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좋아. 빨리 결혼하지 않으면 여기서 죽어나갈지 몰라"
26일 아사히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탈북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인신매매업자에 팔린 탈북여성 박은혜(가명) 씨 사연을 소개했다.
신문에 따르면, 박은혜 씨는 2006년 2월 20대 후반의 나이에 탈북했다. 고향은 중국 국경에 인접한 곳으로, 김정일 총서기가 실권을 쥔 1994년 이후 배급이 중지되어 마을 사람 모두들 생활이 어려워졌다.
탈북직전, 박은혜 씨는 모아둔 돈 200달러 정도를 사기당하고 빈털털이가 되었다. 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할 지경이 되자 '국제전화를 쓸 수 있는 중국에 가서 한국에 사는 아버지 친척에게 원조를 받자'고 생각했다.
탈북방법은 시장에서 알게된 여성에게 정보를 얻었다. 여성은 중국제품 밀수에 가담하고 있어 중국 조선족을 많이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정보를 얻고, 어렵게 강을 건너 탈출한 박은혜 씨는 기다리고 있던 조선족 남자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에 끌려갔다. 다음날 어느 여관에 도착하자 '중국인 아내가 되겠느냐, 매춘을 하겠느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종용받았다. 조선족은 인신매매업자였다.
여관에는 극빈층의 농민, 양팔이 없는 남자, 정신질환의 남자 등 결격사유가 있는 남성들이 부인을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박은혜 씨는 당시 감기가 폐렴으로 발전해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쇠약사 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좋으니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중국인 남편을 선택했다.
박은혜 씨의 남편은 절도죄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막 출소한 30대 후반이었다. 그의 부모는 1만 3천원(중국원, 한화 200만원 상당)을 내고 박은혜 씨를 사주었다. 농가의 허름한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한 생활로 병이 들어도 약값이 없어 고생했다.
남편은 중국어로만 말했고, 박은혜 씨는 중국어를 한 마디도 몰라 부부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했다. 몇 백 번이나 도망칠 생각을 했지만, 도망가다 경찰에 붙잡히면 북한에 강제송환될테고, 총살당할 가능성도 있다. 도망가더라도 마땅히 갈 곳도 없었기 때문에 밭에 나가 울다 오는 것이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다.
남편은 박은혜 씨가 도망갈까봐 일부러 중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박은혜 씨는 혼자서 티비를 보며 조금씩 중국어를 터득하고 있지만 여전히 남편과 대화는 불가능하다. 살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말 한마디 할 사람이 없다는 것. "북한은 살림은 힘들어도 인간관계가 따뜻했는데, 중국은 경제는 그보다 나을 지 몰라도 다들 돈 생각만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있는 친척 연락처가 적힌 윗옷은 중국에 건너와 병에 걸렸을 때 누군가가 빨아버려 없어졌고, 연락할 방법도 연락할 사람도 없어진 박은혜 씨. 그런 그녀의 희망은 아이를 낳아 한국말을 가르쳐 대화하는 것. 아이가 크면 한국에 보내 한국 친척과 연락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아이가 없어 '비싸게 주고 사왔는데 애도 못 낳는다'고 시부모 구박을 받던 박은혜 씨는 드디어 딸을 낳았다.
그녀에게 가족이란,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가족을 지켜나갈 수 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