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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코, 둘째딸 유나를 임신하다 (8부)
일본인 아내의 세 아이 출산기 (8부)
 
박철현 기자
일본 아내의 세 아이 출산기 (1부)
일본 아내가 장인어른을 싫어하는 이유 (2부)
아내가 출산시 비명 안 지른 이유 (3부)
진통은 길었지만 출산은 금방이었다 (4부)
어느날 새벽 갑자기 쓰러진 아내 (5부)
'천식'의 무서움을 실감하다 (6부)
"오빠 장남이잖아. 부모님 모셔야지" (7부)
 
한국에서 보낸 2주일은 매우 감미로왔다. 모처럼 고향을 찾은 나도 모든 것을 잊고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미와코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은 느낀 것 같았다. 4년이나 지난 지금도 2006년의 마산추석여행을 떠올리며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어머니가 미우를 매일같이 돌봐주셔서 너무 편했어. 또 오빠가 어린 시절에 보냈던 추억의 장소들을 같이 돌아본 것도 좋았어. 무뚝뚝한 듯 보이지만 정이 넘치는 분위기랄까, 아무튼 일본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그런 것들이 너무나 좋았어.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어. 너무나 큰 사랑을 말야."
 
미와코가 말하는 큰 사랑은 어머니의 눈물이다.
 
우리가 일본으로 돌아오던 날 아침 괜시리 화를 내셨던 어머니는, 정작 콜택시가 집 앞에 도착하자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다.
 
"이리 헤어질 꺼면 왜 왔노? 거기가 뭐가 그리 좋다고 또 가노..."
 
미우를 안아든 미와코의 손을 잡은 어머니. 기다리다 참지 못한 택시운전수의 "고만 가지예"라는 부탁이 없었다면 아마 어머니는 영원히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미와코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러고 보니 미와코와 어머니는 처음 만났을 때 손으로 대화를 나눴다. 미와코는 어머니의 손을 처음 접했을 때 평생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거짓없음을 느꼈다고 했다.
 
어머니도 마산에서의 결혼식을 한달 앞둔 05년 2월 미와코에게 반지선물을 하면서 몇 번이고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는 나에게 역정내듯이 말씀하셨다.
 
"니 집에서 설거지 같은 거 도와주고 그러나? 미와코 손이 와이리 많이 상했노? 니 아무것도 안하제?"
 
그리고 이번 추석여행도 마지막은 손이었다. 손을 맞잡고 어머니와 미와코는 울었다. 그 사이에 낀 미우는 상황파악 못한 채 멀뚱멀뚱 할머니와 엄마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담배를 한대 피우고선 "고마 보내주라. 비행기 못 타겠다. 다음에 또 오믄 된다이가"라고 말했고, 그 틈을 타 택시운전수도 "고만 가지예"라고 끼어 들었다. 앞좌석에 앉아 백밀러를 쳐다보았다. 멀어져가는 어머니는 우두커니 선 채 계속 손을 흔들었다.
 
가족간의 사랑을 유치원 이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단언하는 미와코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에서 상당히 많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속내를 온 몸으로 표현한다. 그것에 익숙해진 우리들이야 그런갑다 하고 말지만 일본인들은 다르다. 미와코 역시 혼네(本音, 진심)와 다테마에(建前, 겉마음)에 익숙해진 채 30년을 살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겉과 속이 100% 일치하는 언행을 보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존재로 다가갔는지 쉬이 짐작 가능하다.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가 소프트뱅크 그룹의 투자를 받아 오마이뉴스 재팬이 설립했는데 tv팀을 맡아줄 수 없겠느냐는 스카웃 제의였다. 급여도 괜찮았지만 무엇보다 편집부 멤버가 마음에 들었다. 
 
▲ 오마이뉴스 재팬  ©박철현
지금도 친교를 유지하고 있는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 전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은 물론 니혼게이자이신문 산업부 데스크였던 히라노 히데키가 편집부 데스크였고, 보도방송 '더 스쿠프'로 유명한 도리고에 슌타로 씨가 편집장이었다.
 
내 일생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모토키 마사히코 전 주간현대, 프라이데이 편집장이나 제이피뉴스에 칼럼을 기고하는 프리라이터 시부이 데쓰야 씨도 만났고, 올해 8월 23일 폐암으로 돌아가신 일본 최고의 연예 리포터 나시모토 마사루 씨와도 이 때 친분을 쌓아 그가 돌아가시기 몇 주 전까지 같이 일을 했다.
 
비록 오마이뉴스 재팬은 2년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 2년간은 일종의 터닝포인트였고 새로운 재출발의 기회를 마련해 줬다. 솔직히 나는 오마이뉴스 재팬에 들어가기 전만 하더라도 과연 글'만'으로써 먹고 살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다. 또 기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2년간 지내면서, 다른 기자들의 삶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따라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다른 사람들도 나를 기자라 인정해 줬다. 처음 1년간 '박 상'이라고 부르던 일본인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박 선배'라고 불렀던 것도 인상에 남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회사가 좋았던 점은 철저한 복리후생제도였다. 소프트뱅크 그룹의 복리후생제도를 따라서 그런지 몰라도 주5일제 근무가 철저히 지켜졌다. 토, 일요일 시프트가 배정되면 평일날 반드시 1.5일을 쉬도록 해 줬고, 주말 근무수당도 추가로 나왔다.
 
당연히 가장 기뻐한 이는 미와코였다. 일주일에 반드시 이틀은 하루종일 같이 있게 되니까 모든 면에서 여유가 생겼다. 직업상 주말에 일을 할 경우도 많았지만 그럼 더 좋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고, 사흘 일하고 하루 쉬고. 연속으로 쉴 땐 2박 3일짜리 여행도 떠날 수 있으니까 미와코 입장에서 보더라도 정말 환상적인 직장이었던 셈이다. 
 
그 중에서도 2006년 12월 27일은 미와코에 있어 절대 잊을 수 없는 날 중 하나다. 하긴 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너스를 받은 이 날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일본인 동료 편집부원과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그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다.
 
"아참, 오늘 보너스 나오는 날이지."
"좋겠네. 보너스도 나오고."
 

나는 아직 입사한 지 3개월이 채 안됐기 때문에 당연히 대상외인줄 알았다. 4개월째부터 정사원이 되니까 12월분은 안 나오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런다.
 
"어? 박상 몰랐어? 우리 회산 기본적으로 다 나와. 아르바이트도 나오는데 뭘. 물론 금액은 차이가 있겠지만."
"정말?!"

 
점심먹고 바로 은행으로 갔다. 아! 정말이다. 선명하게 찍혀있는 꽤 괜찮은 숫자들.
 
소프트뱅크는 일 많이 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직원들의 모티베이션(동기부여)도 확실한 것으로 유명하다.
 
출산축하금 제도가 좋은 예다. 09년 이 회사는 직원(아르바이트 포함) 혹은 그 부인이 셋째 아이를 낳으면 축하금으로 100만엔을, 넷째를 낳으면 300만엔, 다섯째를 낳으면 500만엔을 일시불로 지불한다는 방침을 발표해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아무튼 그 괜찮은 숫자들을 그대로 인출한 후 봉투속에 곱게 넣어 그날 저녁 미와코에게 건넸다. 비록 한 달치 기본급만 들어가 있는 얄팍한 봉투였지만 그걸 건네받는 순간 미와코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왜 울어?"
"...기뻐서."
 
"그렇게 기뻐?"
"응. 너무나 기뻐."
 
"많이 들어가 있지도 않은데 뭘."
"아니, 그런 뜻이 아냐. 그냥 꿈이 이뤄졌다 뭐 그런거야. 지극히 개인적인 것."
 
"무슨 꿈이 이뤄졌는데?"
"응... 보너스 봉투 받아보는 게 꿈이었거든."


미와코는 한번도 보너스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다. 미우를 낳기 전까지 부동산 회사에 다녔었지만 이 회사는 철저한 능력제(기본급이 매우 적고 계약 실적에 따라 몇 퍼센트씩 커미션을 받음) 임금체계였기 때문에 보너스 구경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보너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보너스 지급여부에 따라 여행도 결정되고 집 살 때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기도 하고 그런다. 아예 보너스 달에는 평소보다 두배 이상 갚아야 한다는 룰을 적용하고 있는 은행도 많다.
 
그렇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이 얄팍한 봉투에 마치 일생의 소원이 이뤄진 듯한 울먹거리는 미와코가 잘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럼 이건 내가 미와코한테 주는 보너스라 생각하면 되겠네. 하하하."
 
그러자 미와코도 어느새 장난(아니,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을 친다.
 
▲ 엄마를 엄청나게 고생시킨 미우     ©jpnews/박철현
"그럼 앞으로 월급도 줘. 아이 키우는 거 엄청난 노동이니까 월급 받아야 겠어."
"......-_-"

 
분명히 이때만 하더라도 장난스럽게 시작된 대화였는데, 2007년부터 나는 내 월급통장을 본 적이 없다. 어느샌가 내 용돈은 하루 천엔이 됐고, 술자리가 있을 경우엔 적어도 사흘전에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일본의 술자리는 급하게 정해지지 않는다. 며칠전부터 약속을 정하기도 하고, 심할 경우엔 무려 1개월전에 약속을 잡는 경우도 있다. 샐러리맨들은 물론 퇴근길에 동료들과 가볍게 한잔씩 하기도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벼운 한잔이다.    
 
아무튼 이 때 정해져 버린 이 라이프스타일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이가 셋이나 태어난 지금은 용돈이 더 줄어들어 하루에 300엔으로 생활한다. 만 34살, 아이 셋 둔 가장이 지갑에 300엔씩 넣고 다닌다 그러면 사람들이 안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가장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은 나다.
 
보너스 봉투 때문에 분위기가 묘하게 달아올랐다. 사실 장인어른 집에서 같이 살게 되면서 미와코와 그다지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이 날은 큰 딸 미우도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고, 장인어른도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위기에 젖어들어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매우 뜨거운 밤이었고 또 격정적인 시간이었다. 
 
며칠 후 우리는 새해를 맞이했다.
 
07년에도 변함없는 생활이 지속됐다. 시사저널에서 일했던 기자들이 쓴 '기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안에 나오는 생활하고 비슷하다. 특히 내가 맡고 있었던 영상의 경우 현장그림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조건 현장에 나가야 한다. 사명감이랄까, 직업의식이 없으면 좀처럼 견뎌내기 힘든 일이기도 하다.
 
07년에는 도쿄 도지사 선거 등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열리는 해라 특히 더 바빴다. 2월말부터는 거의 집에 못 들어갔다. 침낭을 아예 하나 사서 매일같이 회사에서 잤다. 한 일주일 정도 못 들어갔을 때였다. 미와코로부터 메일이 왔다.
 
"오빠! 생리가 없어서 병원 갔는데... 임신이래. 흑."
 
지금 생각해보면 기쁜 것보다 당황스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미와코도 그래서 '흑'을 의미하는 그림문자를 넣은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미와코와 나는 아이를 엄청나게 낳고 싶어하는, 그런 부부가 아니었다. 만약 낳는다 하더라도 아이 하나만 낳기로 했었다. 또 둘째를 낳더라도 큰 애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 나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덜컥 임신했다고 하니 황당할 수 밖에 없다. 대체 언제 그런...아! 보너스 받은 날. 12월 27일. 생각해보니 그 때 방심했던 것 같다. 시간상으로 봐도 딱 맞아 떨어진다. 미와코도 같은 생각을 했다보다. 금세 메일이 다시 왔다.
 
"생각해보니까 그 때 보너스 받는 날... 오빠 제대로 안 했지. 칫."
 
답장을 보냈다.
 
"제대로 처리한다고 했는데...흑. 그래도 또 아이가 나온다고 생각하니 좋긴 좋다. 하하하. 축하해."

 
하지만 이미 하나를 낳아 길러본 미와코는 어느샌가 '어머니'가 돼 있었다.
 
"둘을 이 좁은데서 어떻게 길러. 이사해야 하는데 고민되네. 또 미우도 계속 봐야 하고. 하지만 오빤 맨날 집에 안 들어 올꺼잖아. 아... 고민스럽네. 어떡하지?"

 
물론 낙태같은 건 우리 둘의 머릿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낳아서 기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그 과정이 험난할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만 하더라도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직업상' 그게 될 리 없다.
 
그렇게 몇 개월 지내는데 미와코가 힘들어 하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또 하나 걱정은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점이었다. 수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뒀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고민스러운 나날이 지속됐다. 그러던 어느날 잠자리에 든 미와코가 넌지시 말해 온다.
 
"한국에서 낳을까? 미우와 같이 가서 우리만 몇 개월 거기 있을께. 어머니도 미우 보고 싶어 하시고, 둘째도 한국에서 낳고 그러면 되잖아."
 
대단한 아이디어였다. 아! 이런 수가 있었구나. 한줄기 광명이 비추는 듯 했다.
 
그리고 미와코와 나는 예정일 9월 14일보다 한달 빠른 8월 15일 광복절 겸 종전기념일에 다시 마산으로 갔다.
 
파란만장한 미와코의 3개월이 시작됐다.
 
(9부로 이어짐)
 
■ 필자주 : 상당히 죄송합니다만, 건강문제 등 개인사정상 매주 연재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연재는 물론 계속되고, 또 게재시기는 일요일이 될 것입니다만, 상당히 불규칙적인 연재가 될 것 같으니 이 점 양해바랍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 일본 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   ©창해출판사
작년(2009년)에 6개월간 연재됐던 시즌1, 시즌2, 외전을 한데 묶어 단행본 에세이 '일본 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창해출판사, 1만 1,500원)를 출간했습니다.
 
현재 전국 오프라인 서점과 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인터파크 등 유명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출간과 함께 시즌1, 시즌2는 사이트 상에서 열람하실 수 없게 됐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출판사 책소개 페이지
http://www.changhae.net/book_board/changhae_book_view.php?no=331&id=chang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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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9/05 [08:00]  최종편집: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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