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경, 62살 촌로에게 고개 숙여... "진범이 아닌 사람을 기소, 복역시킨 것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의 뜻을 표한다. 당사자에게도 빠른 시일내에 무언가 조치를 취할 것이며, 신속한 재심을 통해 판결이 빨리 떨어질 수 있도록 적절하게 대응할 것을 고등 검찰청에 지시했다" (일 최고검찰청 공식기자회견, 이토 데쓰오 차장검사. 09/6/10) 지난 10일, 일본 최고검찰청(한국의 대검찰청)의 현직 차장검사가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최대 야당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전대표를 사임시켰고,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다 노보루 등 전현직 총리대신의 목까지 쳤던 일본 검찰. 지금도 그들이 '누군가'를 형사기소하면 그 '누군가'들은 99.9%의 확률로 '유죄'를 선고받는다. '절대권력'이라고까지 불리는 그들이 62살의 한 시골촌로에게 사죄한 것이다.
아무런 죄도 없던 스가야 도시카즈(菅家利和)는 45살에 형무소에 들어가 09년 6월 4일, 62살의 나이로 풀려날 때까지 17년 6개월간 형무소살이를 했다. 이 사건은 무대가 된 곳이 도치기현 아시카가(足利)인지라 흔히 '아시카가 사건'으로 불린다. 왜, 어떻게 스가야가 누명을 쓰고 17년이나 복역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도치기현 경찰의 조급함, 불행의 시작1990년 5월 아시카가시(市)의 한 파친코 가게에서 행방불명된 4살짜리 여자아이가 그 다음날 근처 하천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도치기현 지방경찰청(이하 '현경')은 1년 6개월 동안 180명의 경찰로 구성된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해 총력수사를 전개했다.
아시카가에서는 79년과 84년 비슷한 형태의 여아 살인사건이 일어나 미해결 상태로 있었다. 도치기 현경은 자신들의 실추된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만큼은 반드시 해결해야 된다는 의지에 충만해 있었다.
도치기 현경은 사건발생 직후 프로파일링(profiling) 작업을 통해 유치원 버스운전수였던 스가야 도시카즈가 파친코를 좋아하고, 혼자 살며, 다수의 av(어덜트비디오)를 소유하고 있는 점, 그리고 주변이웃의 탐문조사등을 종합해 그를 유력용의자로 보았다.
하지만 "스가야의 결백을 증명하는 모임"(이하 '모임')은 90년 5월부터 91년 8월까지 진행된 도치기 현경의 수사가 현대판 마녀사냥이라고 줄곧 지적해 왔다.
'모임'은 도치기 현경이 이미 스가야를 범인으로 상정해 놓고, 그것을 꿰어 맞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위의 '상황증거' 만으로 구속시키기 힘들다는 것 때문에 '유전자 감정'이라는, 당시로서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방법을 무리하게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과거 '모임'에 관여했었던 한 관계자는 jpnews의 취재에 "도치기 현경은 처음에 주로 탐문수사를 실시하면서 근처 주민들에게 '스가야씨 어떠냐?'는 유도질문을 종종 했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이 뭘 아나? 경찰이 그렇게 물어오면 그냥 '그러고 보니 눈매가 좀 그렇지', '거동이 수상하긴 하다', '아이들 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 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라고 답했다.
도치기 현경은 초기단계에서 스가야를 범인으로 상정, 그에 걸맞는 상황증거를 수집했지만 1년 3개월의 총력수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 없어 구속기소시키기가 힘든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치기 현경은 91년 8월, '유전자 감정'이라는 승부수를 들고 나왔고 이 감정결과를 토대로 91년 12월 스가야 도시카즈(당시 45세)를 기소하기에 이른다.
결정적 증거였던 "유전자(dna) 감정" 결과, 그러나...도치기 현경이 시도한, 아이가 입고 있던 티셔츠에 묻어있던 혈흔과 스가야의 유전자를 대조한 '유전자(dna) 감정'은 사실상 마지막 승부수이기도 했는데 이 유전자 감정에서 혈흔과 스가야의 유전자 염기배열이 일치해, 감정결과는 곧 "결정적인 증거"로 기능하게 된다.
▲ 무리하게 (나를) 범인으로 만들었어요. 그렇게 간단하게 용서할 문제가 아닙니다. - 6월 4일 석방된 스가야 도시카즈가 그날 저녁 8시 기자회견을 가진 자리에서 검경을 비판했다 © 니혼tv 캡쳐 | |
그런데 '모임' 및 변호단은 경찰이 유전자 감정을 실시한 91년 8월 당시의 유전자 감정이 얼마나 신빙성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유전자 감정은 전문가(사람)가 자신의 육안을 동원해 감정하는 방식으로 그 오차율이 300~1000분의 1에 달해 결정적인 증거보다는 참고자료로 활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도치기현 우쓰노미야 지검 역시 이런 점을 감안해 처음에는 유전자 감정 결과보다 스가야 본인의 범행 자백을 비중있게 보고 구속기소를 결정지은 것이다.
하지만 92년 2월 우쓰노미야 지방재판소(법원)의 첫 공판에서 범행사실을 인정한 스가야는 92년 12월 공판에서 범행사실을 부인하게 된다. 나중에 스가야는 "그때 경찰이 나를 취조하면서 자백을 강요해 왔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자백만 하면 금방 나갈 수 있다는 회유와 정신적 피로감에 지쳐 범행을 저질렀다고 허위자백한 것이다.
그렇지만 93년 7월, 1심 최후공판에서 무기징역이 떨어지자 바로 항소, 이후부터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그런데 2000년 7월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처음 구속사유였던 '자백'이 아닌, 'dna' 감정 일치 결과를 이유로 이 상고를 기각했다. 일본 재판 역사상 '유전자(dna) 감정' 결과가 단독으로 증거능력을 가지게 된 최초의 사례였다.
그 후 8년간 지루한 법정공방이 전개되었다. 02년 재심청구를 받은 우쓰노미야 지방재판소는 6년만인 08년 2월 재심 청구소송을 파기했다. 그러자 스가야측 변호단은 도쿄 고등재판소에 다시 항소했다. 변호단이 요구한 것은 오직 '유전자(dna) 재감정' 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니혼tv>의 스가야 누명 사건 특집 다큐멘터리 등 여론의 압력과 변호단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던 도쿄 고등재판소는, 08년 12월에서야 비로소 '유전자 재감정' 요구에 응했다. 17년만에 오차율 45억분의 1이라는 결정적 증거로서의 능력을 가진, 제대로 된 유전자 검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09년 5월 8일, 검찰과 변호단이 지정한 감정인 2명이 모두 "혈흔과 스가야의 유전자는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감정결과를 내렸다.
침묵하던 언론 일제히 스가야 사건 대서특필해다음날 9일 일본언론은 일제히 "dna는 다른 사람"(요미우리), "재심의 공산이 커졌다"(도쿄)등 스가야 사건의 결정적 증거였던 유전자(dna)가 일치하지 않았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평소 사법당국의 첩보를 잘 이용하는 <산케이> 조차 다음과 같은 해설을 통해 검찰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확립되지 않았던 과학감정을 '절대적 증거'로 남용해온 검경 당국 및 재판소의 인식, 그리고 그 자세에 문제는 과연 없었는지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또 피의자들의 재심청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검찰당국 스스로가 dna형을 재감정할 필요가 있는 사건은 빨리 실시해야 한다"(산케이, 2009년 5월 9일 조간)<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을 지낸 바 있는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는 <산케이>의 이러한 문제제기에 높은 평가를 내리면서 "일본의 언론은 수사중인 사건에 대한 사법당국의 프레스 릴리스를 그대로 소개하는 경향이 있어 필연적으로 검찰쪽 발언을 지지하게 되고, 당연히 이러한 누명(冤罪)사건은 언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사건만 하더라도 스가야가 체포된 91년 12월 3일, 보수성향의 <요미우리>는 "어려운 사건을 해결한 dna 감정"이라는 사설을 내어 놓았다. 진보성향의 <아사히> 역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 dna 감정"이라는 제목으로 검찰의 말을 지지했다.
이 말은 곧 검찰의 dna 감정 결과를 언론사들이 이렇다 할 검증없이 무책임하게 내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보도양태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었다.
아오키는 "한국도 그런 구석이 있지만 일본 역시 사건보도에 있어 좌우의 구분은 없다"면서 "결국 언론도 일종의 공범이었다"고 첨언했다.
제2, 제3의 스가야 사건이 나올 가능성도 있어한편 16일에는 이번 스가야 사건을 담당했던 도치기 현경의 이시가와 쇼이치로 본부장이 "17일 직접 스가야 씨를 찾아가 사죄한다"고 밝혀 관심을 모았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지난 10일에는 이미 검찰의 현직차장검사가 사죄의 뜻을 밝혔다.
일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며, 또한 검경이 일반 피의자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검찰관료'의 굴복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물론 그들이 고개를 숙였다고 해서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일본에는 현재 이러한 누명을 썼을지도 모르는 의혹사건, 즉 '엔자이(冤罪)' 사건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시카가 사건이 발생한 2년후 후쿠오카 이이즈카시에서 발생한 여아 2명 살해사건, 이른바 '이이즈카(飯塚)' 사건이다. 이 사건은 후쿠오카 현경이 94년 이이즈카에 살고 있던 구마 미치토시(56)을 체포했다.
아시카가 사건과 마찬가지로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구마 역시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상황증거'와 ' dna 감정'으로 사형을 구형했고 재판소는 최종적으로 사형판결을 내렸다.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dna 감정'. 과연 이 dna 감정은 완벽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사건은 영원한 미궁속으로 빠졌다. 왜냐면 08년 10월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dna 감정'이 아니더라도 '자백'에 의존하는 일본 검경의 수사방식은 많은 문제를 남고 있다.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62) 대표는 5월 27일 당수토론에서 "이런 '검찰조직'이야 말로 일본의 관료조직의 폐해를 상징적으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취조심문의 가시화(取調べの可視化)", 즉 취조심문의 전과정을 녹화, 보존하자는 제안을 했다. 자백을 최우선 증거로 치는 현재의 풍토를 조금이라도 없애보자는 말이다.
일본군 몰락이후 관료주의의 최정점에서 줄곧 군림해 왔던 일본 검찰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일본사회가 크게 요동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