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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구로사와 아키라의 궤적 (상)
완벽주의자는 오해, 그는 누구보다도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
 
박철현 기자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클린트 이스트우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앨런, 미야자키 하야오, 이마무라 쇼헤이…….  

이 감독들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분야와 장르와 시공간을 달리하는 이들 '고집쟁이' 거장들은 누구와도 비교되기를 싫어한다. 하지만 이들은 오직 한 사람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1910.3.23~1998.9.6) 앞에서는 옷깃을 여민다.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생전 모습   ©도호주식회사 제공 
 
스티븐 스필버그는 스스로를 '구로사와 칠드런'이라  말했고, '우나기'의 이마무라 쇼헤이는 구로사와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노노케히메'(원령공주)의 목표를 '7인의 사무라이'라 공언했다. '철도원'으로 유명한 기무라 다이사쿠 촬영감독은 현장에서 수시로 "구로사와 감독이었다면 어떻게 찍었을까?"를 생각했다.
 
서부극의 걸작 '황야의 7인'은 '7인의 사무라이'에서 모티브를 따 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서부극의 아이콘으로 만든 '황야의 요짐보(황야의 무법자)'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로사와의 '요짐보'를 허가없이 베낀 도작(盗作)이다. 조지 루카스는 구로사와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서 영감을 얻어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마주에 이르면 끝이 없다.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는 휘몰아치는 사막바람에서 시작되는데 이 장면은 구로사와 영화의 극한(왜 극한인지 나중에 설명)을 보여주는 '거미집의 성' 도입부의 안개를 본 딴 것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최대 걸작 '대부' 역시 도입부의 결혼식 장면을 구로사와의 '나쁜 녀석일수록 더 잘 잔다'에서 따 왔다. 
 
특히 스필버그와 루카스, 코폴라는 오마주만 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구로사와를 도와주기도 했다. 지금은 세계영화역사에 남을 걸작으로 손꼽히는 '가게무샤'이지만 80년 당시만 하더라도 구로사와 감독은 상당한 자금난에 휘말렸었다. 이 때 루카스와 코폴라는 선선히 투자금을 내 놓았고, 스필버그 역시 '꿈'의 제작비로 14억엔을 투자했다.
 
구로사와 영화는 중국, 러시아 등 헐리우드 이외의 감독에게도 숱한 영향을 끼쳤다. 영화평론가 니시무라 유이치로는 주간문춘 최신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세계적 흥행에 성공한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part2'의 마지막을 장식한 토니륭의 '누구도 이기지 못했다'는 대사는 '7인의 사무라이'의 마지막 대사 "이긴 것은 백성이다"에 대한 오마주라고 말했다. 또 니키타 미하일로프 감독은 자신의 최신작 '화내는 남자 12명'의 마지막 장면인 개가 인간의 팔을 물어뜯는 장면을 '요짐보'에서 따 왔다고 고백했다."
 
혹자는 구로사와 아키라를 알프레드 히치콕과 비교하지만 그 스케일과 장르에 있어 구로사와는 히치콕을 뛰어 넘는다. 히치콕이 정신심리, 스릴러, 미스테리 등을 전문으로 했다면 구로사와는 시대극, 추리극, 공포극, 전쟁물, 서스펜스, 스릴러, 일상극, 초현실주의 등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었다.
 
구로사와의 영화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먼저 초기 도호(東宝) 시대다. 1936년 스물 여섯의 나이로 p.c.l 영화제작소(이후 도호와 합병)에 입사한 구로사와는 시나리오를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 조감독 시절 짬을 내 작성한 '달마사의 독일인'은 당시로는 찾아보기 힘든 신선한 스토리와 구성으로 업계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일본근대영화의 초석을 일궜다는 평을 듣고 있는 이타미 만사쿠 감독 겸 각본가(이타미 주조의 부친)는 우연히 '달마사의 독일인' 첫 장을 넘겼다가 밤새 다 읽은 후 "구로사와가 앞으로 일본영화계를 짊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극찬을 했다.
 
이 시나리오가 업계의 인정을 받게 되자 도호는, 조감독으로 입사한 구로사와를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구로사와의 시나리오 작법은 철저한 스토리 위주로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캐릭터를 먼저 만들어 내야만 풀렸다고 한다. 즉 리얼리티가 충만한 캐릭터만 존재한다면 플롯은 이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나중에 그가 연출에 전념했을 때에도 도움이 됐다. 대표적인 예가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1954년, 도호)다. 이 작품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구로사와의 대표작이지만 사실 시나리오 단계에서 난항을 겪은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시나리오를 맡아 썼던 하시모토 시노부는 자신이 초안을 잡았던 '라쇼몽'(羅生門, 1950년, 도호, 베네치아영화제 금사자상 수상) 이후 구로사와 군단에 합류한 젊은 각본가로 이후 여덟편의 각본을 담당했다. 그런데 그는 가장 힘들었던 작품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꼽는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이키루(生きる, 52년, 도호, 베를린영화제 특별상)를 완성시킨 다음 구로사와 감독님과 둘이서 다음 작품을 논의했는데 사무라이를 한번 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지요. 그래서 '사무라이의 하루', '일본검호열전' 등의 기획을 짜다가 후자의 이름으로 된 시나리오 원고를 들고 감독님 댁으로 갔습니다. 감독님은 미동도 안 하고 그 긴 원고를 다 읽으시더니만 '휴...'라는 한숨을 내 쉬는 겁니다."
 
그러면서 구로사와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하시모토 군, 그런데 말야. 대체 '무사수행'(武士修行)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허를 찔린 하시모토는 바로 도호문예부에 연락해 무사수행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자기 자신도 역사자료를 뒤적였다. 그 후 무사수행 중인 사무라이는 도장이나 사원 등이 제공하는 잠자리와 음식으로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내용을 구로사와 감독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구로사와 감독은 "맨날 그러고는 먹고 살 수 없잖아? 도장, 사원에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는 거지?"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고 한다.
 
다시 자료를 살펴본 하시모토는 "무로마치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무사수행이 활발했는데 수행을 하지 않을 때는 해적, 산적의 침입을 막아주는 마을의 파수꾼 역할로 농민들에게 기용됐다"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구로사와 감독은 감았던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럼 이야기가 풀리는군."
 
이 에피소드를 통해 구로사와 감독이 얼마나 리얼한 스토리를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스토리에 뭔가 석연치 않는 구석이 발견될 경우 절대 일을 진행시키지 않았다. 반면 자신이 그 스토리를 납득했을 경우에는 순식간에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
 
당연히 하시모토가 처음 작성했던 '일본검호열전'이 송두리채 파기됐고 새로운 300장짜리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구로사와의 걸작 '7인의 사무라이'는 이렇게 태어났다. 또 이 무사수행 에피소드는 '요짐보(用心棒, 61년, 도호=구로사와 프로)나 '쓰바키산쥬로(椿三十郎, 62년, 도호=구로사와 프로)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구로사와는 도호시절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도호시스템에 걸맞는 지독한 훈련이었고 또 하나는 사람이었다.
 
▲ 한국에서도 구로사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각종 이벤트가 열리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구로사와를 시대극의 달인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그는 출세작인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를 비롯해 거미집의 성, 가게무샤, 숨은 요새의 세 악인, 쓰바키산쥬로, 요짐보 등 전국시대 및 사무라이를 등장시킨 작품들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초기 도호시절 '가장 아름답게', '내 청춘에 후회없다', '아름다운 일요일', '취한 천사', '들개' 등과 같은 주옥같은 사회파 휴먼드라마를 만들기도 했다. 특히 '들개'(野良犬, 49년, 신도호=영화예술협회)는 형사물 버디무비의 장르성을 창출해 냄과 동시에 사회비판 블랙유머의 요소를 적재적소에 넣은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작가 아사다 지로의 평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아사다 지로는 "라쇼몽 이후의 대작들이 아닌 구로사와 초기의 흑백영화들에서 청년 구로사와의 진정한 색깔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구로사와 초기작 중에서도 '들개'를 가장 첫 손에 꼽으며 그 매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신참 형사(미후네 도시로)가 자신이 소매치기 당한 총 때문에 강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또 다른 베테랑 형사(시무라 다카시)와 함께 그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단순한 줄거리지만 이 작품에는 계절적 배경이 된 여름의 뜨거움과 습도, 종전직후 일본사회의 무질서한 에너지가 스크린 전면에 투사된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농밀한 인간 드라마의 묘사에 숨이 막힌다."

 
즉 구로사와는 이 시절에 배웠고 만들었던 작품들을 통해 지독한 연습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이 시기 자신의 영화적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郎)를 만났다.
 
구로사와가 미후네를 만난 일화도 재미있다. 원래 미후네는 도호의 신인배우 모집에 떨어졌었지만 구로사와가 이 모집선고에 우연히 참여했다가 미후네를 보고 한 눈에 반했다.
 
구로사와는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에게 "저 미후네라는 배우는 꼭 채용해야 한다"고 간절히 요청했다고 한다. 웬만해서는 원칙을 지키는 야마모토 감독이었지만, 구로사와가 자신의 조감독을 하면서 보여준 재능을 인정했던지라 선선히 그를 합격시켰다.
 
미후네는 이후 구로사와 작품 16편에 주연급으로 출연한다. 구로사와 감독이 31편의 작품을 만든 것을 감안한다면 절반이상에 등장한 셈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자신과 미후네의 관계에 대해 "미후네 군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그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고 까지 말했고, 이 발언을 접한 일본 매스컴은 "구로사와 없이는 미후네도 없고, 미후네 없이는 구로사와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카피를 남기기도 했다.
 
결국 구로사와 감독은 도호의 경험을 통해 수많은 자산을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도호가 이른바 '도호쟁의'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자 영화제작을 못하게 된 구로사와, 야마모토, 나루세 미키오 등은 1948년 도호를 탈퇴해 영화예술협회를 만든다.
 
도호쟁의는 노동자 권리를 주장한 사회주의 색채를 띠는 노조와 도호관리자들이 충돌한 대규모 노동쟁의로 미군까지 중재에 개입해 일대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았던 구로사와는 오직 영화를 만들고 싶어 영화예술협회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전환점이 됐다.
 
1950년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라쇼몽'은 영화예술협회 시절 구상한 작품으로 다이에이(大映)가 제작비를 댔다. 그런데 구로사와가 도호에 계속 있었다면 이 작품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이유는 사회파 휴먼드라마 등 현대물에 치중했던 도호의 스타일과 구로사와 자신이 도호에 고용된 직업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즉 기획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 구로사와 감독의 출세작 '라쇼몽'  
실제 구로사와도 "존경하는 선배들과 함께 했던 영화예술협회에서의 작업은 내 상상력을 넓혀줬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기획된 '라쇼몽'은 구로사와, 아니 일본영화사에게도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특유의 갑갑하고도 몽환적인 분위기와 각각의 캐릭터를 살림과 동시에 편집의 묘미를 절묘하게 나타낸 이 작품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동명소설에서 소재를 차용했으면서도 원작과 전혀 다른 느낌을 창출해 냈다.
 
특히 등장 캐릭터들의 대립하는 시점에 따른 각각 다른 이야기 전개는 그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구성으로 이후 쿠엔틴 타란티노 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 작품은 51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금사자상(대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다. 
 
오죽하면 배급회사였던 다이에이의 나가타 사장이 구로사와에게 "이거 대체 뭔 내용이야? 뭘 이리 꼬아 놓은 거야"라고 불평을 늘어놨을까.(이 사건 이후 구로사와는 다이에이와 작업하지 않았다.)
 
아무튼 '라쇼몽'의 히트 이후 구로사와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고전들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고 그것들을 충실히 작품에 반영시켜 나갔다. 또 라쇼몽의 성공 이후 도호도 다시 구로사와에 손을 뻗었다.
 
구로사와의 도호 복귀작은 지금도 휴먼드라마의 최대 걸작으로 불리는 '이키루(生きる, 52년, 도호)였다. '이키루'는 직역하면 '산다', '살아간다', '삶'을 의미한다.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말년 공무원이 죽음을 선고받은 후 남은 여생을 보내는 방법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만든다.
 
구로사와는 이 작품의 모티브를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일리치의 죽음'에서 따왔다. 실제 그가 직접 쓴 각본을 보면 이 소설의 대사들이 깨알같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로사와는 라쇼몽이 그랬던 것처럼 '이반일리치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리얼리즘과 페이소스를 집어 넣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구로사와 현대극의 걸작으로 불리게 됨과 동시에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둔다. 도호는 돌아온 구로사와 아키라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다.
 
미후네 도시로와 도호의 전폭적인 지원, 원숙의 경지에 들어선 구로사와의 연출력.
 
이 세 가지가 절묘하게 결합되면서 전세계 영화인들은 동양의 천재 구로사와를 주목한다. 그리고 구로사와는 이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7인의 사무라이, 살아남은 자의 기록, 거미집의 성, 밑바닥, 숨은 요새의 세 악인, 나쁜 녀석일수록 잘 잔다, 요짐보, 쓰바키산쥬로, 천국과 지옥, 붉은 수염 등 구로사와의 중기 걸작은 전부 이 시기에 탄생했으니까.
 
■ 천재 구로사와 아키라의 궤적(하)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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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8/11 [09:02]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확인을 하세요. 독자 10/08/11 [10:58]
황야의 7인과 클린트 이스트웃드는 아무 상관없음.
클린트의 작품은 황야의 무법자임.
도데체 확인을 하는겁니까? 수정 삭제
수정했습니다. 편집부 10/08/11 [11:07]
황야의 7인과 황야의 요짐보(무법자)를 착각했습니다. 수정했습니다. 수정 삭제
구로사와 아키라 Nicholas 10/08/11 [12:50]
최근에 구로사와 아키라, 오시마 나기사의 회고전이 있었는데 관련 내용을 읽게 되니 좋네요. 그런데 그 시절 구로사와 감독은 일본 군국주의나 천황제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바라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수정 삭제
좋은 기사 잘 봤습니다. 익명독자 10/08/11 [14:28]
전세계 영화사상 그 누구보다 가장 위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분입니다. 라쇼몽을 처음 극장에서 봤을때 그 시대에 이런영화를... 하며 감탄과 동시에 질투, 열등감... 그러나 이네 한없는 존경심이 떠오르던 기억이 나네요... 굳이 영화 학도들이 아니라도 영화를 조금이라도 좋아하신다면 구로자와 감독의 모든 작품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성을 떠나서 정말 '재밌거든요' :) 전세계 모든 감독들, 특히 헐리우드 감독들은 이 사람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예전 아카데미 시상식때 1초정도 얼굴만 지니가는데도 수많은 스타들이 일제히 기립하여 환호하는 모습은 그의 위상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그의 명성에서 80정도는 구로자와 감독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수정 삭제
기자님 거위의꿈 10/08/11 [16:31]
엔카의 여왕...미소라 히바리의 얘기도 해주실 수 있나요 ?

또는 한국계로 알려진 엔카 가수들의 취재가 가능한가요 ?

아니면 한국계로 알려진 예능인들의 전체 기사 ? 수정 삭제
7인의 사무라이,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잘봤습니다 10/08/11 [16:43]
어려서 황야의 7인을 재미있게 봤었는데 우연히 본 7인의 사무라이는 앞의 영화보다 무지 앞섰더군요. 전국시대의 적나라한 농촌사회와 격렬한 장면 전개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에 남습니다. 훗날 무사에서 안성기씨가 활을 쏘는 장면을 보며 7인의 사무라이에 나온 기마 궁사를 흉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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