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갑자기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하여는 아직도 그 이유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지난 국정농단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바로는 박근혜의 측근 최순실이 개성공단을 동남아시아로 옮기려 했다는 정황이 조금 알려졌을 뿐이다. 개성공단에서 1차 가공을 하여 국내에서 제품을 만들던 대붕전자는 이 갑작스런 정부발표로 손도 쓰지 못하고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대붕전자의 더 큰 변화는 그 다음에 찾아왔다. 대붕전자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키워온 박두봉 사장이 개성공단 폐쇄결정의 충격으로 쓰러진 것이다. 박두봉이 쓰러지고 그의 아들 박경민이 대붕전자를 이끌었다. 박두봉이 성수동 공장에서부터 시작한 자수성가형 경영자라면, 아들 박경민은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한 엘리트 경영자였다. 박두봉은 그만의 철저한 경영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30퍼센트 룰이라고 불렸다. 회사의 수익중 30퍼센트는 임직원들에게 배분하고, 30퍼센트는 주주에게 돌려주며, 30퍼센트는 회사의 성장을 위한 연구 개발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10퍼센트는 사회 공헌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박두봉은 이 원칙을 무슨 종교처럼 철저하게 지켰다. 그는 무엇보다 회사 직원들을 아꼈다. 회사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고 직원이라고 그는 믿었고 실제 그렇게 행동했다.

 

박두봉의 점심은 언제나 생일을 맞은 직원들과 함께였다. 직접 손으로쓴 손편지를 건네주며 축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2천명이 넘는 직원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직원 자녀의 졸업이나 입학도 알뜰히 챙겼고 10년 단위로 근속한 직원들에게 해외여행 포상도 하는등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박두봉의 이런 경영원칙은 대붕전자 설립이래 줄곧 지켜져오고 있었다. 단 한번의 노사분규도 없었고 거래처와의 소송도 전혀없었다. 직원들에게 회사의 모든 정보를 공유했고 직원들과 의논해가며 기업을 경영했다. 대붕전자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던 IMF 때는 노동조합은 임금을 삭감하자고 하고, 박두봉은 그럴수 없다고 주장했던 사건은 지금도 대붕전자에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이야기이었다.

 

그런데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박두봉이 쓰러진 후 대붕전자는 달라졌다. 당시 대붕전자는 개성공단에 막대한 원자재를 투여했다. 그런데 아무런 통고없는 폐쇄조치로 원자재들은 모두 북녘땅에 묶이고 말았다. 부채율 0퍼센트를 자랑하던 대붕전자도 현금성 위기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박경민은 이를 타계하기 위해 즉각 구조조정에 감행했다.

 

대붕전자의 사업은 크게 3가지였다. 첫번째는 박두봉이 대붕전자를 설립할 때부터해오던 전기 전자 계측기 사업부문이었고, 두번째는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의 디스플레이 그리고 하나는 세영그룹의 반도체 공장내의 하청라인이었다. 디스플레이사업과 반도체 하청라인은 수익이 좋은 반면 게측기 사업분야는 인건비가 많이 드는데 비하여 성과는 그럭저럭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개성공단이 폐쇄되어 계측기 완성품에 필요한 중간 부품 생산을 할 수 없게되자 계측기 사업부분은 골치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박경민은 즉각 이 계측기 사업부문을 정리했다. 전체 직원 2천 명 중 계측기 분야 전체 노동자 8백여 명에게 문자매시지로 해고를 통보했다. 대부분 경력이 오래되어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고참 노동자들이 대상이었다. 박경민의 이런 조치는 유효했다. 대붕전자는 위기를 뚫고 이전보다 높은 경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일본이 급작스럽게 반도체 관련 부품 소재에 규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규제한다고 발표한 품목은 모두 대붕전자 생산라인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회사는 긴급히 대책마련을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누구도 뾰족한 묘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대붕전자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대책 회의 가운데 지금 파업 투쟁중인 노조 지도부들을 대상으로 제기했던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하여 강제 집행 절차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있었다.

 

기현은 놀랐다. 그렇게 되면 어찌되는 것일까? 용철 삼촌 아파트도 지금 압류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경매로 넘어간다는 말이 아닌가? 기현은 생각했다.

 

박용철은 자신에게 친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고아원에서 자란 기현은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붕전자에 입사했다.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기현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제품 개발에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제출했었다. 작업반장 박용철은 그런 기현을 귀여워했다. 그리고 박두봉에게 기현이 생산라인보다 제품개발쪽에 더 적합하다고 추천했다. 현재 기현이 연구소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이 전혀 없는 기현에게 박용철은 늘 가족처럼 살갑게 대해 주었다. 기현도 그런 박용철을 삼촌이라 부르며 가족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용철삼촌이 해고 투쟁을 한다며 회사에 대들었고 그 결과는 손해배상 10억 원이었다. 기현이 상념에 빠진동안 담배는 깊게 타들어갔다. 기현은 담배를 끄고 다시 멀리 보이는 굴뚝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기현이 다다른 곳은 3년째 가동을 멈추고 있는 계측기 생산 공장이었다. 공장 정문에 있는 간판의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나가 대부전자라 씌여 있었다.

 

정문은 쇠파이프를 든 사내 몇명이 지키고 있었다. 오늘 교대로 번을 서는 노동자들이었다. 3년 전 박경민이 내린 즉각적인 해고 통보에 처음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도 그럴것이 대붕전자에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조직이었다. 다른 회사 어용노조하고는 달랐다.

 

실제 대붕전자 사람들은 왜 노동조합이 필요한지를 모르고 살았다. 당연히 해고 등에 맞서 어떻게 대응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해고통지를 받고난 다음날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회사에 갔을 때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쪽문만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쪽문앞에는 낯선 사내들이 험악한 얼굴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하며 들여보내고 있었다. 그것또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우왕좌왕 할 뿐이었다.

 

박용철도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평소 사람좋고 늘 낙천적인 박용철은 뭔가 회사에서 착오를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30년 가깝게 다녔던 공장문이 자신을 막아섰을 때의 생경함에 박용철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눈만 멀뚱멀뚱했다. 해고 후 첫 출근날 그렇게 회사에서 해고된 사람들은 집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몇 사람씩 모여 아침부터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면서 사람들은 점점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름도 거창한 해고무효투쟁위원회를 만들고 붉은 머리띠를 이마에 둘렀다. 하늘을 향해 처음으로 어색하게 팔뚝질도 했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되여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쪽나도 지킨다 

노조 깃발 아래 뭉친 우리 

구사대 폭력 물리친 우리~~~ 

 

처음으로 노동가요를 부르며 그들은 그렇게 노조 깃발아래로 모여들었다. 박용철은 그런 사람들에 틈에 끼지 않으려 했다. 박두봉사장이 일어나면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박두봉 사장과 자신은 회사를 함께 키워 온 사람이었다. 공고를 졸업하고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 대붕전자였다. 박용철이 대붕에 입사했을 때는 직원이 10명도 안되는 가내 공장 수준이었다. 점심시간이면 함께 라면을 끓여 먹고 박두봉 사장과 함께 족구를 했다. 밤 늦게 일을 끝내고도 박용철은 바로 퇴근하지 않았다. 박두봉 사장과 함께 늘 잔업을 하거나 청계천 공구 상가를 돌아다니며 직접 영업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의 청춘을 바쳐온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장가도 늦었다. 40이 다되어 든 늦장가 때문에 5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 민호 녀석은 겨우 초등하교 4학년이었다.

 

박용철은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의식을 읽고 병원에 누워 있는 박두봉 사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해고자들과 달리 해고 무효 소송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 버릇처럼 아침 일찍 공장쪽으로 나와 주변을 서성거리거나 근처 단골 순대국집에서 막걸리만 기울이다가 저녁 퇴근 시간이 되면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또 자기를 친 삼촌처럼 따르는 기현이 전해주는 회사 소식을 들으며 이제나 저제나 박두봉 사장이 어서 빨리 일어나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박용철은 아침 일찍 공장으로 향했다. 30년을 그랬던 것처럼 7시가 조금 넘어 공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뭔가 찡하니 코끝이 매웠다. 꽃샘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평소와 달리 공장을 감도는 이상한 기운 때문이었다. 공장 정문에 있는 횡당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경비실 이씨가 박용철을 발견하곤 잰 손짓을 했다. 그게 어서 오라는 것인지 멀리 가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박용철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순대국집으로 들어갔다. 박용철이 들어가자 주인 여자는 박용철에게 묻지도 않고 순대국과 막걸리 한 병을 가져다 주었다.

 

“박씨. 오늘은 뭔가 이상하지 않우.”

“그러게요. 경비 이씨가 뭐라고 말하고 싶은게 있는 것 같기도하고…”

“박사장님은 아직도 병원에 계시우?”

“네. 그런가봅니다. 어서 빨리 쾌차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주인여자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아침부터 혼자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 8시쯤이 되자 평소처럼 노래소리가 들렸다. 

 

휘몰아 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 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 보았다. 

 

매일 아침 듣는 노래였다. 박용철은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진 그 노래 장단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다 막걸리 한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박용철이 놀라 공장쪽을 바라보니 그동안 굳게 닫겨있던 정문이 활짝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문에서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든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 나오고 있었다. 선두에 나선 자들은 정문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출근 투쟁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문 앞 넓은 공간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용철은 눈으로 보면서도 무슨일인가 알지 못해 눈만 꿈뻑거렸다. 노동자들이 우르르 내달렸다. 순대국집 주인여자가 재빨리 가게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박용철은 그 자리에서 길 건너편 공장 앞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옛날 영화를 보는 것처럼 화면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검은 점퍼를 입은 사내들이 휘두르는 쇠파이프나 몽둥이에 노동자들의 머리가 깨지고 있었다. 넘어진 사람을 발로 짓이기는 자도 있었고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비는 노동자도 보였다. 박용철은 꿈인지 현실인지 알수 없어 그저 어리벙벙하기만 했다.

 

그때 젊은 노동자 한 명이 길을 건너 순대국집 방향으로 도망쳐 달려왔다. 박용철은 그가 기현의 친구 이민석임을 알았다. 민석에 뒤에서 덩치큰 사내가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따라왔다. 그리고 이내 뒤에서 이민석의 머리를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순간 박용철이 가게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 사내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사내가 옆으로 넘어졌다. 민석은 놀라 그 자리에 서있었다. 박용철은 재빨리 민석의 손목을 끌고 순대국집으로 달렸다. 사내 몇몇이 씩씩거리며 달려왔다. 그때 경찰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검은 점퍼 사내들은 일제히 공장안으로 사라졌고 이내 육중한 철문이 스르르 닫겼다. 경찰은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다친 노동자들은 구급차에 실려 나갔다.

 

그날부터 박용철이 달라졌다. 늘 먼 발치에서만 공장을 기웃거리던 박용철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박용철은 언제나 투쟁의 선두에 서있었다. 박용철은 해고된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고참에 속했다. 언제나 묵묵하게 일만하던 박용철이 투쟁에 선두에 나서기 시작하자 해고자들도 조금씩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한 달이 두 달이 되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해고자들의 주장은 하늘을 향한 공허한 메아리처럼 퍼질 뿐이었다. 회사는 여러가지 수법을 동원하며 해고자들을 괴롭혔다. 소문으로는 노조 파괴 전문 회사와 거액의 계약을 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노동조합 지도부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뒷골목에서 지도부에게 린치를 가하기도 했다. 회사내 노동조합과 해고자를 분리하기 위해 노동조합 위원장을 회유하기도 하고, 해고자들의 가족을 협박하기도 했다. 이런 회사의 공작 덕분에 해고자투쟁위원회는 조금씩 허물어져갔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박용철이었다.

 

전체 800명의 해고자 중 이제 투쟁위원회에 남은 이들은 겨우 100여명에 불과했다. 3년간 기나긴 투쟁에 그들은 모두 지쳐있었다. 박용철은 마지막 방법으로 굴뚝을 선택했다. 70미터가 넘는 공장 굴뚝으로 오르는 새벽 박용철은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땅으로 내려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그가 굴뚝으로 오른 것도 벌써 100일이 넘고 있었다. 기현은 공장으로 들어섰다.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 여전히 작은 새 한마리가 앉아 있듯 박용철이 웅크리고 있었다. 어제 용철은 기현에게 문자를 보내"굴뚝으로 와달라고 했다. 그가 와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기현은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용철 삼촌이 오라고 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터였다. 굴뚝밑에는 몇 동의 텐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삼촌 저 왔어요"

 

기현은 용철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굴뚝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밝아진 하늘로 용철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하늘에서 줄에 매달린 양동이가 천천히 내려왔다. 텐트 주변 사람들이 양동이 안에 비닐을 꺼내 다른 비닐봉지와 교체했다. 거기엔 물과 빵, 치즈 등과 핸드폰 보조배터리도 들어 있었다. 기현은 재빨리 가지고 온 비닐봉지에서 막걸리 한 병을 꺼내 안으로 집어 넣었다. 

 

다시 양동이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기현은 저 양동이를 타고 굴뚝으로 올라가는 싱거운 생각을 했다. 어릴 적 들었던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처럼 저 양동이를 타면 하늘나라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현이 고개를 들고 양동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카톡’하고 카톡 메시지음이 울렸다. 기현이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려는데 악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놀란 기현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굴뚝 위로 붉은 불길이 솟았다. 그리고 작은 불덩어리는 이내 굴뚝에서 떨어졌다. 마치 작은 불새 한마리가 허공을 향해 날 듯 그렇게 그불덩어리는 춤을 추듯 너울거리다가 바닥으로 곤두박혔다. 기현은 그자리에 털썩 무너졌다. 사람들이 우르르 박용철이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지만 기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먼저가서 미안해. 동지들한테 끝까지 싸워달라고 전해 줘. 민호와 민호엄마를 부탁해.

박용철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 다음편에 계속

 

1편 - [연재] 기해년 경제왜란 1편 - 밀약 - http://jpnews.kr/2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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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06 [13:36]  최종편집: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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