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재형식이므로 처음부터 읽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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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프로포즈 1부)■
"헌책방" (프로포즈 2부) 일본 여자들, 아니 이건 아마 국적에 상관없겠지만 이것저것 많이 알아놓으면 손해보지 않는 건 확실하다. 잡식(雜識)이 대우받는 시대라고나 할까?
그때 아내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 빠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대강이나마 그의 영화를 보았고, 또 내가 이것에 관해 썰을 풀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왜냐면 지금 아내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더이상 신작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내가 한때의 젊은 감성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 몰입했다는 측면도 있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나? 지금 내가 빠져 있는 무언가를 주위 사람들이 몰라줄 때 느끼는 우월감과 서러움. 그 전혀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 말이다.
연애는 사실 그 묘한 분위기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때 헌책방에서 아내와 나는 절묘한 시공간적 타이밍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라는 키워드를 공유했다. 당연히 누군가가 먼저 고백만 하면 쉽게 연애로 발전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고백'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나는 '고백'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나 너 좋아"까지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우리 사귈까?"가 차마 안 떨어진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우리 사귈까"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주위에서 서포팅을 해주기 때문에 어느샌가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케이스도 많다. 연애경험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랬다.
하지만 상대가 외국여자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어떤 시점에 도달했을 때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위에서 누가 어떻게 공인해 줄 것인가? 결국 전부 혼자서 헤쳐 나가야만 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때만 하더라도 나는 아내를 사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한국이야기를, 아내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듣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엽고 깜찍했다.
지금처럼 한류붐이 불던 시절이 아니다. 아내의 한국에 관한 지식은 그야말로 제로(0) 였다. 오죽하면 유일하게 아는 한국인이 박정희였겠는가.
마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나가듯 군대, 대학, 삼겹살, 야끼니쿠, 명동, 지하철, 동대문 패션상가 등을 설명해 나갔다.
아내는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였고 또 신기해 했다. 그 중에서도 아내는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다는 말을 듣고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는게 말이 되요? 매운 걸 더 맵게 해서 먹다니.. 정말 매운 거 좋아하는 거 같아요. 으으" 이때 설명을 못해서 그런 걸까? 지금도 아내는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먹는 모습을 보면 "으으"라는 짦은 신음소리를 낸다. 아내의 이런 반응들이 너무 신선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라는 키워드가 접점이었다면, 이런 잡담들은 그 접점을 선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일 테다. 그리고 아내는 이러한 선(線)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나에게 몇번이고 신호를 주었다. 이를테면 이런 말이다.
"전 외국인들이 일본여자들한테 가볍게 추파던지는 거 진짜 싫어요" 물론 이 말이 뜬금없이 나온 건 아니다. 아내에 의하면 자기가 가르치는 영국인이 심심하면 "알라뷰(i love you), 아이시테루(愛してる)"를 사용하면서 집에 놀러오라고 그런단다. 윗 말은 이런 걸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또 이 말은 지극히 계산된 것이었다. 나중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하하하. 난 그때 정말 불안했거든. 오빠가 사귀자는 말만 하면 사귈 마음의 준비는 다 되어 있었는데, 장난스럽게 '너 괜찮은데? 나 너 사랑한다. 그러니 우리 사귈래?' 같은 식으로 나오면 정말 '으으으' 되니까.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경고 겸 부탁한 거였어. 정말 간절하게 말이야." 여자는 역시 무섭다. 만국의 남성들은 여성의 은연중 나오는 말들을 유심히 체크해야 한다. 물론 과대해석해버리면 불필요한 오버를 낳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둔감하게 반응하면 기회가 기회인지도 모른 채 한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둔감'보다 '오버'가 낫다. 이건 불변의 진리이다. 만번 찍어 안 넘어간 나무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게 아니다.
그렇게 아내와 나는, 비록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사이였지만 금세 친해져 갔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 아내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좋아하고 이제 한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볼란티어 선생님'에 불과했다. 이 생각이 깨진 건 그 다음주였다.
그러니까, 6주째 수요일이었는데, 기숙사를 나서면서 당연히 오늘도 아내를 만나겠지 생각했는데, 아내가 이날 모임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 볼란티어 모임은 구속력이 없는지라 선생들이 안 나올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아내가 나오지 않은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만 7년이 지난 지금도 아내가 나오지 않았던 6주째 수요일을 기억한다. 옆자리의, 텅빈 아내의 자리를 보면서 내내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던 그 수요일.
아내는 그냥 감기로 나오지 않은 것인데, 나한테는 그게 아니었다. 정말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이내 패배주의로 빠졌다. 혹시 나 보기가 역겨워 오지 않았던 건 아닐까? 류의 자책같은 것.
자책은 또다시 확장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고추장으로 엮어지기 시작한 우리의 선(線)은 단단한 밧줄이 아니라 언제라도 끊어질 지 모르는 썩은 동앗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에 대해 실제적으로 아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 전화번호는 물론 이메일 어드레스, 남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기숙사와 가깝다는 그녀의 집은 어딘지, 취미, 특기...등등 내가 아내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오직 '미와코'라는 이름밖에 없었다.
5번 만났고, 밤길을 같이 거닌 것도 3번이나 되는데 뭐가 그리 잘났다고 내 얘기만 지껄였을까? 전화번호라도 한번 물어볼 것을. 그러면 이렇게까지 초조하지 않았을 텐데. 집까지 한번 바래다 줄 것을. 그러면 미친 척하고 초인종이나 눌러볼 수 있을 것인데...
그 다음 수요일이 다가오기까지 일주일간을 무작정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운명의 7번째 수요일. 볼란티어 일본어 교실의 도어를 열기 직전까지 내 가슴은 전례없는 두근거림에 휩싸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도어의 문을 조용히 여는 순간 조금은 핼쓱한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온 몸의 힘이 빠지는 듯한, 나른함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아내도 나를 발견하고선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짓는다.
막 화가 났다. 일주일간 얼마나 걱정했는데 저런 미소라니. 인상을 팍팍 쓴 채 그녀한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 전화번호 몇번이예요?아내) 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나 당돌한 행동이었다. 아내도 나중에 정말 황당했다고 말한다. 물론 아내는 내가 전화번호나 메일어드레스를 요구하면 말할 생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게다가 엄청나게 무서운 인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움찔했다고 한다.
아내) 왜요?나) 걱정했어요. 일주일간. 많이. 아내는 후일 이 단답형의 짧은, 하지만 핵심만을 간추려 놓은 듯한 이 세 단어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내는 그때 조금은 심한 감기에 걸려 회사를 며칠간 쉬었는데, 쿨(cool)한 가족들은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기본적인 신경은 써줬겠지만, 나처럼 '걱정했다'는 단도직입적이며 간결한 말을 타인에게 들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고 한다. 근데 이건 아내의 오해다.
지금에사 밝히지만 당시 내가 아는 일본어 단어가 딱 이 정도였다.
"걱정했어요. 일주일간. 많이"를 지금 말해보라고 한다면 아마도 "아휴. 너 정말. 내가 일주일간 너 때문에 얼마나 진지하게 걱정한 줄 아니? 전화번호도 모르고 메일도 모르잖아. 정말 짜증나 죽는 줄 알았어" 라고 말했을 거다. 내가 봐도 후자보다 전자가 낫다. 이처럼 어떨 때는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다.
아내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라고 답한 후 이메일 어드레스와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나도 내 전화번호를 적어서 건넸다.
아참, 아내는 이것도 재미있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착발신 번호가 뜨니까 보통은 한쪽이 전화번호를 건네거나 불러주면 바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등록하는게 일반적인 데 나는 아내의 전화번호를 고이 접어 지갑속에 넣고 또 내 전화번호를 고이 적어 아내에게 건넸으니까 말이다. 아날로그는 때때로 감성을 자극한다는 말은, 적어도 이때만큼은 진리였다.
그리고 나역시 바보가 아니다. 이 가슴의 두근거림 및 엔돌핀 지수의 급상승은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는 생리학적 반응이다. 내 마음은 지난 일주일간 아내쪽으로 기울어진 게 확실했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나는 아내가 나를 좋아하고 있는건지 아닌건지 감이 잘 오지 않았을 뿐더러,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도 있었다.
넘어야 할 벽은 아직도 너무나 단단했는데, 아내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날이 찾아왔다. 이날은 으례 우리들이 만나던 수요일이 아니라 전화번호를 주고 받았던 7번째 수요일에서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금요일 밤이었다.
아내가 밤 12시가 지난 시간에, 기숙사 앞까지 찾아와서 나에게 '첫'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의 멀쩡하고도 전형적인, 정숙한 일본인 여성 캐릭터를 집어치우고, 술에 취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 왔다.
"난데요. 지금 기숙사 앞에 있는데, 막 이야기 하고 싶은데. 나와주면 좋겠는데. 될 수 있으면 빨리 나와주면 고맙겠어" 라고 말이다.
■ 4부 일본여친 "보고 싶어요. 갑자기 생각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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