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1면 톱으로 다룬 1941년 12월 9일자 아사히신문 ©jpnews | |
덴노(天皇, 일본 천황)의 전쟁책임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수정주의 사관의 역사학자, 일본 우익세력들은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발발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덴노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 전쟁을 서구열강에 맞서, 일본이 아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일으킨 방어적 평화전쟁이라 부른다. '대동아전쟁'이라는 단어를 즐겨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중립을 표방하는 일군의 역사학자들도 덴노의 전쟁책임에 대해선 한발 물러선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은 당시 내각에서 추인한 것으로 덴노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물론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 상륙한 미 점령군 역시 정치적 이유로 덴노의 전쟁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마스다 미야코 선생은 지난 6월 10일에 있었던 '변혁의 마소시에' 두번째 강좌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덴노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한 명"이라고 말한다.
마스다 선생은 지난 05년 수업시간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만든 후소샤판 역사교과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도쿄도 교육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받은 역사교사다. 그녀는 한국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지난 5월부터 한달에 한 번씩 도쿄 나카노에서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역사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마스다 선생은 첫 강의에서 시바 료타로가 쓴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을 중심으로 시바 사관(史観)이 새역모 역사교과서의 정신적 토대가 됐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약 한달만에 열린 두번째 강의 '아시아태평양전쟁'은, 당시 일본을 대표했던 덴노가 이 전쟁 즈음에 어떤 스탠스를 취했는지, 역사적 팩트(fact)를 중심으로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진행됐다.
실제 그녀는 자신의 이념이나 생각보다 '스기야마 메모'나 고미카와 준페이의 '어전회의' 등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강의를 진행했다.
'스기야마 메모'는 태평양전쟁 개전 때 참모총장직을 수행했었던 스기야마 겐(杉山元)이 남긴 기록으로 개전에 즈음해 열렸던 어전회의와 대본영 정부연락회의 등 주요 회의 내용이 그대로 담겨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특히 덴노가 참여한 어전회의 기록은, 당시의 상황이 숨김없이 묘사돼 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에 대해 덴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마스다 선생은 이번 강의의 출발연도를 1940년으로 잡았다. 보통 태평양전쟁을 다룬다면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부터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마스다 선생은 1940년 3월에 있었던 육군성부 합동회의에서 나온, 다음 방침이 태평양전쟁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고 말한다.
"올해(1940년) 안에 지나사변(중일전쟁)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즉 중국국민정부와 화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41년부터 자발적으로 철수해 43년까지 점령지역을 상하이 근처인 델타지역까지 축소시키자."(육군성부 합동회의) 이로부터 3개월 후 일본은 타이와 '우호화친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은 일종의 불가침 조약으로 '제1조-타이 영토를 침략하지 않는다. 제2조 - 타이의 중립정책을 존중한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효기간은 5년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곤란을 겪고 있어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상당부분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자 일본정부내의 주전세력들은 동맹국과 협력해 곤란을 타파하자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같은 해 9월 14일 나온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무상의 다음 발언이다.
"지금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지 아니면 영국, 미국 편에 설 지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독일은 영국을 지배하에 넣고 미국과 타협해 유럽 식민지에는 손대지 않을 것이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체결하면 대미관계가 악화돼 물자면에서 전쟁수행은 물론 국민생활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각각 이해관계가 있겠지만 미국과 맺을 경우 중일전쟁 처리에 있어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동아신질서(東亜新秩序)라는 우리의 꿈도 버려야 한다. 앞으로 50년간 영미에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이것을 과연 국민들이 용납하겠는가. 10만의 영령(청일, 중일전쟁에서 죽은 일본군 수 - 기자주)들이 만족하겠는가. (중략)
그러므로 미국과의 제휴는 생각할 수 없다. 독일, 이탈리아와 제휴하는 것 이외의 방도가 없다."(고미카와 준페이 '어전회의' 중에서) 같은 날 쇼와 덴노는 북부 인도차이나 점령 계획을 승인한다. 당시 인도차이나는 프랑스령으로, 이를 점령한다는 것은 곧 독일에게 잘 보이겠다는 말이다. 같은 달 27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군사동맹을 체결하면서 가상적국으로 미국과 소련을 설정한다. 이 때 쇼와 덴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결정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대해 더이상 손 쓸 방도가 없다면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하라다 구마오, '사이온지 공과 정국(西園寺公と政局) 중에서) 쇼와 덴노가 여기서 보여준 이런 류의 허가는, 태평양전쟁 기간동안 수차례 등장한다. 그는 같은 해 11월 15일 제국해군이 대미전(対米戦)을 위한 출사(出師)준비작업에 관한 상소를 올렸을 때도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는 지금 현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안심할 수 있겠지." 마스다 선생은 "쇼와 덴노는 군부의 누군가가 상소를 하면 그것을 거스른 적이 한번도 없었다"며 "좀 잘해보라는 식으로 언제나 승인허가를 내 줬고 때로는 자신이 큰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고 말한다. 큰 그림을 그려준 사례가 40년 11월 30일에 있었던 발언이다.
"남방문제는 신중하게 생각해라. 남방작전 계획은 완성됐는가?" 이 발언은 쇼와 덴노가 당시 육군참모장직을 맡고 있던 스기야마 겐에게 직접 하문한 것으로, 이 명령(?)을 받은 육군은 열흘 후인 12월 9일 '남진계획입안'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그리고 고노에 후미마로(近衞文麿) 수상은 1941년 2월 1일 남부 인도차이나 반도 및 타이 시책 요강을 쇼와 덴노에게 직접 상소한다.
"중일전쟁 처리를 중심으로 하는 외곽시책 및 제국의 필수자원확보라는 견지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타이와 군사, 정치, 경제에 관한 긴급결합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제국의 자존자위를 생각한다면 상당히 중요한 조치입니다. 이들에 적당한 위압을 가하는 와중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다면 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우리의 목적관철을 위해 필요합니다."
쇼와 덴노는 고노에 수상의 이런 상소를 승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입장에선 상대방의 약한 부분을 노려 요구를 관철시키는, 가령 화재가 난 집에 도둑질을 하는 것과 비슷한 행태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것 때문에 결과가 안 좋게 나온다면 재미없기 때문에 이 안은 승인한다. 하지만 실행에 있어서는 신중을 기하도록 해라."
결국 쇼와 덴노는 자기 입으로 남방계획을 작성하라고 명령한 후 올라온 내용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승인하긴 하는데 신중해라"라고 요구한 셈이다. 그런데 이 쇼와 덴노의 발언은 엄연한 국제법 위반행위다.
왜냐면 서두부분에 언급했듯이 일본은 타이와 우호화친조약을 맺었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비준서가 딸려 있는 엄연한 국제조약으로 제1조가 '일본은 타이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그런데 쇼와 덴노가 내리고 육군이 짠 이 남진계획을 둘러싸고 덴노와 수상이 "목적관철을 위해 타이에 무력 사용도 할 수 있다"라는 대화를 나눈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이 조약을 어기고 1941년 12월 8일 타이를 침공함).
41년 7월 2일 어전회의에서도 비슷한 문답이 나온다. 고노에 수상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일본군 주둔을 허가해 달라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우리 뜻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무력을 쓰겠다"고 말한다. '스기야마 메모'에 의하면 쇼와 덴노는 허가를 내리면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국제신의상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뭐 괜찮겠지." 쇼와 덴노의 이런 스탠스는 갈수록 호전적으로 변해간다. 기도 고이치(木戸幸一)가 남긴 '기도 일기'에 따르면, 41년 8월 1일 미국이 대일석유수출 전면금지 시책을 발표하자 쇼와 덴노는 11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미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단순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극히 중대한 결의를 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기도일기' 중에서) 쇼와 덴노가 언급한 극히 중대한 결의는, 물론 전쟁을 의미한다. 그리고 약 한달 후 '스기야마 메모'에 따르면,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결심하는 어전회의가 열리기 바로 전날(9월 5일) 사실은 쇼와 덴노와 군령부 총장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갔었다.
쇼와 덴노 : (큰 소리로) 절대로, 절대 이길 수 있는가.
군령부 총장 : '절대'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승산이 있다고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절대 이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반년, 혹은 1년간 평화로울 수 있어도 그 다음에 국난(国難)을 당한다면 안될 것입니다. 20년, 50년간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쇼와 덴노 : (큰 소리로) 그래? 알았다. 스기야마 메모 뿐만 아니라 '전사총서'(戦史叢書)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1941년 9월 6일 어전회의에서 쇼와 덴노가 주전파들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태평양전쟁을 승인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스기야마 메모와 전사총서를 보면, 이미 그 전날 쇼와 덴노가 참가한 회의가 열렸고 이미 이 자리에서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운명의 9월 6일 어전회의에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결정된다. 마스다 선생은 이 부분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녀의 비판을 들어보자.
"대본영 정부연락회의, 후에 최고전쟁지도회의로 격상되는 이 어전회의에 대해 후세 사가들은 보필대신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입헌군주인 쇼와 덴노가 어쩔 수 없이 그 의견에 따랐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명백한 사기행위다. 그 전날 이미 덴노의 승인이 떨어져 놓고 당일 덴노가 아무 말도 안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스기야마 참모총장 역시 '스기야마 메모'에 이런 귀절을 남겨 쇼와 덴노가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쇼와 덴노가 남긴 '사방이 바다다. 모두가 동포라고 생각하는데 왜 이런 풍파에 시달려야 하는지...'라는 글귀를 매일 되뇌인다."(스기야마 메모)
▲일본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내 건 선전포고문 전문 ©jpnews | |
마스다 선생은 이런 행위가 역사에 대한 모독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쇼와 덴노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당시 군국주의자들의 극성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어전회의'라는 명저를 남긴 작가 고미카와 준페이 씨도 이런 의견을 내 놓는다.
"발언하지 않는다는 쇼와 덴노가 이 날 이례적으로 시가(詩歌)를 읊었다. 즉 덴노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발언을 하려면 정확하게 했어야 한다. 쇼와 덴노는 시가 낭독을 통한 의사표시를 해서는 안된다. 시가는 감성적인 표현수단이다. 그야말로 국운이 걸린 중대사를 결정하는 순간에 그래서는 안된다.(중략) 만약 덴노가 전쟁에 반대했다면 '나는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그뿐이다." 그 외에도 '스기야마 메모' 등에는 쇼와 덴노가 진주만 공습, 말레 작전 등에 전술적으로도 깊이 관여했었다는 귀절이 나온다. 진주만 공습을 1개월여 앞둔 11월 2일 도조 히데키 수상과 쇼와 덴노가 나눈 대화다.(스기야마 메모에서 발췌)
쇼와 덴노 : 전쟁의 대의명분을 무엇으로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도조 수상 : 지금 목하 연구중에 있습니다. 빠른 시일내 상소를 올리겠습니다.
쇼와 덴노 : 해군은 어느 정도의 손해를 생각하고 있는가. 육군은 어떤가. 방공은 안전한가.
이 대화를 옆에서 지켜 본 스기야마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덴노가 마침내 결의하셨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했다." 그 다음 날 일본 육해군은 진주만 공습과 말레 공격 작전을 상소했다. 이 때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쇼와 덴노 : 말레는 기후관계를 봤을 때 어떠한가?
스기야마 : 말레는 기후로 본다면... 기습공격이 합당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쇼와 덴노 : 타이와의 외교교섭은 대의명분상 될 수 있는 한 빨리하는 것이 좋고 그에 따라 군의 기습은 늦춰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스기야마 :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결의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企図)가 폭로되며 또 지금 상황이 상당히 절박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외무측과 상담하겠습니다.
쇼와 덴노 : 해군은 언제 나가는가?
스기야마 : 8일입니다.
그리고 12월 1일, 진주만 공습을 일주일 남겨둔 시점에서 쇼와 덴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모쪼록 육해군은 잘 협력하도록." 스기야마 참모총장은 쇼와 덴노의 이 말을 듣고 "너무나도 고마운 말씀에 감격스러울 따름"이라며 "사력을 다해 장병을 지도해 덴노폐하의 걱정을 덜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윗 사례들을 보면 쇼와 덴노는 직접 일선에 나섰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전쟁의 대의명분을 뭘로 할 것인지부터 , 또한 외교교섭과 기습을 적절하게 고려하라고 말했으며, 육해군이 잘 협력해서 전쟁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일주일 후 진주만 기습공습으로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되고, 알다시피 1945년 8월 쇼와 덴노의 '옥음방송'을 끝으로 패전을 맞이하게 된다.
마스다 선생은 "쇼와 덴노는 개인적으로는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남겨진 기록물들을 찬찬히 본다면 전쟁을 막지 않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행한 부분마저 있다"며 이번 강의의 취지를 설명했다.
한국에서도 몇몇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거론하지 않는다. 근현대사를 전공했다면 스기야마 메모, 기도일기, 전사총서 등 일본에서도 태평양전쟁 당시의 상황을 밝혀내는 기본서로 유명한 이 기록서들을 모를 리가 없을텐데 말이다.
한편 마스다 선생의 다음 강의는 7월 8일 도쿄 나카노에서 저녁 6시 30분부터 두 시간 동안 열린다. 주제는 '대일본제국의 패배'로 강의료는 1천엔이다.
▲ 마스다 미야코 선생의 '역사강의'는 2011년 3월까지로 예정돼 있다. ©jpnews | |
■ 마스다 미야코 선생의 현대사강좌 기획취지 및 일정표 (일본어) <企画趣旨>
本年2010年は「韓国強制併合」から100年であり、日本国家は「侵略と植民地支配」の負の遺産を、真に清算することが求められている。しかし、中学・高校の大部分の学校では自国の近現代史の真実がきちんと教えられていないばかりか、むしろ「つくる会」系の扶桑社教科書や自由社教科書により、「日本の戦争は自衛の戦争・アジア解放の戦争だった」という「歴史偽造」が教えられてきている。
そして、この事実を中学生に教えた社会科教員が分限免職されても、一般のメディアは何の報道もしない、つまり、一般の人々にとってはそれが問題だとは感じられない、という現状がある。本講座では、資料・史料に基づいて歴史の真実を見ていき、なぜ「歴史偽造」が行われるのか、それは何を意味しているのかを、参加者全員でディスカッションしながら考え合いたい。
● 毎月第2木曜日18時30分~20時30分[5月13日開講]
●講座内容
【2010年】----------------------------------------
第 1回 5月 13日 『坂の上の雲』の歴史偽造
第 2回 6月 10日 アジア・太平洋戦争
第 3回 7月 8日 大日本帝国の敗北
第 4回 9月 9日 東京裁判と日本国憲法
第 5回 10月 14日 戦争責任を考える
第 6回 11月 11日 サンフランシスコ条約と安保条約
第 7回 12月 9日 安保改定とベトナム戦争
【2011年】----------------------------------------
第 8回 1月 13日 高度経済成長と世界
第 9回 2月 10日 冷戦後の世界と日本
第10回 3月 10日 昭和天皇の『全責任』発言の歴史偽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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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参加申し込み方法 予約の必要はありません。開始時間までに会場においでください。
●支払方法 受講料一括支払いは8000円。または毎回受講時に1000円ずつ支払い。 たいていの人は毎回来るたびに1000円ずつ支払っています。最初に郵便振替で8000円一括支払いはキツイという方は、こちらで、どうぞ!
●場所 協働センター・アソシエ 地図は
http://homepage3.nifty.com/associe-for-change/map.html東京都中野区中野2-23-1 ニューグリ-ンビル309号(中野駅南改札口1分 1階がドトールコーヒー) 電話 03-5342-1395 / FAX 03-6382-6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