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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패배하던 그 날 (상)
[기획] 마스다 미야코 역사강의 (3) - 대일본제국의 패배
 
박철현 기자
마스다 미야코의 역사강의(총10회) 중 세번째 테마 '대일본제국의 패배'에 관한 열띤 강의가 지난 8일 도쿄 나카노에서 열렸다.
 
전 중등교원인 마스다 씨는 후소샤판 새역모 교과서를 비판했다는 것과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를 학습교재로 사용했다는 등의 이유로 학교에서 징계를 받아, 현재 해직처분취소 재판을 벌이고 있다.
 
그녀는 한일병탄 100주년을 맞이해 10회에 걸친 현대사 역사강의를 지난 5월부터 한달에 한번 꼴로 진행해 왔다. 제이피뉴스는 이미 시바 료타로 사관(史観)의 문제점을 지적한 '언덕위의 구름의 역사위조'(1회)와 덴노(天皇, 천황)의 전쟁책임을 밝힌 '아시아 태평양 전쟁'(2화)를 다룬 바 있다.
 
■ 1회 : 새역모 교과서 '시바 료타료' 때문?!
■ 2회 : 태평양전쟁, 천황의 전쟁잭임을 묻다!
 
오늘은 그 세번째로 1943년 12월 1일에 있었던 카이로 회담부터 1945년 8월 15일 덴노의 항복선언(옥음방송)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짚어보도록 한다.
 
▲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히로히토 덴노의 항복선언문     ©jpnews/박철현
 
마스다 씨가 1943년을 기점으로 삼은 이유는 "일본이 이미 이때부터 싸우기 힘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월 1일 이 수세적 상태를 파멸적 상태로 몰고 간 상징적인 사건이 '카이로 선언'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날 연합국의 루즈벨트 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그리고 장제스 중화민국 주석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열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채택했다.
 
"3대 동맹국(미국, 영국, 중화민국)은 일본의 침략을 정지시키고 벌하기 위해 이번 전쟁을 속행하고 있다. 우리 동맹국은 자국을 위한 어떠한 이익도 요구하지 않고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도 없다. 
 
우리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호코도(澎湖島, 대만 서쪽 해상의 작은 섬들) 등 일본이 청나라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시키는 것에 있다."
 
카이로 선언문에는 한반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도 들어가 있다.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손을 떼야 할 것이다. 우리 3대 동맹국은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
 
이와 같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얻어내는데 있어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마스다 씨는 이 카이로 선언이 일본에 대한 '완전보복'을 의미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면서 이미 이 때 일본의 패배는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이 물적, 수적 열세로 인해 전쟁을 더이상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이런 선언문이 나왔다면 보통이라면 항복수순을 밟았어야 했다"라고 주장했다.
 
▲ 마스다 미야코 선생   ©jpnews/박철현
또한 그녀는 "만약 이 때 일본이 항복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와테 현이 편찬한 '원호의 기록'을 인용했다. 왜 이와테 현일까? 그녀의 말이 재밌다.
 
"정부자료 및 각 지방자치단체 자료를 아무리 뒤져봐도 41년 태평양전쟁 개시이래 사망자 집계를 산출한 자료가 없다. 유일하게 관련자료를 작성하고 있었던 지자체가 이와테 현이었다."
 
약 1년단위로 사망자 집계를 낸 이 자료는 1943년 이전과 1944년부터의 사망자 수가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1942년 1천 222명, 1943년 2천 582명이었던 사망자 수는 1944년 8천 681명으로 늘더니 1945년에는 1월 1일부터 8월 15일까지 무려 1만 3천 370명이 죽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부상후유증 등으로 4천 869명이 사망했다. 도합 3만 724명의 이와테 현 사망자 중 85% 이상이 1943년 이후에 죽어간 것이다.
 
마스다 씨는 "공식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는 이와테 현의 경우에 비추어 본다면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비율로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며 "이는 곧 43년에 항복선언을 했다면 85%에 달하는 목숨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본은 1944년 들어 항복은커녕 보다 처절한 공격방식을 선택해 최후까지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대표적인 것이 같은 해 2월 26일 해군 중앙부가 구레(呉) 해군공창어뢰실험부대에 내린 '인간특공어뢰 개발' 명령이다. 글자 그대로 '가미카제(神風, 특공부대)'의 수중판이다.
 
또 일본군은 3월부터 7월까지 약 4개월간 지속된 임팔 전투에서 전체 10만명 중 3만명이 죽고, 4만 5천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패를 겪으면서도 항복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같은 해 4월부터 '조선징병령'을 실시해 식민지 조선인 남성들을 무작위로 징발, 일본군으로서 미국과 맞서 싸우게 했다. 또 이 시기 군수품 공장 등에 징용돼 일을 하는 조선인 노무자들도 늘어났다. 당연히 조선인 희생자 수도 급속도로 증가했다.
 
당시 국제정황을 잠시 살펴보면 6월 6월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 불리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 사실상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패배는 시간문제로만 받아들여졌다. 15일에는 미국이 사이판을 상륙해 본토공격 채비에 들어간다.
 
사이판이 얼마나 중요한 거점이었는지는, 히로히토 덴노가 18일 도조 히데키에 말한 다음 내용만 보더라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사이판을 잃어버린다면 도쿄 공습도 심심찮게 일어날 것이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내지 않으면 안된다."(전사총서 중에서)
 
그러나 6월 19일과 20일 마리아나 제도에서 벌어진 미 해군과 제국해군과의 전투에서 일본해군은 궤멸적 패배를 당하고 일본이 자랑했던 연합함대는 사실상 소멸된다. 그런데 22일 작성된 '고노에 일기'(近衛日記, 고노에 후미마로가 작성한 일기)에는 덴노가의 전쟁책임을 둘러싼 미묘한 분위기가 읽혀진다. 
 
"히가시구니노미야(東久邇宮稔彦王, 황실의 일족으로 황실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됨. 육군대장-기자주)께서 말하길 상황이 나쁘게 된다면 모두 도조 히데키의 잘못이다. 모든 책임을 도조에게 씌우는 것이 좋다. 내각이 바뀐다면 책임소지가 불분명해져 마지막에 황실이 잘못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있다."
 
이 문헌에 의한다면 전쟁이 끝나기 1년전부터 이미 일본황실은 전쟁책임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7월 7일 제국국방권의 절대요충지로 받아들여졌던 사이판이 결국 함락하고 만다. 마스다 씨는 "이때 일본군 수비대 4만 3천명이 전멸하고 비전투원 1만명이 이른바 반자이 클리프를 행했다"고 말한다.
 
'반자이 클리프'는 사이판의 절벽(cliff)에서 '반자이'(만세)를 외치며 죽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미국은 1945년 한 해간 수없이 많은 희생자를 낸 미 폭격기 b29 공중폭격공습의 발판을 사이판에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일본 중앙부는 여전히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제국국방권의 절대권역인 사이판이 함락당했고, 유럽정세를 보더라도 독일과 이탈리아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육군 중앙부는 폭격기를 특별공격용으로, 즉 가미카제 특공이 가능하게끔 개조수리하는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또 8월 16일에는 해군이 가미카제 특공부대 오카(桜花)를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 오키나와에 상륙중인 미군
 
8월 10일 육군 군수성이 비밀보고를 통해 "우리의 모든 물적자원은 동났다"고 말했고, 10월에는 레이테 해전에서 대패배를 당했는데도 말이다. 일본이 전쟁수행능력이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 중요한 단초를, 10월 25일 해군 최초의 특공부대가 출동한 3일 후인 28일 덴노가 오이카와 군령부 총장에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하지만 잘 했다."('가미카제특별공격대' 중에서)
 
이 말은 덴노가 전쟁을 말릴 의사가 있기는커녕 자살공격대를 격려했다는 식으로 해석된다. '잘했다'는 덴노의 이 말 한마디가 '항복'이 아니라 본토공격을 대비한 방어전을 준비하게 했다는 식으로 분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며칠 지나지 않은 11월 5일 육군 특공돌격대도 두 부대로 나누어 출격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죽었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미군은 필리핀 루손 섬에 상륙했다. 본토결전이 임박해 왔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보급, 군수품이 바닥난 일본이 본토결전을 치룬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번씩 본토를 휩쓸고 지나가는 b29의 국지적 공습만으로도 일본은 버틸 수 없었다.
 
그러나 히로히토 덴노는 1월 19일 '금후 작전계획대강'을 재가했다. 이 작전계획대강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국본토를 확보하기 위해 미나미지시마(南千島), 오가사와라, 오키나와 이남을 황토방위를 위한 전연지대로 설정하고 극력 적의 출혈 소모를 꾀하며 적 항공기반 조영(造営)을 방해할 것."
 
이 작전계획대강은 흥미롭게도 공격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적 항공기반시설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본토결전을 늦추기 위한 것에 불과할 뿐 적극적인 공격의지라 볼 수 없다. 군수물자품 지원이 끊기고 3국 동맹도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방어계획만으로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비상식적인 작전계획대강이 버젓히 통과됐다.
 
어떻게든 막기만 한다면 무슨 수가 생긴다고 봤던 걸까? 하지만 이런 일본측의 간절한 바램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열린 얄타회담을 계기로 산산조각이 난다.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부가 모인 얄타회담은 흔히 나치 독일의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회담은 일본패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내용, 즉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것도 비밀리에 논의됐다.
 
소련은 이 회담에서 독일 항복선언 후 3개월 후 일본을 침공하며, 그 댓가로 사할린 지역과 치시마 열도를 제공받기로 했다. 당시 일본과 소련은 중립조약을 맺고 있었다. 소련이 중립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일본의 전쟁수행을 가능케했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고노에 수상은 덴노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린다. 내각, 군부, 황가 등의 유력 실력자가 공개적으로 항복을 권유한 것은 이 상소문이 최초라고 한다.
 
"패전은 유감이지만, 필연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국체(천황제)를 보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패전보다 더 두려운 것은 패전과 더불어 일어날지도 모르는 공산혁명에 있습니다. (중략) 따라서 국체보중의 입장을 따른다면 하루라도 빨리 패전종결의 방도를 찾으시는 것이 옳을 줄로 압니다."
 
고노에 수상의 이 상소는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다. 도조 등과 같은 군부 전쟁광과 전쟁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덴노와는 달리 고노에는 상대적으로 당시 전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상소를, 덴노는 다음과 같이 묵살한다.
 
"다시 한번 더 전과를 올리지 않는다면 (항복은) 좀처럼 어렵다."
 
덴노는 왜 이런 말을 했던 것일까? '호소카와 일기'(細川日記, 중앙공론문고)에는 당시 고노에 수상의 다음과 같은 회고가 실려 있다.
 
"폐하(히로히토 덴노)는 우메쓰 참모총장 및 해군이 대만에 적(미군)을 유도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때려잡을 수 있다고 말한 점과, 또 외교적 수단을 이용한다면 수가 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 듯 했다."
 
고노에의 이 회고가 사실이라면 덴노는 당시 상황을 백 퍼센트 오판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선 제국해군은 이미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테 해전을 통해 거의 궤멸된 상태였다. 또한 외교적 수단에의 호소는 소련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여지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소련은 이미 얄타회담을 통해 일본을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편 일본 최고 권력자의 상황오판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군은 3월 1일 이오지마(硫黄島)의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또 열흘 후인 3월 10일에는 도쿄대공습을 강행해 10만명(조선인 희생자 1만명)의 희생자가 났다. 특히 도쿄대공습의 충격은 일본 중앙부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충격은 3월 16일부터 시작된 '종전 시나리오' 작성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일본제국 패배하던 그 날의 재구성 '중' 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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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7/15 [19:50]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무슨 이글을 보면 마치 천황이... 그게.. 10/07/15 [20:17]
히틀러나 무솔리니 처럼 절대 통치자 같이 보여지네..
천황이 전쟁을 진두지휘 하는것 같은..

왜 히로히토가 전후에도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나? 수정 삭제
천황이 히틀러 처럼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절대자 였다면.. 그게. 10/07/15 [20:20]
일본 국민이 천황에게 얼마나 충성하든 ..그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든
상관없이 승전국측이 그를 무사하게 놔두지 않았을것이다.
그가 상징적 존재였다는 사실은 조금은 인정해야 한다.
그게 그가 목숨을 부지한 이유다. 수정 삭제
원폭 Nicholas 10/07/15 [20:55]
마스다 선생님의 강의가 있었군요. 그 당시 일본 내부의 일면을 살필 수가 있었습니다. 옆에 세계사를 펼쳐 놓고 일본이 그 당시 미국의 움직임(카이로 선언을 통해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를 논할 때만 해도 일본은 서구와 같이 아시아 식민지를 공유하는 입장)을 보고 이를 어떻게 분석했고 이에따라 어떻게 움직였는지 퍼즐을 맞춰보면 위의 이야기는 보다 흥미롭습니다. 가령, 1945년 7월 16일 원폭 실험의 성공으로 미국은 위에서 언급된 얄타회담에 기댈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이후 한국 전쟁 그리고 한일 협상, 등으로 이어지는 개별 역사와 세계사를 같이 보는 것이죠. 알다시피 세계사는 개별 역사를 검증하는데 용이하지만 현실에서는 마치 그림자와 같이 다뤄집니다. 따라서 익히 교과서에서 배운 제한되고 조건지워진 내용을 다시 고쳐 배우는데 위의 기사는 유용합니다. 수정 삭제
전범인 히로히토가 잘 먹고 잘 살다 죽었다. so cool 10/07/15 [22:25]
참 이거 ㅈ같은 일입니다. 수정 삭제
당시 천왕은 모든 권력의 중심 천황...일왕 10/07/16 [03:52]
천황이든 천왕이든 일왕이든 어찌되었든 당시 히로히토는 모든 권력의 중심이었습니다. 원수라고 표현하면 되겠군요. 통수권 통치권이 천황 밑에 있었으니까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신문기사에서도 히로히토가 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상징적 의미라니...참; 히로히토가 1989년도에 죽었을때 한국 일본대사관의 분양소가 하나 세워졌는데 거기에 한 유명인사가 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었죠. 김ㄷ중이라는 의원이 말이죠. 아마 딱 님과 같은 생각을 했을겁니다. 히로히토는 단순히 상징적 의미였고 책임이 없다라고. 수정 삭제
이거 재미있네요. 잘봤슴다. 10/07/16 [08:38]
도조 히데끼가 군사쿠데타 일으키고 난후, 히로이또는 어쩔수없이 따라갔던 흐름이 태평양전쟁끝까지 이어졌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 생각보단 히로이또가 그냥 상징적인게 아니고, 훨씬 전쟁의 중심이었다는 의심이 드는군요. 헐~ 수정 삭제
전후 전범재판에서 히로히토가 살아남은건 10/07/16 [18:41]
당시 히로히토가 상징적인 존재여서가 아니라 당시 연합국 최고 사령관이였던 맥아더의 정치적 판단 때문이다 당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호주의 강력한 반발도 있었고 검사선임에 관한 일화 같은것도 있고 그거에 관해 다룬 프로그램도 있고 좀 알아보고 댓글써라 수정 삭제
그게.. 이넘 ㅄ ㅉㅉ 10/07/16 [22:38]
ㅄ ㅉㅉ 수정 삭제
nhk 다큐멘타리 태평양전쟁 보고 이야기하세요 ㅁㅁㅁ 10/07/18 [10:51]
히로히토가 왜 책임이 없습니까?
대본영 수뇌부와 어전회의도 자주 했었고 열병식도 참여했었고
맥아더에 의해 인간선언(나는 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이다)을 해서
안 죽고 살아남았는데.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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