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명승부였다. 히가시후쿠오카도 대단하지만 오사카 조선고급학교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최근 몇 년간 열린 결승시합 가운데서도 첫 손가락에 꼽힐 대단한 시합. 이런 시합을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7일, 제11회 전국고교선발럭비대회 결승전을 본 관중, 대회관계자,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식럭비경기를 관전한 기자 역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축구와 럭비는 여러모로 닮았다. 종주국이 영국이며 둘 다 전장을 연상시킨다. 아니, 축구는 전장에서 태어난 스포츠다. 축구공으로 적군의 머리를 사용했다. 그 머리를 상대편에 되돌려주는 것(골인)이 미덕인 스포츠다.
럭비 역시 상대진영을 뺏어야(try)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진영을 뺏긴, 낙심하고 있는 상대선수들 머리 위로 컨버젼 골을 넣을 수 있는 서비스마저 부여한다. 어떻게 보면 잔인한 경기다.
100년이 지난 지금 축구는 월드스포츠가 됐다. 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월드컵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세계인의 축제다. 반면 럭비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나 즐기는 마이너 스포츠로 전락했다. 이유가 있다.
▲ 4월 7일 사이타마 구마가야 럭비경기장에서 열린 전국고교선발럭비대회 결승전. 시합에 나서기 전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학생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려 기합을 넣는다. ©幸田匠/jpnews | |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해(one for all, all for one)' 소설 '삼총사'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럭비인들이라면 누구나 즐겨 쓰는 말이라 한다. 그리고 이 짤막한 문장에 럭비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전후반 60분 내내 팀을 생각해야 한다. 자기가 밀리는 순간 모두가 밀린다. 그리고 모두는 '인골(in goal, h자 형태 골대 뒷편의 터치인 골라인 지역을 일컫는 말)'을 향해 하나가 되어 전력을 다해 부딪혀야 한다.
1야드를 전진하기 위해 모두가 합심해야 한다. 이 날 경기에서도 1야드를 위해 선수들이 떼로 뭉쳐 으쌰으쌰를 연발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처절한 원시성을, 몇 번이고 느꼈다.
럭비는 모두가 공격해야 한다. 그 공격도 신사적이어야 한다. 앞으로 가는 오버패스는 반칙이다. 공격진은 뒤로 패스해야 한다. 뒤로 패스하면서 조금씩 전진해 나가는 신사들의 스포츠다. 미식축구의, 걸출한 쿼터백과 러닝맨의 원투패스, 터치다운 등 관객을 몰입시키는 현란한 대중스포츠로서의 매력이, 럭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럭비는 지극히 전통적인 단체스포츠다. 조금씩 조금씩 상대방 진영을 힘겹게 전진하다가도 리턴 킥을 당하는 순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격이 다른 팀이 만나면 순식간에 점수가 벌어져 흥미가 반감된다. 관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오직 모두가 하나가 되어, 승리'만'를 위해 천천히 집요하게 전진해 나가는 스포츠가 럭비다. 팬 서비스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더 그렇다. 진흙에서 구른다. 유니폼은 금세 더러워지고 선수인지 머슴인지 분간도 안 간다. 현란한 기술과 미남, 미녀들이 난무하는 인기스포츠들과 럭비는 인연이 없다.
그런데 이게 가슴을 졸인다. 골이 들어간 것도 아닌 단순한 하반신 태클 하나에 박수가 터져 나온다. 상대방 진영으로 그냥 차 내는 리턴 킥에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낸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밀고 들어가거나, 혹은 스크럼(scrummage)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힘들게 방어하는 그 모습에 손을 모은 채 안절부절한다. 어떤 이는 내내 운다. 시합장에서 만난 조선학교 럭비부 ob 출신 재일동포가 이렇게 말한다.
"럭비는 말야. 해 보면 알아. 축구는 보면 즐겁잖아. 럭비는 해 봐야 그 맛을 알 수 있지. 그리고 보더라도 경기장에서 와서 한 번 보면 흥분할 수 밖에 없어. 느껴지거든. 우리 학교 아이들의 열정과 패기, 그리고 호흡이 말야." 우리 학교 아이? 그렇다. 1천여 관중을 웃고 울린 이번 결승전 시합은 재일동포들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시합이 돼 버렸다. 전국대회 결승전에 오사카 조선고급학교(오사카 조고)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상대는 히가시후쿠오카(東福岡) 고등학교.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강팀이다.
일본의 고교럭비대회는 크게 '후유노 하나조노(冬の花園)'로 불리는 전국고교럭비풋볼대회, 그리고 '하루노 구마가야(春の熊谷)'라 하는 전국고교선발럭비풋볼대회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1월 오사카 하나조노 경기장에서, 후자는 4월 사이타마 구마가야 경기장에서 열린다 하여 이런 별칭이 붙었다.
히가시후쿠오카는 07년 '하나조노'를 우승하면서 '디펜스의 히가시후쿠오카' 시대를 열었다. 09년 이 학교는 다시 '하나조노'과 '구마가야'를 석권해 명실상부한 챔피언이 됐고, 그들의 남색 유니폼은 어느샌가 전국 최강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반면 오사카 조고 럭비부는 동네 친구들로 구성된다. 초급부(초등학교) 때 부터 럭비공을 가지고 놀던 재일코리안 3, 4세 아이들이 그냥 그대로 중급부를 거쳐 고급부로 올라간다. 선수자원이 딸린다. 재정도 부족하다. 오직 헝그리 정신만으로 뭉친 팀이다. 시대를 풍미한 농구만화 '슬램덩크'를 예로 든다면, '산왕 vs 북산'이다.
하지만 오사카 조고는 올 겨울 돌풍을 일으켰다. <제이피뉴스>도 보도한 바 있지만 하나조노에서 전국 4강에 들어가는 기염을 토했다. 8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하나조노에 조선학교가 4강에 올랐다는 건 보통 사건이 아니다.
▲ 태클을 하기 위해 상대 선수를 따라가는 오사카 조고 학생들(스트라이프 유니폼) ©幸田匠/jpnews | |
그리고 봄의 구마가야다. 물론 이번 대회는, 대회명칭을 보면 알겠지만 '선발(選抜)'이 들어가 있다. 하나조노처럼 지역예선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전 대회에서 성적이 좋았던 32개 학교가 4팀씩 8개 그룹으로 갈라져, 여기서 1위를 차지한 8팀이 토너먼트를 치르는 방식이다.
오사카 조고 입장에서는 조슈게이코고, 죠슈고, 긴키대학부속고 등 강호들이 즐비한 오사카 지역예선을 치르지 않기 때문에 하나조노 보다는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럭비는 한 순간의 미스가 시합을 지배해 버린다고들 한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엔 더더욱 변수가 늘어난다.
"절대로 이기자!"
"처음 10분이 중요하다! 힘내자!"
"반드시 이기자! 꼭 이겨야 한다!" 12시 55분. 경기시작 5분전 오사카 조고 학생들이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가 서로의 가슴을 두드리며 열정적인 고함을 내 지른다. 반면 히가시후쿠오카는 쿨하다. 챔피언의 관록이 묻어난다. 그들은 소리 한 번 지르고, 묵묵히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가 각자의 포지션을 체크한다.
그 냉정함은 시합 개시 휘슬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결실을 맺었다. 전반 1분, 히가시후쿠오카 백스(bs, 포워드의 약간 뒷쪽, 양 옆에 늘어서는 런닝맨들)가 순식간에 트라이를 성공시킨다. 2점짜리 컨버젼 골, 그리고 곧바로 3점짜리 페널티 골도 터져 나온다.
개시 3분만에 10-0. 풀이 죽을 법도 한데 주장 김관태(3학년)가 선수가 외친다.
"고개를 들어! 밑을 쳐다보지마!" 그라운드 전체에 퍼지는 그의 호통에 보결선수들의 정신이 번쩍 든다. 반면 히가시후쿠오카가 갑자기 느슨해진다. 미즈가미 쇼타 주장은 시합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첫 트라이를 너무 쉽게 해버리는 바람에 상대에 대한 '리스펙트(경의)'를 잊어 버렸습니다." 상대가 '경의'를 잊는 순간 오사카 조고의 역습이 시작된다. 마치 히가시후쿠오카 득점 장면을 되풀이 하듯 똑같은 과정을 거쳐 10점을 획득한 오사카 조고는 그 여세를 몰아 트라이를 추가로 성공시킨다. 디펜스의 히가시후쿠오카를 완벽한 디펜스로 막아버리는 조고 학생들. 덩치만 본다면 어른 대 아이의 싸움이다.
하지만 왜소한 덩치만큼 폭발적인 스피드를 자랑한다. 김관태와 조성경이 중앙을 커버하면 양 사이드 백스(hb) 양정추와 에이스 박성기가 번개처럼 하반신 태클에 들어간다.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학생들의 과감하고 저돌적인 태클에 상대 선수들이 곤혹스러워 한다. 그 곤혹스러움은 관중들의 환호와 정확하게 비례한다.
"저 봐라. 조고 애들이 얼마나 빠른지. 원래 밑으로 태클 들어가는 건 위험하거든. 투지가 없으면 무서워서 못 들어가.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그냥 들어간다니까. 최고야, 최고."
▲ 후반초반까지 조고 선수들의 과감한 태클 전략이 빛을 발했다. ©幸田匠/jpnews | |
순식간에 점수가 벌어진다. 디펜스 럭비의 신개념을 창시했다는 평까지 듣고 있는 히가시후쿠오카 다니사키 감독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가 전략수정을 검토하던 후반 5분께 다시 트라이를 성공시키는 오사카 조고.
24대 10.
동네 럭비팀이 일본 최고의 강팀을 상대로 후반 13분까지 14점이나 리드하는 꿈같은 드라마가 연출된다. 같이 시합을 보던 일본 언론 기자가 주섬주섬 조고 선수들 명단을 꺼내 든다. 히가시후쿠오카 진영에 진을 치고 있던 카메라맨들도 하나 둘씩 이쪽으로 넘어 오더니만, 백넘버와 선수를 대조해 가며 자료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럭비부 출신 재일동포 응원단들은 절대 방심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히가시후쿠오카가 전략을 바꾸었어. 큰일났구만. 17분이나 남았는데 말야." 그랬다. 럭비를 처음 보는 필자 역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히가시후쿠오카는 후반 10분께까지 '백스'(hb, tb, fb 등으로 나뉨)를 이용한 패스, 러닝 공격을 펼쳤지만, 조고 선수들의 태클이 워낙 거세 결국 포워드가 스크럼을 짠 채 상대진영을 조금씩 밀고 들어가는 전략으로 바꾸었다.
히가시후쿠오카의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후반 14분과 17분 연이어 트라이를 성공시킨다. 13분을 남겨 놓고 24대 24. 시합의 흐름은 완벽하게 히가시후쿠오카 쪽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 흐름은 선수들의 끈질긴 인내, 그리고 도쿄중고급학교 학생들, 재일동포 응원단의 목청이 터져 나가는 응원으로 13분간 차단된다. 일진일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가 보다. 마지막 13분간 펼쳐진 두 학교의 공방전은 럭비라는 스포츠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줬다. 과장이 아니다. 대회 주최측 관계자조차 폐회선언시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결승전에 걸맞는 최고의 명승부를 연출해 준 양교 학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명승부를 펼칠 수 있게끔 성원을 보내주신 관중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승을 거둔 히가시후쿠오카는 물론이지만, 명승부의 또다른 주역 오사카 조고 학생 여러분들께도 경의를 표합니다." 히가시후쿠오카는 인저리타임에서 마지막 역습을 펼쳐 결국 31대 24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히가시후쿠오카 다니사키 감독은 오사카 조고의 인상을 묻는 내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 일본 최고의 강팀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조고 선수들 ©幸田匠/jpnews | |
"오사카 조고 최강 멤버들이 올해 3학년으로 올라왔다. 실제 시합에서도 디펜스, 특히 태클이 아주 강했다. 오사카 조고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히가시후쿠오카도 목표가 생긴 셈이다. 훌륭한 팀, 훌륭한 선수들이다." 립서비스가 아니다. 시합이 끝난 후 눈물을 흘리는 오사카 조고 학생들이 상대방에 인사를 하러 가자 다니사키 감독이 한 명, 한 명 어깨를 치며 격려한다. '열심히 해라, 우리도 더 열심히 할테니 겨울에 또 붙자'는, 라이벌에 대한 '리스펙트'가 느껴지는 격려다.
라이벌은 라이벌을 알아본다. 시합이 끝난 후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수많은 럭비시합을 봤다는 럭비부 출신 재일동포 선배들 조차 처음 보는 광경이라 한다. 오사카 조고와 히가시후쿠오카 선수, 스탭들이 골 앞에 모여 단체로 기념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나도 럭비 10년 했지만 이제 막 시합이 끝난 양팀 선수들이 한데 뭉쳐 기념사진을 찍는 건 본 적이 없어. 서로가 서로를 인정했다는 게 아니겠나? 그나저나 럭비는 참 멋진 스포츠야. 하하하." 졌지만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다. 시상식 때 눈물을 보였던 선수들도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고 있다. 관중들도 마찬가지다. 도쿄주조중고급학교 중급부 3학년에 재학중인 고영순 학생은 아직도 떨린단다.
"럭비 처음 봤는데 정말 흥분했습니다. 오늘 조고 선배들이 시합에서 보여준 것 만큼 저도 열심히 생활을 해야 겠구나 라고 다짐했습니다. 정말 멋진 시합 보여주신 선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실제 시합을 치른 오사카 조고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김관태 주장은 시합소감을 묻는 <제이피뉴스>의 단독취재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많은 동포 분들이 응원해 주실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치 하나조노 경기장에서 싸우는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오늘 비록 졌지만 다음에는 꼭 이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학교만 고교무상화 교육 대상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다들 기운이 빠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시합이 조금이나마 힘을 줬다면 그걸로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동포들을 위해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오영길 감독도 "지금 가진 실력을 전부 발휘했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시합자체는 베스트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실력을 발휘한 학생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감독으로선 이기고 싶지만, 학생들을 생각한다면 오늘 패배가 성장을 위한 좋은 약이 될 겁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열렬한 성원을 보내준 동포들께 감사드립니다. 오사카도 한번 오셔서 취재하십시오. 하하하." 후회없는 명승부란 이런 것 일테다. 지금 가진 기량을 전부 토해냈다. 오사카 조고 선수들, 스탭, 관중들은 하나로 뭉쳐 전진했다. 이 전진에 승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겨도 뒷맛이 좋지 않은 시합이 있고, 비록 지더라도 패자가 아닌 '주인공'으로 세간에 회자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축구의 '오렌지군단'도 그랬다. 역사는, 74년과 78년 월드컵의 주인공으로 독일이나 아르헨티나가 아닌 네덜란드를 먼저 떠올린다. 그와 비슷하다. 재일동포 스포츠의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역사가 단절되지만 않는다면 2010년 4월 7일 구마가야 결승전의 '주인공' 오사카 조고는 '전설'로 남을 것이다.
▲ 전국대회 준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오사카 조고 학생들. 대견하다. ©幸田匠/jpnew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