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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간 아이와 함께 출근해 보니 (최종화)
[외전] '알딸딸' 한국아빠의 '일본주부' 체험기 (최종화)
 
박철현 기자
(이 글은 약 5개월간 연재된 1부 '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2부 '일본 아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다'의 외전 격인 글입니다. 1, 2부 시리즈를 읽고 이 글을 읽으시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총12화)
일본 아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다 (총9화)
[외전] '알딸딸' 한국아빠의 '일본주부' 체험 (1부)
[외전] '주부', 아! 그 위대한 이름이여! (2부)
[외전] 아들과 첫 대면한 날, 펑펑 운 사연 (3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내와 아들 '준'은 21일, 무사히 퇴원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4인 가족이었는데 이날부터 5인 가족이 된 셈이다.
 
퇴원에 즈음해 주위로부터 "니가 잘 돌봐줘야 한다"는 말을,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50번은 들은 것 같다. 한국 부모님, 누나, 친척들은 물론 일본 지인, 선배들까지 격려, 혹은 명령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갑작스레 이런 말을 들으면 모르겠지만 아내가 입원해 있던 며칠동안 아이 둘과 함께 지내봤기 때문에 자신감도 생겼다. 처음엔 엄마만 찾던 유나가 단 며칠만에 완벽한 '아빠 추종자'가 될 정도니 말 다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충고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미역을 한 박스나 보내주신 어머니는 무려 10분간 국제전화로 미역국 끓이는 법을 강의하셨다.
 
"미역하고 같이 보낸 멸치 있제? 찬 물에 멸치 한 봉다리 넣고 소금 좀 넣고 팔팔 끓이라. 그거 끓을 동안 파 썰어놔야 한대이. 아참, 미역은 미리 찬 물에 풀어 넣어서 좍좍 짜야 한대이. 비린내 빼야 맛 있거든. 다 끓이면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고 이러쿵 저러쿵..."
 
자취생활을 10년이나 해 봤으니 미역국 정도는 당연히 끓일 줄 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못 미더우셨는지 전화를 끊지 않으신다. 어머니 뿐만 아니다.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유재순 대표는 "출산후엔 차가운 물에 절대 손 담가선 안된다"고 말한다. 나중에 온단다. 뭐가 오는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10년쯤 지나면 무언가가 온다고 협박하셨다. 찬 물에 손 담그지 말라는 말은 곧 가사일의 기본인 세탁과 설거지를 내가 해야 된다는 말이다.
 
작년부터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큰 애의 도시락도 만들어야 했다. 사실 지난 한달간의 가사 일을 돌이켜보면 도시락 만들기가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내용물도 내용물이지만, 데코레이션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한번은 대강 쌌는데 아내가 불합격 판정을 내리면서 그런다.
 
"이쁘게 안 싸면 다 안 먹어. 다른 집 아이들은 이쁘게 싼다고 불평하거든. 그거, 하트 모양의 김은 꼭 얹어야 해. 소세지 계란말이도 넣어야 하고."
 
그냥 싸 주면 알아서 먹음 되지, 아! 정말 이것저것 비위 맞추기 힘들다. 몇 번의 시간배분 시행착오를 거쳐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야 아침 가사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전날 자기 전에 밥을 지어 놓는 건 필수다.
 
아침에 혼자 일어나서 가사일을 할 때마다 말로는 잘 표현하기 힘든 기분에 빠져든다. 아내, 미우, 유나, 준 다들 새근새근 자고 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후 부엌으로 가 음식을 만든다. 내 딴엔 조심한다고 하지만 덜그럭 덜그럭 소리가 난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 이 소리가 바로 그 소리구나. 아주 오랜 옛날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시기 전에 나와 누나의 밥을 준비했던, 잠결에 들려왔던 어머니만의 소리. 어머니가 이 일을 수십년간 매일같이 해 오셨고, 아내도 미우가 태어났을 때, 그러니까 2006년부터 이걸 해 왔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감상에 젖어있을 순 없다.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빨리 빨리 해 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미우의 도시락을 해결한 후 미역국을 만든다.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내가 만든 미역국을 지난 한달간, 물론 지금도 아주 맛있게 먹고 있다. 그만큼 내 실력이 좋다는 말이 된다. 하하하.
 
참고로 내 미역국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일단 하루(3번)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의 미역을 약 2, 30분정도 찬물에 풀어 넣는다. 그동안 다른 냄비에 찬물, 멸치, 소금, 파, 소고기 적당량을 넣고 팔팔 끓인다. 이 때 반드시 국 뚜껑을 닫아야 한다. 

다 끓으면 미리 찬 물에 풀어넣어 두었던 미역을 넣는다. 다시 냄비뚜껑을 덮은 채 팔팔 끓인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처음 미역을 찬물에 풀어 넣을 때 약 3센티 간격(마른 상태에서 3센치이기 때문에 다 풀어지면 약 7, 8센치 정도로 먹기좋은 상태가 됨)으로 잘라 넣는게 중요하다.

이렇게 팔팔 끓인 후 마지막에 참기름을 아주 조금만 넣는다. 그런 다음 약한 불로 그 팔팔거림을 유지해 둔다. 아내는 첨가물을 안 먹기 때문에 미원류는 전혀 넣지 않았다. 처음 미역국을 내 놓았을 때 반신반의하던 아내는 한입 맛을 보더니 놀랬다는 어투로 말한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오빠는 가만 보면 요리같은 건 참 잘 하는 것 같아."
"그럼! 자취를 몇 년이나 했는데."
"그래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도, 한달 지나도 잘 부탁해요. 호호호."
"어? 응......-_-"

 
도시락 만들고, 식사준비하고, 세탁기 돌리고, 아이들 옷 갈아 입히고, 설거지하고, 빨래 널어야 하고...물론 나도 회사갈 준비를 해야 한다. 두 시간이 눈 깜빡할 새 지나간다. 8시 30분이 되면 미우를 유치원에 바래다 줘야 했다. 미우는 아빠와 같이 유치원에 간다고 하니 들뜬 표정이다. 내 손을 잡는 미우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전에 미우가 다니는 유치원을 잠시 소개했었지만 이 유치원 정말 괜찮다. 공부를 절대로 안 시킨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이 유치원으로 결정하게 된 계기는 추첨방식에 있었다. 이 유치원은 무척 인기가 높아 언제나 모집정원보다 지원자가 더 많다. 큰 애가 들어간 작년 같은 경우 21명 모집에 42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어떤 기준으로 21명을 뽑는 건지 당연히 궁금해 진다. 아내에게 물었다.
 
"그런데 많이 몰리면 어떻게 추려내는 거지?"
"그냥 추첨한대. 나 이런거 뽑힌 적 한번도 없는데 정말 걱정이야."
"내가 추첨같은 건 운이 좋은데..."
"됐어. 떨어지면 딴 데 가면 돼."

 
운명의 추첨날 아내는 전화를 걸어와 34번을 뽑았다고 했다. 아! 떨어졌구나 라고 일순 생각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밝다.
 
"붙었어. 붙었어!"
"어? 그래? 34번 뽑았다며..."
"세상에 그게 말야. 이 유치원 정말 대단해!"

 
아내는 흥분상태였다. 하지만 아내로부터 이 유치원의 추첨방식을 전해 듣는 순간 내 몸에서도 소름이 돋았다. 시즌 3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이 유치원 추첨방식은 정말 누구나가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는 경탄스럽고 합리적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들어간 유치원을 미우는 참 즐거워 했다. 심한 감기에 걸렸을 때도 유치원에 가야 한다며 가방을 둘러 맬 정도로 유치원을 좋아했다.
 
그런 즐거운 유치원에 아빠와 같이 가는 것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다. 최근에 배우기 시작한 휘파람을 해 대며, 노래도 큰 소리로 불렀다. 한달간 미우를 유치원에 바래다 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모든 아빠들이 아마 해 봤을 이 질문도 던졌다.
 
"미우야."
"응?"
"미우는 아빠하고 엄마하고 누가 더 좋아?"
"둘 다 좋아."
"그래?"

 
미우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둘 다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그래?'라고 되물은 것을 배려해서인지 몰라도 미우는 금세 덧붙였다.
 
"근데 지금은 아빠하고 있으니까 아빠가 조금 더 좋아."
 
고작 4살배기가 어쩌면 이렇게 분위기 파악을 잘 하는지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은 원래 이렇게 성장이 빠른 걸까?
 
미우를 바래다 주고 집으로 돌아와 이번엔 유나를 둘러(?) 멘다. 같이 회사를 가기 위해서다. 유나도 걸을 수 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출근 때는 어쩔 수 없다. 유나는 "걷고 싶어. 걷고 싶어!"라고, 앙탈을 부리지만 그러다간 점심 때가 다 되서 출근하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유나는 세상의 그 어떤 사소한 것들에도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10미터를 제대로 전진하기가 힘들다. 그나마 여유가 있었던 어느 날 같이 한번 걸어봤다. 보통 15분이면 도착하는 역까지 40분이 걸렸다.
 
"아빠! 이것 봐!"
"응, 뭔데?"
"꽃!"
"아, 아...그, 그러네. 꽃 참 이쁘다."
"아빠!"
"응?"
"꽃 옆에 전봇대가 있어!"
"......-_-"
 
이런 식이다. 갑자기 멈춰서서 꽃 한번 만지고 전봇대 한번 올려다 보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출근 때는 둘러 멜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이를 안은 채 전철을 타면 거의 100%의 확률로 자리를 양보받을 수 있었다. 
 
물론 자리에 앉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거의 100%'의 확률도 양보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유나 덕분이었다. 자리를 양보 못 받으면 유나가 지극히 순수한 얼굴로 이렇게 '큰 소리'로 물어오기 때문이다(사실 큰 소리를 지르는 건 아닌데, 출근시의 일본 전철이 워낙 조용해서 상대적으로 크게 들릴 뿐인다).
 
"아빠, 오늘은 못 앉는 거네. 아! 피곤하다."
 
이제 두 살 먹은 아이가 어떻게 이런 전략적인 발언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유나는 아주 약삭빠르다. 절대 손해보는 짓은 안 한다. 별명도 '반쵸'(番長)다. 아내는 "오빠 닮아서 그런거야"라고 말하지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 무엇보다 나는 여태껏 손해만 보고 살아 왔다!
 
두 살 먹은 아이가 이런 '독백'을 내 뱉으면 누군가는 일어선다. 보통은 중년 아줌마들이 웃으면서 "우리 귀여운 아기, 여기 앉아요"라고 말한다. 사실 금세 내리기 때문에(미타카 역에서 도자이센으로 갈아타면 널널하게 앉아갈 수 있다) 앉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나의 필살기가 작용한다. 자리를 양보해 준 이한테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아리가또!"라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양보해 준 이 뿐만 아니라 다른 근처에 있는 사람들도 웃지 않을 수 없다. 
 
겨우 두 살짜리가, 아직 아기 티도 나는 아이가 방금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껏 면상을 찌푸리며 "피곤하다!"(100% 연기다)를 연발했는데 자리를 양보받자 말자 180도 얼굴표정이 변하면서 "고마워요"를 말하니 웃지 않을 수 없다.
 
매번 같은 시간대 전철, 같은 차량을 타기 때문에 한달간 거의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 처음 몇번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놓기만 하면 며칠 후 부턴 우리 부녀가 전철을 타기만 하면 자리를 양보해 주는 단골 손님도 나타났다.
 
"오늘도 따님이 원기왕성하네요. 하하하."
"아, 네. 언제나 그래요. 하하하."
 
나중에 유나와 같이 출근하는 걸 관뒀을 때 혼자서 전철을 타니까 어떤 아주머니는 물어오기도 했다.
 
"요즘 따님은 같이 안 가시나 봐요?"
"아, 네. 이제 집에 있어요. 와이프 애 낳고 한달 지나서 괜찮아요."
 
이런 에피소드를 아내에게 들려주니까 처음엔 믿지 않는다. 그런 경험이 한번도 없단다. 하긴 나도 전철에서 이렇게 웃어가며 타인들과 대화를 나눠본 경험이 없다. 일본 전철은 참 조용하구나, 삭막하구나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것도 사실 선입견이었다. 유나 덕분에 나도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셈이다.
 
도자이센으로 갈아타기 위해 미타카 역에서 내릴 때 유나는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했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반드시 손을 흔들어 준다. 몇번이고 자리를 양보해 준 아주머니는 "내일 또 보자"고 웃는다. 유나는 가히 '스타'였다. 평일 오전 9시 40분부터 50분까지 고쿠분지 역에서 미타카 역까지 쥬오센 4칸째 전철차량이라는 매우 한정적인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말이다.
 
회사 사람들도 유나를 귀여워 해 줬다. 일에는 물론 지장이 있었다. <제이피뉴스> 애독자라면 금방 눈치챘을테다.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 내 이름으로 쓴 기사가 거의 인용 및 분석기사였다는 것을 말이다. 현장에 나갈 수가 없다. 아빠가 안 보이면 울어버린다. 울어버리면 다른 기자들도 글을 못 쓴다. 그나마 먹을 걸 주면 일시적으로 울음은 멈추지만 계속 먹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무실 안에서만 줄곧 지냈다. 사실 나도 좀 쑤셔서 죽는 줄 알았다. 하루 왠종일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 육체노동도 힘들겠지만 매일 8시간씩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결국 일은 다 힘들다.
 
그 '힘듦'을 유나가 상쇄시켜줬다. 뭐든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유나를, 유재순 대표는 아주 귀여워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녀석이 곧 죽어도 유 대표에게 안기지 않는 것이다. 손 조차도 안 잡으려 했다. 고집하나는 타고났다. 황소고집이다. 아무도 못 꺽는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3연발'에 유 대표는 "아휴, 좀 안겨주고 그럼 얼마나 좋니"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유 대표는 아이가 잘 먹는다며 장조림을 매번 점심식사때마다 챙겨 주신다. 다른 기자들은 유나의 어마어마한 먹성에 놀란다. 하긴 안민정 기자가 평소 먹는 식사량을 매끼마다 해치웠으니.
 
그렇게 나는 유나와 한달을 보냈다. 그런데 놀랄 일이 생겼다. 나나 아내는 매일 같이 있어서 느끼지 못했는데 유나를 오랜만에 본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아내 친구들이 유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다.
 
"아니, 유나가 언제 이렇게 많이 컸어?"
"유나, 말이 엄청나게 늘었네!"
"살도 토실토실 많이 쪘네."
 
그랬다. 유나가 한달간 부쩍 성장해 버린 것이다. 같이 출근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껏해봐야 세 단어 문장 밖에 말을 못했다. '세 단어 문장'은 주어, 목적어, 서술어를 말한다. 각각에 해당하는 세 단어를 나열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유나는 자기 언니에 버금갈 정도의 어휘력을 자랑한다. 보통 어른들이 쓰는 회화문장을 구사할 정도로 말이 많이 늘었다. 키도 자랐다. 아내의 모자 수첩을 보니 1월 중순만 하더라도 98cm였던 게 지금(2월 27일 현재) 101cm로 나온다. 마지막 며칠은 출퇴근 길 전부 자기가 스스로 걸었다. 물경 40여분을 피곤하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걸은 것이다. 물론 전철만 타면 갑자기 "아! 피곤하네. 오늘 못 앉는거야?" 모드로 바뀌긴 했지만.
 
유나만 자란 게 아니다. 나도 유나와 같이 다니면서 많은 걸 배웠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본 전철은 조용하고 삭막한 곳'이라는 편견을 깼다. 또 아이의 시선에 맞추는 법을 배웠다. 유나는 '왜?'라는 질문을 많이 던졌다.
 
가령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일 때 건너야 한다고 말하니까 유나가 "왜 그런거야?"라고 물어온다.
 
"빨간 불일 때는 차가 지나가니까 사람이 건너면 다칠 수 있어서 그런거야. 파란 불로 변하면 차가 멈추니까 그때 건너면 안 다치고 좋으니까."
 
내 딴엔 모범답변이라 생각했는데 또 다시 물어온다.
 
"왜 다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유나는 사람이 차에 치이면 다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설명하기가 정말 어렵다. 07년 12월이었던 것 같다. nhk 주간어린이뉴스를 진행한 바 있는 저널리스트 이케가미 아키라 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케가미 씨는 그 때 저널리스트의 기본을 묻는 나에게 이렇게 충고했었다.
 
"우선 어려운 말을 쓰지 마세요. 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잘 설명할 수 있는 스킬을 길러 보세요.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이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린이라고 생각한 후 쉽게 글을 쓰면 됩니다."
 
이 때부터 내 나름대로 글을 쉽게 써 온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유나의 질문에 말문이 막히는 걸 보니 아직도 멀었다. 스스로 각성하는 계기를, 유나에게서 받을 수 있었다.
 
지난 한달간 참 행복했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 육체적 피곤을 넘어서는 정신적 안락감. 아이들이 엄마가 아닌 나를 쳐다보면서 숟가락을 꺼내 들고 "아빠! 오늘 메뉴는 뭐야?"라고 천진난만하게 물어오는 그 모습. 이런 일련의 시츄에이션은 기혼남성이라면 꼭 경험해 볼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주부체험을 통해 아내가 평소 아무런 불평없이 해 왔던 가사노동이 얼마나 힘든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한달쯤 지났을까? 하루는 집에서 기사를 쓰고 있는데 밖에서 덜그럭 소리가 난다. 문을 열어보니 아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어? 그거 놔둬. 이거 마저 마무리하고 내가 할께."
"아냐. 이제 슬슬 복귀해야지. 한달간 정말 수고했어요. 오빠."
"어...그럼 이제 다 손놔도 돼?"
"'슬슬'이라니까!"
"아...네."
 
하지만 아내 성격이 또 슬슬할 타입이 아니다. 갑자기 무리를 해던 탓일까? 가사복귀한지 하루만에 급성폐렴에 걸려 3일간 입원하는등 아주 된통 고생을 해야만 했다. 아이들도 rs 바이러스에 걸려 아직도 완치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막내다. 
 
태어난 지 한달 밖에 안된 '준'도 rs 바이러스에 걸려 지금 입원중에 있다. 의사 선생 말로는 3개월 미만의 신생아가 이 병에 걸리면 심할 경우 호흡곤란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준'도 위험했었다. 지금은 다행히 고비를 넘겼지만.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되니 집안 일은 다시 내 차지가 됐다. 또 밴쿠버 올림픽에, 조선학교 기자회견, 근로정신대 할머니 취재 등도 겹쳐 지난 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것도 한달간 가사일을 해 봤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고 말이다.
 
긍정적인 사고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무리라고 생각했던 육아, 가사일도 실제로 해 보니 충분히 할 만했다. 무엇보다 이런 경험이 긴급시에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아내가 어제 베겟머리에서 날 빤히 쳐다보더니 말을 걸어 온다.
 
"오빠는 가만보면 참 대단해."
"뭐가?"
 
"아니. 그냥...역시 군대 덕분인가?"
"...-_-"
 
"암튼 정말 철인인 거 같아."
"하하하. 난 철인이 아니라 철현이지."
"......-_-"
 
막판에 추웠지만, 아무튼 그렇다. 한번쯤 아내 입장에 서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또 실천해 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철인이 될 필요까진 없겠지만 가정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군인정신'을 한번 발휘해 보는 건 어떨까?

■글쓴이 주 : 한편으로 끝내려 했던 외전마저 질질 늘린 만행을 저지른 것, 그리고 지난 주 아무런 공지도 없이 한 주 빼먹은 것에 대해 독자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시즌 3는 집안 사정이 좀 정리되는 대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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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2/28 [07:04]  최종편집: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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