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다.
실력차가 컸다. 조직으로 개인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모래알 조직력일 것이라 봤던 아르헨티나의 조직력은 너무나 완벽했다. 그리고 그 강철같은 조직력은 역설적이게도 자유로워진 메시로부터 나왔다.
▲ 아르헨티나 전이 끝나고 피치 위를 걸어나오는 한국 선수들. ©마이데일리 제공 | |
메시는 '리베로'(자유인)였다.
좌우를 종횡무진했고 중앙을 돌파했다. 경기초반만 하더라도 박지성이 매치업을 담당했지만 도중에 관뒀다. 왜냐면 박지성이 한국의 사령관이기 때문이다. 사령관이 메시만 따라다닌다면 경기자체가 풀리지 않는다. 아무리 폐가 세 개라 하더라도 메시 마크에 수비조율에 공격까지 지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처음엔 전담마크맨이 한 명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김정우가 적절하리라 봤다. 02년 한국은 송종국이 루이스 피구를 지운 경험이 있다. 일본만 하더라도 나가토모가 에투를 지웠다. 그리스 전에선 차두리가 사마라스를 지웠다.
경기흐름과 아무런 상관없이 90분간 어떤 한 선수만 맡는다는 미션은 의외로 효과를 발휘한다. 그나마 체력이라면 한국도 자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메시는 차원이 달랐다. 아니 메시뿐만이 아니다. 테베즈도 최상의 컨디션을 보여줬다. 이과인은 이 둘이 수비수 몇 명을 달고 휘젓고 다닐 때 생겨난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됐다. 알면서도 못 막는다. 차라리 반칙이라도 하면 좋았겠지만 피지컬이 안된다.
오범석은 전반전 45분을 통해 스피드도 피지컬도 안된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럼 빼면 된다. 발재간이나 지능적 플레이로 안된다면 반칙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러니까 몸빵이라도 가능한 선수로 교대시키면 된다. 그렇다. 차두리를 왜 교체투입시키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차두리는 스피드도 있고 오버래핑도 되고 무엇보다 '몸빵'이 된다. 제껴지면 반칙으로 끊으면 된다. 세트피스는 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 신(神)'께 맡기고 말이다. 통계가 증명한다. 직접프리킥 찬스에서 들어간 슛이 별로 없다. 전반 메시가 잠깐 내주고 테베즈가 찼던 그 직접프리킥 슛도 공중에서 안 내려왔다.
어차피 펑펑 뚫릴거라면 반칙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피지컬을 갖춘 선수가 필요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마지막까지 오범석 선수를 교체하지 않았다. 물론 오범석도 열심히 뛰었다. 눈이 번쩍 띄는 오버래핑도 몇 번 했다. 하지만 사이드백은 어디까지나 수비수다.
오버래핑을 한 상태에서 세컨드 볼을 상대에 뺏기면 득달같이 돌아와 쪽수를 맞춰야 한다. 그게 안된다면, 지휘관은 국면전환을 위해서라도 교체해 줘야 한다.
박주영도 마찬가지다. 박주영은 헌신적으로 잘 싸웠다. 어차피 염기훈이 내려왔으니까 실질적인 원톱으로서의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기억은 영혼을 지배한다. 그는 지난 06년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스위스 전에서 '결과적'으로 통한의 실수를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런 큰 경기에서, 마치 4년전과 비슷한 상황에서 훨씬 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을 때 주위가 아무리 괜찮다고 격려해도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건 당연하다. 평상심이 유지되지 못한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이 독으로 작용될 수도 있다.
02년 미국전에서의 이을용 케이스와는 또 다르다. 이을용은 보란치였지만 박주영은 포워드, 그것도 원톱이다. 결정적 순간에 득점을 기록해야 할 이의 심리상태가 뒤죽박죽이 돼 버리면 상당한 타격이 온다. 실제 박주영은 후반 들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후반 약 20분간 펼쳐진, 그나마 백중세로 경기를 진행시켰을 때 박주영은 왼쪽으로 빠져있거나 중원 근처에서 머물렀다. 평소대로라면 골 에어리어 안쪽에 있어야 할 이가 그 주위를 어슬렁거린다면 심리적 충격이 컸다는 말이다. 지휘관이라면 이때 결단을 내려야 한다.
후반은 사실 시합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 들어갔어야 했다. 김남일의 선택은 괜찮았지만 김남일의 역할이 애매했다. 기성용을 대신해 들어갔으니 처음엔 선수비 후역습으로 가겠구나 생각했다.
아니면 메시 전담마크맨으로 진공청소기 김남일을 쓰겠다는 의지로도 읽혔고, 마스체라노에 의해 지워져버린 박지성 대신 역습시 공격기점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즉 김남일의 기용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포지션이 중복돼 버렸다.
김정우와 김남일이 좁은 공간에서 같이 있는 장면이 너무 많이 나왔다. 겹치다 보니 중원에서의 공격이 제대로 안 풀린다. 좌우 측면을 이용한 공격은 리스크가 너무 높다. 오버래핑해서 크로스를 올린다 하더라도 세컨드 볼이 아르헨티나로 넘어갔을 때 펼쳐질 소름끼치는 카운터 공격이 두렵기 때문이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무전술이면서도 완벽한 전술체계로 나왔다. 마스체라노가 박지성 지우개의 임무를 맡았고 공수조율은 로드리게즈가 했다. 더블보란치가 완벽하게 임무를 분담했고, 여기에 리베로 메시까지 간혹 가세했다. 아르헨티나가 중원을 지배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오늘같은 경기, 즉 마스체라노, 로드리게즈에 메시를 리베로로 두고, 이과인을 최전방에 포진시키며 테베즈가 상대 골 에어리어 근처를 유린하는 조직적인 스타일을 줄곧 고수할 수 있다면 아르헨티나는 아마 피파컵을 가져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팀을 어떻게 상대하나?
하지만 지는 게임이라도 져 가는 과정이 있는 법이다. 허정무 감독은 경기후 "1-4 패배가 선수들에게 좋은 약이 됐을 것"이라고 애써 충격을 감췄지만 너무나 완벽한 패배였기 때문에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이 더 컸다. 컸다? 그렇다. 컸을 뻔 했다.
신은 아직 한국을 버리진 않았다. 마지막 찬스를 줬다. 그리스가 나이지리아를 잡아 줄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라도 했던가.
마지막 최종전에서 아르헨티나가 그리스를 잡을 확률은 매우 높다. 예선통과가 결정된 상황에서 흔히 나오는 남미 특유의 손빼기 경기운영을 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메시는 나온다.
이유는 그가 아직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이번 월드컵을 메시의 대회로 부르고 있다. 몸상태야 어차피 최상인 메시다. 도무지 쓰러뜨릴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아직 골이 없다. 메시의 대회로 만들기 위해선, 그리고 결승 토너먼트를 위해서라도 메시가 골 맛을 느껴야 한다. 자블라니의 감각을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만드는 소화시키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또 테베즈와 이과인은 쉰다 치더라도 밀리토가 있으니 그리스로선 아르헨티나를 이기기 힘들테다. 그렇다면 나이지리아 전이 최대의 변수로 떠오른다. 그리스가 아르헨티나에 진다고 가정했을 때 한국은 나이지리아에 지는 순간 16강에 못 올라간다. 반면 무승부 이상만 하면 무조건 올라간다.
이건 그리스가 아르헨티나에 0-0으로 비길 경우에도 적용된다. 현재 b조는 골득실에서 한국 -1, 그리스 -1, 나이지리아 -2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가 아르헨티나에 지면 골득실이 -2이상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탈락한다.
하지만 한국 역시 나이지리아에 져버리게 되면 골득실에서 한국 -2. 나이지리아 -1 이상이 돼 역전된다. 즉 나이지리아로선 한국만 이기면 무조건 올라간다.
물론 객관적으로 본다면 한국이 훨씬 유리하다. 한국은 그리스 전에 출장했던 정예멤버가 다 나올 수 있다. 또 무승부 이상만 하면 된다. 반면 나이지리아는 퇴장과 부상, 경고누적으로 주전멤버 3명이 못 나오게 됐다.
한국은 또한 유럽에서 열린 친선시합에서 이번 월드컵 최고의 아프리카 팀인 코트디부아르를 상대로 2-0 완승을 거두는 등 아프리카 팀과 궁합이 좋다. 물론 나이지리아 골키퍼가 쉽게 넘을 수 없는 강철장벽이라는 게 걸리긴 하지만.
아무튼 한국으로선 그리스 전에서 보여줬던 제 실력만 발휘한다면 충분히 무승부 이상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의 패배는 빨리 잊어야 한다. 약으로 삼을 필요없다. 박지성은 박주영의 '눈물'을 '용기'로 바꿔줘라. 이운재는 정성룡을 격려하고 김남일은 김정우의 어깨를 토닥거리자. 이영표는 차두리와 함께 다시 양 사이드백의 연계플레이를 고민하자. 월드컵 4강을 경험한 베테랑들이 이럴 때 나서줘야 한다.
모든 운명은 23일 새벽 결판난다. 이젠 기원할 수 밖에 없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신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