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연가'가 방송되는 등 '한류 붐'은 일본을 석권했다.최근에는 그 광적인 열기도 조금 가라앉아 '한류는 꺼진불이 되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과연 그런 것일까?다크호스가 갑자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 같은 시기를 벗어나, 하나의 흔들림없는 '장르'로서 정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때의 유행이라면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한국은 이미 일본인에게 있어 관광, 맛있는 음식,패션, 영화, 음악, 드라마 등 모든 면에서 당당히 단골 메뉴가 되었다.2003년경부터 일본에서 일으킨 '한류 붐'은 수많은 '한류 드라마'가 불을 붙이는 역할을 담당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는 이것을 '제 2차 한류붐'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제1차 한류붐'이 언제였냐고 한다면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86년경부터 서서히 시동을 걸기 시작, 87년에 들어서서 속도를 내더니 88년 올림픽 개최를 향해서 정점에 달할때까지의 시기라고 생각한다.그때까지 한국은 한반도가 안고 있던 여러 문제때문에, 일본내에서는 매스컴이 다루기 어려운 면도 있고,그런 까닭에 일본인에게는 스며들기 어려운 나라로 계속 있었던 점은 지난회 칼럼에서 이야기했다.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서울 올림픽이 가까이 옴에 따라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내가 처음 tv 프로그램 리포터로서 한국을 방문한 것은 85년 5월의 일이다. 이 때부터 조금씩 한국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제작되기 시작했다.서울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지금까지 건드릴 수 없었던 한국에 '보도 해금 무드'가 찾아온 것이다. 급작스럽게도 tv 프로그램 제작진은 곤혹스러워했다. 그때까지는 한국을 방송하는 것 자체가 곤란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대부분의 pd들이, 한국보도의 노하우는 커녕 예비지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그런 와중에 돌연 나의 존재가 주목 받게 되었다. '언젠가 단 하나의 프로그램도 좋으니까 한국보도에 공헌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있는 나는, 조금씩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행을 반복하면서 꼼꼼하게 정보수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처음에는 취재 리포터로서 기용되었고,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내에서 pd에게 어드바이스나 제안을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점점 의견을 구하게 되고, 결국 프로그램의 기획이나 편집에까지 관여하게 돼, 최종적으로는 자유로운 테마로 취재를 하는 것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여배우이면서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 사정을 잘 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자, 한국을 다루는 프로그램에는 리포터로서 내게 부탁하는 일이 빈번해져, 언제부터인가 '한국통 여배우'라는 레테르가 붙여져 있었다.
▲ 한류스타스 갈라 콘서트 2009 포스터 © | |
이때, 한국 문화나 관광을 소개하는 부드러운 프로그램부터, 서울올림픽에 대한 테러대책이나 징병제에 이르기까지,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여러가지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다. 아마 일본 방송사상, 이렇게 한국건으로 들썩댄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87년경부터 올림픽 개최까지 횟수로는 tv 편성표란을 보면, 한국에 관한 프로가 하루에 반드시 2개, 3개는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 한국보도가 왕성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손대는 것이 터부'였던 한국은, 누구의 손때도 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화제라도 신선미가 있었고, 무엇을 다뤄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천천히 시작한 '한국해금무드'는 언제부터인가 '이 사람도 저 사람도 한국,한국'이라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통'으로 불리던 나의 노출이 많아지면서 '색다른 배우'로서도 주목을 받아, 신문이나 잡지로부터 취재요청이 많이 날아들었다.
취재에 응할 때, 무례하긴 했지만 나는 '반드시 원고를 체크하게 해줄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왜냐하면 tv 프로그램 제작진도 벼락치기 공부 지식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 셈이었고, 취재원고를 쓰는 작가도 아직 한반도가 안고 있는 미묘한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이니치(在日)라는 말이 있다.
당시 이 말을 문자로 쓸때는 '자이니치 한국・조선인'이라고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자이니치'만으로는 '자이니치 미국인'도 있고 '자이니치 중국인'도 있다.
그런데 '자이니치 한국인'만으로는 '총련계' 사람들을 무시한 것이 되므로, 관용구로서 반드시 '・'를 넣어서 '자이니치 한국・조선인'이라고 표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 배경을 고려한 후, 표기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작가는 결코 많지 않았다.(지금은 '자이니치'가 '자이니치 한국・조선인을 가리킨다'고 문맥속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경우, '자이니치'라고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내가 취재 장면에서 '한국어'로 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어'라고 아무렇지 않게 쓰는 등, 그대로 발행해서는 문제가 될 만한것도 적지 않았다. 작가가 한국에 대한 식견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틀리거나, 오해해서 쓰여진 곳도 많았다.
어찌되었든 간에, 취재를 받을 때마다 그들의 원고를 문자수를 맞춰가면서,세세하게 손을 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흔했고, 그 덕에 나는 쓰는 사람으로서도 조금씩 단련이 되게 되었다. (번역 김현근)
(이하 원문)
以前にもあった韓流?
『冬のソナタ』が放送されるや、「韓流ブーム」は日本中を席巻した。
最近ではその狂乱ぶりもすこし落ち着いてきており、「韓流は下火になった」という人もいるが果たしてそうだろうか?
ダークホースが突然華やかなスポットライトを浴びたような時期を脱し、ひとつの揺るぎない「ジャンル」として定着したにすぎないと私は思っている。
一時の流行ならいつかは消え去るが、韓国はもはや日本人にとって観光、グルメ、ファッション、映画、音楽、ドラマなどあらゆるシーンで堂々たる「定番」になったのだ。
03年ごろから日本で巻き起こった「韓流ブーム」は数々の「韓流ドラマ」が火付け役となった。私は自分だけでこれを「第二次韓流ブーム」と呼んでいる。
では「第一次韓流ブーム」はいつだったかといえば、「’88ソウルオリンピック」を控えた86年ごろから徐々に滑走がはじまり、87年に入ると勢いを増し、88年オリンピック開催へ向けて頂点に達するまでの時期だ。
それまでの韓国は韓半島の抱える様々な問題のために、日本のなかではマスメディアが取り上げにくい面があり、それ故に日本人には「馴染みのない国」であり続けたことは前回にお話をした。
しかしそんな風潮はソウルオリンピックが近づくにつれて次第に変化しはじめる。
私が初めて番組レポーターとして韓国を訪れたのは85年5月のことだ。この頃からポツポツと韓国を紹介する番組が制作されはじめた。
ソウルオリンピックを目前にして、これまでアンタッチャブルだった韓国に、「報道解禁ムード」が訪れたのだ。
突然のことに番組制作スタッフは困惑した。それまでは韓国は放送すること自体が困難だったため、韓国について知る必要などなかったからだ。
ほとんどのPD達が、韓国報道のノウハウはおろか予備的な知識さえ持っていなかった。
そんななか、突然私の存在が注目されることになる。
「いつか、たった一つの番組でもいいから韓国報道に貢献したい」という夢を抱いていた私は、少しずつ韓国語を学び、韓国行きを繰り返してコツコツと情報収集を重ねていたからだ。
はじめは取材レポーターとして起用されたおり、自分の知っている範囲内でPDにアドバイスや提案をする程度だった。ところがどんどんと意見を求められるようになり、遂には番組の企画や編集にまで携わり、ついには自由なテーマで取材をすることまで許されるようになった。
こうして「女優でありながら韓国語を話し、韓国の事情に通じている」ということが知られるようになると、韓国を取り上げる番組にはレポーターとして私に声がかかることが頻繁になり、いつの間にか「韓国通の女優」というレッテルを貼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
この時期、韓国の文化や観光を紹介するような柔らかい番組から、ソウルオリンピックに向けてのテロ対策や徴兵制に至るまで、硬軟さまざまな番組が制作された。おそらく日本の放送史上、こんなに韓国が取り沙汰されたのはこの時が初めてのことだっただろう。
そして87年頃からオリンピック開催までのストロークでは、テレビの番組覧をみれば、韓国関係の番組が一日に必ず二つ、三つは探すことができるほど、日本での韓国報道は盛んになった。
それまで、「手を付けることがタブー」であった韓国は、誰の手垢も付いていない。そのため、どんな話題でも新鮮味があったし、何を取り上げても人々の興味をそそった。そろそろと始まった「韓国解禁ムード」はいつのまにか「猫も杓子も韓国、韓国」というほどに盛り上がっていった。
そのような気運のなか「韓国通」とされる私の露出は多くなり、「変わり種の女優」としても注目を浴び、新聞や雑誌からの取材依頼が多く舞い込んだ。
取材に応じる際、失礼ながら私は「必ず原稿をチェックさせていただくこと」を条件とした。なぜならテレビ番組のスタッフもにわか勉強の知識で番組を制作しているわけだが、取材原稿を書くライターさんもまた半島の抱えるデリケートな事情に詳しくはない。
インタビューに際して、私は場合によって微妙に「朝鮮」や「韓国」という言葉を使い分けているが、彼等がいざ原稿にしてくると、それらが反映されていないことが多いのだ。
たとえば「在日」という言葉である。
当時はこの言葉を文字で書くなら「在日韓国・朝鮮人」と書かねばならなかった。
「在日」だけでは「在日アメリカ人」もあれば「在日中国人」もある。
しかし「在日韓国人」だけでは「総連系」の人達を無視したことになるので、慣用句として必ず「・」(専門用語でナカグロという)を入れ、「在日韓国・朝鮮人」と表記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だ。
このように政治的背景を踏まえた、表記の作法を心得ているライターさんは、決して多くはなかった。
(昨今では「在日」が「在日韓国・朝鮮人を指す」と文脈のなかで明らかな場合、「在日」と略すことが多くなった)
また私が取材の場面では「韓国語」と言っているにも関わらず、「朝鮮語」と平気で書いてくるなど、そのまま発行されたら問題になるような事も少なくない。
ライターさんが韓国に対する見識がないために、全く間違っていたり、誤解して書かれている箇所も多い。
とにもかくにも、取材を受けるたびに彼等の原稿を文字数を合わせながら、細かく手をい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が常だったし、おかげで私は書き手としても少しずつ鍛えられていくことにな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