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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조약'에 동원된 만주국 인맥들 (2부)
[한일 100년사 추적] 기시, 사토가 한일조약 체결을 밀어부친 이유
 
박철현 기자
"日, '한일협정' 한푼도 주고 싶지 않았다 (1부)" 
 
14년에 걸친 한일회담의 자료는 한국에도 많다. 하지만 일본측의 입장, 즉 일본의 정치・경제 상황이 어땠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번 2부에서는 '구보타 망언'으로 인해 4년간 결렬되었었던 한일예비회담(교섭)이 어떻게 재개됐는지에 대해 당시 일본정부의 모습 및 집권정당 자민당 내부의 주도권 싸움을 묘사해 보고자 한다. 
 
미 정부의 개입... 일본정부의 외교적 판단
 
▲  중앙공론 65년 12월호에 실린 한일양국 국회의사록의 주요 기록©jpnews
 
"한일협정의 체결과 남(南) 베트남에 대한 전투사단의 파견등으로 아시아 자유진영의 반공제체는 강화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1965년 10월 23일, 서울방송 담화문)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는 단순히 우리들(한일양국)만의 관계가 아니라 격동하는 국제정세 특히 극동 아시아에서의 반공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실현해야만 하는 과업이다. (중략) 평양 또는 북경에서 한일회담을 절대 반대한다는 현실을 직시해 볼 때 한일회담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진출과 자유우방과의 결속을 궁지에 몰아넣겠다는 저의를 엿볼 수 있다. 한일교섭 타결이 지연되면 될수록 결과적으로 공산세력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한일회담백서, 1965년 3월 20일)
 
위의 자료를 본다면 한국이 한일회담에 '공식적'으로는 어떻게 임했는지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도 65년 8월 3일에 열린 외교부문 특별위원회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 조약과 협정을 통해 과거의 부자연스러웠던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키며 앞으로는 호혜평등에 기반한 새로운 선린관계를 수립해 나갈 것이다. 우리 국가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은 물론 자유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국가간의 단결을 보다 강화시켜 공산침략을 막고 극동 아시아의 안전과 평화유지에 기여해 나갈 것이다"(정일권 국무총리, 8월 3일, 외교특별위)
 
그 외 당시 국회의사록을 살펴 보더라도 한국 정부측 인사의 한일회담에 관련된 답변에서는 끊임없이 극동아시아의 평화, 공산진영에 맞선 자유진영의 수호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런 말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60년대 극동 아시아를 둘러싼 변화된 국제정세 때문이다.
 
원래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구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자유진영의 전초기지로 설정했다. '14년간의 예비교섭'도 미국의 지지가 없었다면 힘들다. 하지만 '반일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한일회담 자체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이것은 51년 10월 20일 첫 교섭시의 대표가 양유찬 주미대사였다는 데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첫 예비교섭에서 일본측 대표로 나왔던 마쓰모토 슌이치(松本俊一) 씨의 회고록에서 나오는 부분으로 일본측이 공개한 한일회담 문서자료 중 일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양유찬 대사는 이승만의 망명시기에 도움을 많이 준 인물로 이승만은 양 대사를 신뢰해 독립후 최초의 주미대사로 임명, 또 그를 도쿄에 파견했다. 이런 관계를 본다면 양 대사와 덜레스 특사간의 관계는 상당히 좋았다.
 
양 대사는 미국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한국어도 일본어도 못했다. 영어로만 대화를 했지만 우리들은 같이 가부키(일본 전통 공연)도 보러 가는 등 사이좋게 지냈다. 회담시의 용어는 일본어, 한국어, 영어 3개 국어를 사용하기로 했지만 양 대사는 '나는 영어만 안다'고 했다.
 
저쪽의 대표단은 일본어를 전부 아니까 우리측이 일본어로 말하면 한국어로 번역하기 전에 전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그렇지만 정작 대표인 양 대사는 일본어도 한국어도 모르는 극히 이상한 교섭이 돼 버렸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회담은 처음부터 삐걱댔다.
 
양 대사는 사람 자체는 좋았지만 상황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한국어조차 못했으니 한국의 실정을 알리가 없다. 일본과 한국간의 관계라고 한다면 그의 머릿속에는 일본이 36년간 한국을 불법으로 통치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쪽은 아직도 그런 걸 생각하고 있냐고 여겼으니 회담 자체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  마쓰모토 슌이치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양유찬 1차 예비교섭 대표에 대한 기록   © jpnews
 
양유찬 대사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하와이로 이주해 줄곧 미국에서 생활했다. 한국의 상황은 물론 일본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하물며 일본에 남겨진 재일동포의 법적지위 등에 관한 문제를 알 리가 없다. 
 
'한일회담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의 재일동포 3세 이양수 사무차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일간의 관계에 대해 거의 모르는 이런 사람을 첫 한일회담 예비교섭의 대표로 보냈다는 점을 보면 미국과의 관계는 고려하되 한일국교정상화에는 그다지 의욕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1부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식민지 지배, 청구권, 재일동포의 법적지위 등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한국측의 요구에 대해 "단 한푼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구보타 망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즉 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역시 미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담에 임하기는 하지만 그리 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그러나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본격적으로 나섰다.
 
64년 10월 중국은 핵실험에 성공했고 64년 후반부터는 베트남 전황이 본격적으로 악화됐다. 패전당시 ghq 사령부의 대변인을 지낸 바 있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는 일본의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비해 한일국교정상화에 적극적이었고, 무엇보다 '만주국 출신'이었다. '대의명분'과 '주변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한일회담을 '일한미교섭(日韓米交渉)'이라고 불렀다. 교도통신의 우치다 겐조 당시 정치부 기자는 '현대의 눈'(65년 10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한회담은 사실상 '일한미교섭'이다. 회담 당사자인 일한 양국 외에 미국의 극동군사전략에 따른 요청이 회담타결의 추진력으로 시종일관 강력하게 작용돼 왔기 때문이다. 물론 당사자 양국의 의향과 국내사정이 회담의 기조를 좌우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미국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에 타결됐다고 보는 것이 맞다"
 
자민당 내부의 세력변화도 한일회담 타결에 영향을 미쳤다. 원래 자민당 내부에는 크게 두 가지 외교노선이 존재했다. 반공강경외교, 특히 반(反) 중국 노선을 표방하는 '아시아 문제 연구소'와 평화공존외교를 주창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회'적 발상이 그것이다.
 
한일회담에 있어서도 이 두 노선은 확연히 갈렸다. '아시아 문제 연구소'는 한일회담을 기필코 타결시켜야 한다는 적극노선을 채택한 반면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회'는 회담자체에 소극적이었다. 전자의 대표적 인물이 사토 에이사쿠의 친형이자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다.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하는 등 만주국의 경제산업 전반을 책임진 바 있는 기시 전 총리는 1945년 8월 15일 a급 전범으로 체포돼 도쿄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됐지만 미국의 대(對) 공산진영 외교 정책의 변화에 의해 풀려 났다. (1948년 12월 24일 석방)
 
미국은 일본에 진주하고 있던 ghq 사령부를 통해 일본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방파제'로 설정함과 동시에 구체제 인물을 복권시켰다. 이 때 노몬한 사건을 일으키는 등 소련과 격렬하게 부딪혔던 경험이 있는 만주국 출신은 특히 우대받았다.
 
하지만 기시 전 총리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나 사토 전 총리처럼 처음부터 '친미'를 공공연하게 표방하지는 않았다.
 
기시와 사토, 피는 물보다 진하다?! 
 
▲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  © 일본국회 자료실
52년 일본재건연맹을 설립할 때 그는 '자주헌법제정', '자주군비확립', '자주외교전개'를 슬로건으로  내 걸었을 정도로 민족우익파였다.
 
그는 53년 일본사회당에 입당하려고 했던 전력도 있으며, 또 요시다 시게루의 '경무장 대미협조(軽武装 対米協調)' 지론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런 충돌과 대결을 절충했던 중개자가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다. 한일회담도 마찬가지지만 최근 그 존재가 밝혀진 오키나와 밀약, 미일안보협정등 종전 이후 이루어진 주요한 외교적 국면에는 사토 에이사쿠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사토 전 총리의 이러한 외교술은 국가 대 국가 뿐만 아니라 국내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본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은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하토야마 유키오 현 일본 총리의 조부)와 요시다 시게루였다. 기시는 복권 이후 줄곧 하토야마를 정치적 스승으로 모셨다. 반면 동생 사토는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전 총리와 함께 정치그룹 '요시다 학교(吉田学校)'를 이끌었을 정도로 요시다의 심복이었다(이후 이케다와 사토는 경제정책 등을 두고 앙숙으로 변했다).
 
자유당, 일본민주당, 일본사회당 우파가 결합한 자민당 55년 체제가 시작되면서도 당내의 외교노선의 대립은 계속됐다. 하지만 급변하는 대외정세에 따라 대미협조를 강조한 요시다 파의 입김이 세졌고, 기시 역시 1957년 3월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면서 '일본을 위해' 친미우익으로 변해 갔다.
 
또한 기시 전 총리는 1960년 1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만나 체결을 약속한 신(新)미일안전보장조약(이하 '미일안보조약')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대중시위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결정은 옳았음'을 역설적으로 알게 됐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반대 집회에는 폭력단, 가이센(街宣) 우익, 좌파, 혁신세력등 수십만명이 참가했다. 
 
하지만 기시는 이들을 제대로 된 국민들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시바시 단잔 전임총리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공석이 된 총리직을 물려받은 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뇌물, 가난, 폭력을 일소시키고 싶다"
 
기시는 반대투쟁에 나서는 이들의 '폭력'적 행위, 아니 구성원 자체가 이미 사회의 암적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실제 60년 6월 기시는 시위대 진압을 위한 자위대의 출동을 방위청에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암적 존재'들이 극렬한 반대를 하고 있으니, 기시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자서전에는 "내가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한 것에 대한 시시비비는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구절이 있으며 제2차 기시 내각은 조약이 비준・발효된 1960년 6월 22일 다음 날인 23일에 총사퇴했다.
 
이런 기시 노부스케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이가 동생 사토 에이사쿠였다. 자서전에 의하면 사토는 미일안보조약 반대데모가 극렬했던 6월초부터 계속 수상관저에 머물렀다고 한다. "우리 둘은 그 때 죽음을 각오했었다"라는 구절도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국 출신의 a급 전범'의 기시가 재개하고 'ghq 사령부 출신의 친미파' 사토가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기시는 총사퇴 이후 이케다 개조내각이 들어서면서도 정재계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물론 자신이 재개시킨 한일회담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이케다 내각이 끝난 후 집권한 사토 내각이 한일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측면지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만주국 인맥 총동원령'이다.
 
얼마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국 군관학교 혈서 지원'을 다룬 <만주신문>(1939년 3월 11일자)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박 전 대통령의 만주국에서의 행적은 꽤나 유명하다. 혈서도 혈서지만, 박 전 대통령은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신경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또한번 이름을 날렸다.
 
64년 사토 내각이 들어서면서 한일회담의 실무진은 만주국 인맥으로 채워졌다. 나중에 한일기본조약에도 서명하는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무성 장관은 만주국 통제과장을 지낸 바 있는데 당시 그의 직속상관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였다.
 
한일회담 막후에서 활약한 이토추 종합상사의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소설 '불모지대'의 실제 주인공으로 포항제철을 설립한 박태준 씨와 막역한 사이임) 회장은 만주국 관동군 제4사단 참모로 이름을 떨친 바 있고,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육사 1년 선배이기도 하다.
 
한편 미일안보조약에서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던 기시는 전설적인 우익활동가 사사가와 료이치, 고다마 요시오 등 만주국에서 동거동락했던 지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한일회담에서 우익들의 반대를 거의 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사토 에이사쿠의 '부산적기론'... 정치적 기동으로 변해 간 한일회담

▲ '현대의 눈' 65년 10월호에 소개된 자민당의 '부산적기론'. 기시 전 총리의 작품이다.  ©jpnews
사토 내각이 들어서면서 일본 정부는 한일회담을 '경제'가 아닌 '정치'로 몰고 갔다. 
 
사실 이전까지의 한일예비교섭은 청구권 문제가 주요 테마였다. '구보타 망언'을 비롯해 "한푼도 줄 수 없다"는 일본정부의 내부적 방침들도 결국 '돈'이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이 급변하고 박 전 대통령이 집권하는 등 주위 상황이 변하자 64년 10월에 들어선 사토 내각은 한일국교정상화가 자유진영 수호를 위해 필요하다는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부산적기론(釜山赤旗論)'이다. 
 
당시 사토는 이케다 내각의 고도성장주의에 반기를 드는 바람에 비주류로 전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케다 전 총리의 총재 3선을 막기 위해 나선 총재선거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상황에 따라서는 자민당을 탈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케다 전 총리가 병으로 퇴진하는 바람에 사토 전 총리는 당내 원로 회의를 거쳐 총재선거없이 총리대신에 취임한다. 갑작스럽게 출발한 사토 내각은 그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한 건'을 터뜨려야만 했다. 그 '한 건'이 한일국교정상화였고, 이를 위해선 당내 반발세력들을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때 나온 것이 '부산적기론'이었다. 사토의 후원자를 자임했던 기시가 상임고문을 맡고 있던 '아시아 문제 연구소'에서 나온 이 이론은 나중에 '자민당 일한회담 촉진 pr 요강'으로 시중에도 배포됐다. 대강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동란(6.25 전쟁) 당시 un군 및 한국군이 공산군의 공격을 받아 부산 부근까지 후퇴해 일시적으로 조선해협(현해탄)까지 넘어오지 않을까 우려했던 기억은 지금도 일본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일한의 국교가 정상화돼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의 기초가 마련된다면 일본을 위해서라도 극히 바람직하다"('자민당 일한회담 촉진 pr 요강', 1964년 12월)
 
이 팜플렛에 주목해야 할 점은 '촉진'이라는 단어다. 사토 내각은 한일회담을 하루라도 빨리 성사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요구도 있었지만 어부지리로 들어선 사토 내각의 색채를 확실히 드러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토는 이케다 내각의 한일회담 자세를 두고 "우유부단하고 게으른 이케다 내각"이라고 줄곧 비판해 왔었다.
 
당시 이케다 내각의 중추인물이자 이케다의 최측근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무성 장관은 외무성 기관지 '세계의 움직임'(62년 9월호)에 이렇게 썼다.
 
"일한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까 천천히 생각하면 된다. 이웃집과 아침인사조차 안 한다는 건 불행한 것이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이웃집의 운명을 우리가 전부 받아들여 이 관계가 좋아지지 않았다고 이웃집이 죽어나갈 것이라고 지레 짐작할 필요도 없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한 당사자조차 서두르지 않았던, 장장 14년간에 걸쳐 진행돼 왔던 한일회담을, 사토 내각은 출범한지 6개월 만에 해치워 버렸다.
 
표면적으로는 한일 양국간의 평화와 우호, 상호평등에 입각한 선린관계등 미사여구가 춤추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미국의 대 아시아 전략과 박정희 군사정권의 출범, 그리고 절름발이 사토 내각의 '한 건' 의도 등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대의명분, 혹은 '정치적 의제'가 설정되면서 개인의 청구권 문제는 한줄기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3부 : '먹칠투성이'로 공개된 한일회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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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2/03 [17:30]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읽으면 읽을수록 짜증나는 민족. so cool 09/12/03 [21:35]
어려울때 그렇게 많이 도와주었거늘 약탈과 침략으로 우리재산과 기술,문화를 도적질 해가서는 한다는 짓이 부모와같은 한국을 이렇게 짓밟다니.정의가 있다면 일본같은 나라는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그래야 세상 살맛이 나지 않겠나. 수정 삭제
한일 회담은 米극동군사전략에 따른 요청. Nicholas 09/12/03 [21:36]
한일 회담은 미국이 제시한 중공과 소련에 대항한 '반공의 띠'에 따른 것이었으며, 회담에 임하는 인맥들의 선전(宣傳)은 '반공 이데올로기'을 담고 있었다. 회담이 끝난후, 한국 중심부는 경제 신화를 노래했고, 일본 중심부는 침략전쟁에 따른 보상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고 선전했다. 결국, 그 당시 양국 중심부가 원하던 것은 기억의 망각이었던 셈이다. 마치 해방이후 친일부역자들이 반공주의를 통해 그들의 과거를 감추려했던 것이나 패망이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역사를 가르쳤던 것처럼. 수정 삭제
또 다른 면을 생각해보면... oriyo 09/12/03 [22:13]
물론 기사 내용은 타당성있는 분석이지요...
그 당시 한일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화들을 살펴보다보면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던 일본측 주요인사들에게는 한국(조선)에대한 어떤 향수같은 것이 있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리고 죄책감이라고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어려운 상태에 빠진 한국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을거고요... 이런 심리적인 요소들이 역사의 장면,장면 마다 상당한 역활을 하곤 하지요. 결국 역사란 것도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요...

독도, 교과서, 야스쿠니문제 같은 것으로 지난 50년 동안의 자민당 장기집권를 비판하지만 사실 자민당 장기집권의 가장 큰 德을 본 것은 한국입니다. 자민당 장기집권 덕분에 비교적 안정되고 지속적인 對한반도정책이 가능했었으니까요... 요즘 하토야마의 미국과의 외교정책을 보십시요. 그것이 70년대 또는 80년대 벌어졌다면... 그리고 그 당시 일본은 親北 정서같은 것이 있어어요...
수정 삭제
느낀점. Nicholas 09/12/03 [22:43]
2회에 걸친 한일 회담의 전후 사정을 보면서 느낀점은 역사에 대한 크로스체크 즉, 세계사의 관점에서 동북아 근현대사를 늘 봐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알려지는 내용의 상당부분이 행동에 대한 정당화나 조작된 이미지를 투사시키는 환영(幻影)이니까요. 수정 삭제
자민당 장기집권에 큰 덕을 본 건 남한이 아니라 운디네 09/12/05 [23:17]
자민당 장기집권에 큰 덕을 본 건 남한이 아니라 남한의 권위주의정부들이었다고 해야 맞겠죠. 또 하나 전후 남한의 경제적 성공을 신화화해서도 안됩니다. 그에 근거해서 남한이 큰 덕을 봤다고 말하게 되니까요. 냉정하게 봐야죠. 자민당이 장기집권했다고 해서 그게 항상 남한의 권위주의정권을 안정시켜 준 것도 아닙니다. 박정희 재임 중반 이후 막가나는 상황에서 자민당 내에서 조차 박정희를 경원하는 흐름이 있었으니까요. 그거에 열받은 박이 국교중단까지 내미는 생쇼를 벌이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거 땜에 지금도 한국의 내쇼널리즘 선동은 정치적 궁지에 몰린 권력의 농간이란 설이 일반화되기도 했죠) 수정 삭제
양국의 정치 발전을 저해한 고리이기도... 운디네 09/12/06 [00:04]
일본의 경제지원은 나쁜 영향도 미쳤다. 거액의 정치자금 뒷거래가 이뤄졌고 이걸 기반으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토대를 세웠다. 또 박정희 정권은 자민당 특정계파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양국의 권위주의적 지배엘리트들은 이런 식으로 부패의 사슬로 연결되었고 양국의 정치 발전을 저해했다. 정치적 저발전 상태는 결국 어느 순간에 거대한 타격과 비용으로 돌아온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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