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마가 끝나고 나면 또 얼마나 견디기 힘든 더위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여름만 되면 ‘찜통더위’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정작 ‘찜통’의 정도는 정확히 헤아리지 못하고 살았다. 적어도 일본에 유학가기 전까지는.
일본에 도착한 때는 4월, 봄기운이 완연한 때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아직 쌀쌀했다. 더구나 타향살이가 시작된 내겐 긴장의 연속에서 오는 추위까지 더해져 도쿄에서의 봄은 을씨년스럽기조차 했다.
툭하면 바람불고 비를 뿌려 이방인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일본의 가옥은 대체적으로 벽이 얇아 바깥의 찬 공기가 실내에까지 그대로 전해진다(내가 있던 기숙사 건물이 그랬다).
아침저녁엔 추워서 히터를 틀고도 두툼한 양말을 신어야했고, 걷는 일이 많아 발에는 물집 생기는 게 다반사였다. 대체 이 나이에 왜 여기 와서 생고생인가, 후회도 스쳤다. 떠나기 전의 ‘야무진 각오’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내리는 비로 마음마저 눅눅해진 채 고생하던 그 당시, 한국은 너무 가물어 단수조치를 하느니 마느니 한다는 지인들의 소식에 애타하기도 했다.
그 때 골든위크 연휴가 없었다면 아마 두 달을 견디지 못하고 보따리를 쌌을 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4월 마지막 주에 있는 쇼와의 날(천황의 생일)을 시작으로 헌법기념일, 노동절, 녹색의 날, 어린이날이 휴일이고 중간에 끼인 날까지 휴가를 내면 거의 열흘 정도를 쉬는 그야말로 황금연휴가 존재한다.
다행히 이 기간 동안 쉬고 나니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지치고 긴장된 심신에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싶었을 때 느닷없이 더위가 찾아왔다. 어제까지 히터를 틀어야 했건만 오늘부터는 에어컨을 가동해야 하는 변덕스러운 날씨. 게다가 얼마 후 장마철이 되었는데도 비구경은 거의 할 수 없었다. 그저 뙤약볕만 내리쬐더니 급기야 더위를 이기지 못해 사망한 사람이 있다는 뉴스까지 보도되었다. 연일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게 보통이었다.
▲ 폭우가 쏟아지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같은 시간에도 뙤약볕이 내리쪼이는 곳도 있다 ©j최경순 | |
‘찜통 더위’의 위력을 절절히 사무치게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2001년, 그 해 여름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최고의 더위와 싸워야했다. 도쿄는 그러잖아도 한국보다 높은 습도와 기온 때문에 불쾌지수가 하늘을 찔렀는데, ‘90년만의 무더위’였다고 하니 그 끔찍함이 최악이었다.
우리나라와 시차가 없는 일본이지만, 체감하는 시차가 두 세 시간은 더 빨랐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설 때부터 태양은 이미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쪼인다. 하루 6~7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책과 도시락이 든 무거운 배낭 때문에 어깨엔 진작 피멍이 들었고, 커다란 물병(여름엔 필수다!)은 이미 바닥난 상태.
건물 밖으로 나와 거리에 나서면, 뜨거운 기운이 일시에 온몸을 휘감는다.
챙 넓은 선캡에 양산까지 받쳐 들고 걷는다. 전철을 내려 숙소까지 20여분 거리는 그야말로 비장한 각오 없이는 걸을 수가 없다. 얼마쯤 가다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들면 아무 가게나 들어간다.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가게 안을 둘러보며 땀을 식히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면 견물생심.
어느 정도 땀이 식고 정신이 난다 싶으면, 다시 마음 단단히 먹고 清水の舞台から飛び下りるよう기요미즈노 부타이카라 도비오리루요 (교토 청수사의 높은 난간에서 뛰어내린다는 각오로 무슨 일을 추진한다는 뜻. 그만큼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가게 문을 나선다.
그 순간, 으아~~!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확~ 달려든다. 펄펄 끓는 가마솥 뚜껑을 열었을 때의 그 느낌이다!! 이게 바로 찜통이구나, 확실한 ‘찜통’을 절감한 건 그 때가 처음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蒸し暑い(무시아츠이-푹푹 찌듯이 덥다)라는 표현을 쓰는가 보구나.
정말 그 이상의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 같았다.
나의 그 고통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색하지 않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체감온도가 낮아서? 아님 내가 느끼는 체감온도가 높았던 걸까? 기후가 몸에 배어서 그렇겠지만 아마도 그들에겐 참을성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길게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은 일본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점심시간, 라면집 앞에 10m 이상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짜증내지 않는 인내심. 차례가 되어 주문한 라면 한 그릇은 꿀맛이었으리라(솔직히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어려서 말을 배울 때 가장 먼저 익히는 단어가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에게 미안해할 일을 애당초 하지 말라는, 그래서 남을 배려해야 함을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익히는 그들. 남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해 자신의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는 그들. 싫다, 나쁘다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좋지 않다’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그들. 예스나 노 대신 ‘생각해 보겠다’고 하는 그들(예전에는 그 표현 때문에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예스’로 착각해 곤혹을 치렀다는 얘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실제로 우리의 경우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 대부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
그들의 완곡한 표현 속에는 물론 좋은 면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래서 ‘일본인다운 일본인’이란 말을 할 때 ‘혼네(本音:본심)’와 ‘다테마에(立前;겉으로 드러내는 표현)를 빼곤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이 말하는 진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나 내가 느낀 바로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나 다 똑같다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대할 때 상대방 역시 진심을 보여준다는 진리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내가 만난 일본인들은 그랬다.
자칭타칭 ‘일본인 같지 않은 일본인’이 많았으니까.
뜨거운 여름을 보내면서 일본에서 결심한 게 하나 있다.
주차 공간이 부족해서겠지만 상상도 못할 비싼 주차료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그들에겐 자전거가 또 하나의 '발‘이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니 한국에서 슈퍼마켓은 물론이고 가까운 곳에도 거의 차를 끌고 다니던 내가 하루에 보통 1시간 이상 걸으면서, 집에 돌아가면 자전거도 배우고 웬만한 곳은 걸어 다니자, 단단히 결심했었다.
실제로 도쿄에 살던 6개월 동안 내가 걸어다닌 거리는 조금 과장해서 내 평생 걸은 분량의 절반은 될 것이다. 그때 내 양말은 구멍이 나서 버린 게 수도 없이 많았다. 집에 돌아와 양말 얘기를 하니 남편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지만 그 때의 크고 작은 경험들이 남은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짧지만 굵었던 유학생활이었다고 자부한다.
올 여름은 어느 해보다 더 더울 거라고 한다. 아무리 그래봐야 그 때 도쿄에서 겪은 찜통더위만 할까. 은근 걱정이 되면서도 ‘까이꺼~! 덤빌테면 덤벼봐~!’ 하는 마음으로 여름을 맞고 있다. 8년 전의 ‘예방주사’ 효과가 아직 남아있기를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