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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집 가다가 일본 헌병에게 끌려갔다"
[현장] 종군위안부, 강제징용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증언 (2)
 
박철현 기자
▲ 22일 도쿄 도시마 공회당에서 열린 한일시민공동선언대회     ©jpnews/야마모토 히로키 
 
22일, '한국강제병합 100년 한일시민공동선언 일본대회 - 식민지주의의 청산과 평화로운 미래를'이 도쿄 도시마 공회당에서 열렸다.
 
1000명의 청중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 대회는 식민지시대의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친구집에 놀러가다가 조선인 브로커와 일본 헌병들에게 납치됐다는 한 할머니(87)는 "자기는 숨어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얼굴과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부탁한 후 자신의 기억을 담담하게 털어 놓았다.
 
1923년 원산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45년 광복과 더불어 고향에 귀국했지만 위안부 경험이 밝혀지는 바람에 평생 힘들게 살아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금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나는 조용히 살다 죽을 거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이 운동 하시는 분들께 여러분들께서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몇번이고 당부했다.
 
다음은 할머니의 증언과 육성고백이다. 
 
"나는 조선 평안남도 원산시에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역앞에서 큰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여관을 하고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던 도중 조선인 한 명과 일본인 헌병이 '너, 여기로 와 봐'라고 하더니 그 자리에서 납치돼 일본인이 살고 있던 집으로 연행됐다.
 
다음 날 밤 그 헌병이 나를 끌고 가서 기차에 태웠다. 도착한 곳은 중국 만주의 산이었다. 나는 그 곳의 위안소에 감금됐다. 위안소는 짚으로 만든 지붕으로 된 집이었고, 마루에는 멍석이 깔려 있었다. 난방은 없었다. 벽에는 베니어판 같은 것이 있었다. 작은 방이었는데 창문은 없었고, 출입구가 하나 있었다.

 
위안소는 복도를 끼고 양쪽에 작은 방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같이 끌려온 조선인 여성이 15명 정도 있었다. 위안소에는 전부 20명 정도의 조선인 여성이 있었다. 일본인 위안부는 없었다. 위안소를 관리하고 있던 중년의 '오카상(엄마)'이라고 불리는 여성은 일본인 여성이었다.
 
나는 여기서 '사나에'라고 불리웠다. 성병 검사는 위안소 근처의 병원에서 조선인 의사가 행하고 있었다. 또 위안소에 있었던 동안에는 병사들은 물론 '오카상'으로부터 돈이나 티켓같은 것을 받은 적은 없었다.
 
반항을 하거나 저항할 때 단검에 찔리거나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힘들었고 한번 도망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 때 맞은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단검에 찔린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술을 마셔야만 겨우 잠을 잘 수 있다.
 
그러던 어떤 날 방송이 흘러 나왔다. 삐라가 뿌려졌고 위안소의 '오카상'이 '빨리 피난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이유도 모른 채 입고 있던 복장 그대로 피난을 떠났다. 풀숲에 숨고 진흙탕을 건너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그러던 도중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귀국에는 2개월 정도 걸렸다.
 
귀국하던 화물열차 안에서 동생을 만났다.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확인했다. 역시 여동생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여동생도 위안부로 강제연행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동생은 6남 6녀 중에서 가장 귀여웠고, 또 예뻤다. 여동생과 나는 우리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타인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약속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여동생을 화물열차안에서 만났을 때는 내 자신의 그것보다 더 큰 슬픔이 밀려왔다. 괴로웠다.
 
아버지는 우리 둘이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둘이나 잡혀 위안소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고통을 아버지는 견디지 못했다. 매일같이 술에 빠져 지내시다가 4일후 너무나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는 돌아왔지만 우리 삶은 매우 힘들었다. 여동생은 매일같이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나는 원산의 한 남성과 결혼했지만 그도 일본군의 위안소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기고 있던 과거를 들키면 어떡하나 하고 매일같이 불안한 심정으로 보내야만 했다.
 
위안소에서는 일본군이 임신을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주사를 놓는데 그 영향으로 나는 아이를 못 낳는 몸이 됐다. 하지만 어느 겨울날 길거리에 버려져 있던, 죽기 일보 직전의 아기를 발견해 우리 양자로 삼고 키웠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던 도중 60년대 후반 우연찮게 위안소 생활을 같이 했던 한 여성을 시장에서 재회, 그 때 남편은 내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눈치채 버렸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부산으로 피난갔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원산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위안부 사실이 발각됐다. 우리 결혼생활은 파탄났고, 남편은 내 곁을 떠났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내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못했다. 나를 공격했다. 그래서 이혼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혼을 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남편은 죽었고 나는 양자를 혼자서 열심히 키웠다. 아들은 좋은 청년으로 자라 결혼했다. 아들도 며느리가 정말 잘해줬기 때문에 나 역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수요집회도 잘 안나가고 그냥 혼자서 조용히 살아가는 노파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 할머니들도 많다. 부디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도 이들에게 힘을 주길 바란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더욱 필요하다. 잘 부탁한다."

 
▲ 아소광업서 2년 7개월간 강제노동한 공재수 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할머니에 이어 두번째 증언자로 나선 공재수 씨는 강제징용된 이후 후쿠오카 아소광업(아소 다로 전 총리 집안이 운영하는 광업회사) 쓰나와케광업소 아카사카탄광에서 하루 열 몇 시간씩 노동해야 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경기도 양주군 출신인 그는 1943년 1월 소집영장을 받고 2월 1일 양주군 내의 다른 이들 119명과 함께 양주부대로 편성된다. 의정부를 출발한 그들은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에 도착, 이후 규슈 이즈카(飯塚)의 아소광업에 배속받았다. 다음은 그가 고백하는 고통스러운 강제노동의 기억이다.
 
"채탄부로 배속받고 2주간 갱도내에서 작업했다. 이후 6개월간 계속 채탄부로 있었는데 침식, 작업 등 모든 것에 적응을 못했다. 동료 3명과 함께 탈출을 기도했다. 산을 타고 3일간 걸어서 도망쳤다.
 
마을에 내려가서 농작업을 도와줄테니 밥만 먹여달라고 요구했다. 마을 사람들이 쾌히 승락하면서 '오후에 사람이 온다'라고 말해 기다리고 있었지만 순사들이 와 그 후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고 다시 탄광으로 돌려 보내졌다.
 
도착하니 밤이었다. 사무소의 노무원들이 죽봉으로 우리를 때리는 등 참기 힘든 고문을 당했다. 엉덩이, 발, 얼굴 등 몸 전체를 닥치는 대로 때렸다. 화장실에 가서도 앉지 못할 정도로 육제적 고통이 엄청났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고문이었다.
 
그 후 다시 사무실에 불려가 도망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다시 갱도 안으로 들어가 채탄작업을 했다. 그러나 식사는 곡물 한 알도 들어가 있지 않은, 죽순이 조금 들어간 밥이었고 항상 배가 고팠다.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때 인접해 있던 비행장에서 노역일을 하면 백미 밥을 한 그릇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 돌아 다시 도망쳤다가 또 잡혔고 고문을 당했다.
 
그 와중에 소식이 끊어진 조선에서 같이 연행돼 온 젊은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나는 그 이후 모든 것을 단념한 채 인간 이하의 노예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중략)
 
1943년 1월 아침 갱도내에 들어가기 직전 소장의 훈시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소장이 나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만 갑자기 이마를 때리고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그 때문에 당분간 귀가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슬퍼 소리내 울었다. 아무런 이유없이 맞았으니까. 이렇게 맞고 있는 나를 보고 있던 노무자들이 '왜 때리냐'고 항의했다.
 
그러자 소장은 '내가 연설을 하고 있는데 저 녀석이 웃었다'라고 말했다. 우리 부대원들이 '원래 야마다(공 씨의 통명)는 웃는 얼굴'이라고 말하자 소장은 그냥 자리를 떠 버렸다. 그 후 사토 부소장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몰라도 나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해 줬다.
 
1944년 4월에는 전염병이 창궐했다. 같이 있던 동료조선인 수백명이 이즈카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 같다. 이 병원은 침대도 없이 창고 바닥에 다다미를 깔았을 뿐인 말만 병원인 곳이다. 겨우 수 개월여만에 많은 동료를 읽은 우리들은 다리에 힘도 없어 질질 끌면서 겨우 계단을 올라 갈 수 있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이런 생활을 몇 개월이나 지속했다. 머리카락도 다 빠졌다. 그러던 중 나는 운 좋게 좋은 간호사를 만나 우유, 부식을 탈 수 있어 몸도 어느정도 회복됐다. 퇴원한 후 간호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다시 찾았는데 그 간호사가 전염병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너무나 슬펐다.
 
1945년부터는 미군의 공습이 활발해졌다. 매일같이 각종 전투기 폭격기가 날아 다녔다. 우리 생활도 더욱 악화돼 열창, 전염병, 영양실조 등이 만연했다. 인간이라기 보다 동물같은 삶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공격이 가속화되면 될수록 갱도내의 작업시간과 채탄량은 더욱 늘어나 급기야 제한량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날 할당된 양을 전부 채탄해야만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식사를 마친후 갱도내에 들어가 작업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와 식사하고 목욕을 끝내면 보통 밤 11시~12시였다. 이런 생활이 당분간 지속됐다.
 
1945년 8월 15일. 식사를 하고 있는데 사무소의 노무직원이 '오늘 정오에 일본천황이 중대한 발표를 한다니까 광장에 모여라'라고 말했다. 모두 모여서 천황이 직접 낭독하는 항복연설을 들었다. 하지만 그 연설을 들은 후 우리들은 다시 갱도내로 들어가 작업했다.
 
1945년 8월 30일 아침, 연합군이 탄광을 접수했다. 우리들은 귀국준비를 해 기숙사를 출발했다. 나가사키에서 하카타로 가 어선 2척에 약 700명이 탔다. 부산으로 가던 도중 쓰시마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인 선주는 '부산으로 가면 내 배를 뺏길 우려가 있다'면서 부산으로 못 가겠다고 했다. 쓰시마에서 결국 1주일간 머물렀다. 쓰시마 주민들이 숨겨놓은 고구마 등을 먹으며서 버텼지만 도무지 참을 수 없어 배에 올라타 부산으로 가자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2년 7개월만에 조국 땅에 도착했다.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내 조국, 내 땅이여."

▲ '관동대지진 진상규명이 급선무'라고 주장한 다카하시 노부코 씨 ©jpnews
 
공 씨의 발언이 끝난 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진상을 규명하여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시민의 모임'의 다카하시 노부코 씨의 발언이 이어졌다.
 
다카하시 씨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직후 자행된 조선인학살을 제노사이드(인종청소)로 규정하면서 당시 희생당한 조선인들의 명예회복이야 말로 식민지주의의 청산이라고 주장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에 대한 학살사건, 그 중에서도 조선인 학살을 일본식 제노사이드의 예로 들고 싶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정치적 미해결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일본 및 한국, 국제연합 인권이사회에 계속적으로 호소해 나갈 계획이다.
 
현재까지 일본정부는 학살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일관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사건을 은폐하고 있으며, 피해자 및 그 유족들에 대한 사죄나 보상도 일절 행하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사건의 조사 및 추도를 해 온 사람들은 재일한국・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이었다.
 
일본변호사연합회는 피해자 유족들의 신청을 받아 사건을 조사, 2003년 일본정부에 대해 조선인 중국인 피해자와 그 유족들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하며, 또한 학살의 진상과 원인을 규명하라고 권고하고 있지만 정부는 이 권고를 무시하고 있다."
 
다카하시 씨는 관동대지진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관동대지진은 요코하마와 도쿄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고 10만 5천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하지만 이 때 지진에 의한 희생자와는 별도로 일본의 군대, 경찰 등 국가권력과 일본인 민중들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들의 수도 상당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조선땅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3.1 독립운동이었다. 이 독립운동의 여파는 대단했다.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을 탄압했고 경계를 강화시켰다. 하지만 조선인의 독립운동은 보다 활발해졌고 동시에 일본에 있어서도 이 운동은 일본인 노동자들과 연대해 발전하는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조선인과 일본인 활동가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23년 9월 1일 정부는 지진이 일어남과 동시에 군대의 출동을 명령했다. 2일 이후에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또 전화 및 무선 등을 사용에 소문을 퍼뜨렸다. 조선인을 경계하고 자경단을 결성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대응에 기반해 군대 및 경찰, 그리고 이 권고를 충실히 따른 시민들에 의해 조선인이 학살됐다.
 
즉 조선인 학살은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지배에서 자라난 민중의 배외의식과 국가에 의한 조선인 및 사회주의자 탄압을 전제로 한 치안활동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학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최근 연구에 의하면 수천명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학살된 사망자 이름조차도 거의 모른다. 왜 사망자 수는 물론 이름조차도 모르는가? 그것은 일본정부가 조선인 피해자들의 사체를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이다. 또 이후 조선인들이 벌인 조사에 대해서도 방해공작을 펴 왔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지금 현재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학교의 경우에서 보듯이 재일코리안을 시작으로 재일외국인 및 마이너리티 등이 피해를 받고 있다. 식민지주의의 청산을 위해선 우선 관동대지진 당시 있었던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철저한 정보공개 및 재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과거의 제노사이드로부터 명확한 교훈을 얻지 않는 한 일본의 미래는 없다."

 
장장 5시간 동안 진행된 이번 한일시민공동선언대회는 27일과 28일 한국에서 다시 개최된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식민지주의의 진정한 청산이 선행돼야 한일간의 평화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회에 참석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간 나오토 수상의 담화로 마치 모든 것이 해결됐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안타깝고 또 화가 난다"고 말한다.
 
식민지주의가 과연 일본정부의 주도로 청산될 수 있을까? 현재로선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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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8/24 [09:59]  최종편집: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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