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다 시게오(原田重雄.77세)를 찾아가는 길은 멀었다.
그가 전화로 불러준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가타세야마(神奈川県藤沢市片瀬山
) 라는 지역은, 도쿄에 살고 있는 외국인 기자로서 매우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라다씨의 쉰듯한 목소리는 20여년 전이나 10여년 전이나 똑같았다. 김 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그의 자택으로 전화를 했을 때,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집주소를 불러줬다. 아마도 그만큼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리라.
여기서 김 전 대통령과 하라다씨와의 관계에 대해서 잠깐 살펴 보자.
하라다씨는 김 전 대통령의 한일관계사의 산 증인이다. 김 대통령과 일본이 관련된 대부분의 사건에는 늘 그가 한 중심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가족단위로 서로의 집을 오가기도 할 만큼 인간적 교류도 깊었다.
1973년 8월 8일, 도쿄 구단시타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 호텔 2210호실에서 전대미문의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때 하라다씨는 김 대통령의 일본보호자 신분이었다. 왜냐하면 김 전 대통령이 납치당하기 전까지 기거했던 장소가,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하라다맨션(新宿区 戸塚町 2-105) 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김 대통령에게 3dk의 맨션을 제공했다. 이를테면 김 대통령의 일본에서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후견인인 셈이었다. 그런만큼 73년 당시 김 대통령이 납치를 당했을 때, 그 누구보다도 더 애타게 김 대통령의 행방을 찾아 다닌 사람중의 한 명이었다.
그 5일 후 8월13일, 돌연 도쿄에 있던 김 대통령이 한국에 있는 자택 앞에 나타났고, 덕분에 일본의 후견인이었던 하라다씨는 일본매스컴으로부터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라다씨의 집은 후지사와시 가타세야마의 한적한 야산 아래, 목조로 된 일본 전통의 가옥에 살고 있었다. 18일 오후, 그는 10여년 만에 만난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의 거실 테이블 위에는 김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이미 전 날, 일본의 tbs기자가 자택에 찾아와 인터뷰를 해 뉴스시간에 보도를 했다고 전해 주었다. 녹화된 dvd를 보니 정말로 그가 김 대통령 서거 특집에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코멘트를 하고 있었다.
▲ 올해 6월 하라다 씨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앨범 사진 ©jpnews | |
“난 솔직히 1년 쯤은 더 사실 줄 알았습니다. 그분이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돌아가시기 전, 지난 6월2일과 8월 13일에 두 차례 서울에 가서 문병을 하고 왔어요.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 그 즉시 서울에 가 찾아뵈었지요. 그 때까지만 해도 두시간 이상 이야기를 하실 정도로 건강하셨습니다. 이야기 내내 북한과의 관계정립과 재임 중 했던 약속이행에 대해 열의를 불태우셨어요.
그런데 일본에 돌아온 지 얼마 안돼 갑자기 이희호여사 남동생으로부터 긴급 전화가 와, 매우 위독하시다고 하셔서 다시 8월 13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가 뵈었습니다. 그것이 선생(일본에서는 정치인을 모두 선생이라고 부른다)을 뵌 마지막 입니다.”의외로 하라다씨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대신 김 대통령에 대한 것을 매스컴에 알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듯, 인터뷰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해서 김 대통령에 대한 비화를 이야기 해주기에 바빴다.
▲ 인터뷰 중인 하라다 시게오씨 ©jpnews | |
-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아마도 71년이었을 겁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선생의 소학교 동창생이 저의 친한 지인이었습니다. 그 지인이 무릎관절을 앓고 있는 선생 부부가 치료 차 일본에 가니 도와줬으면 좋겠다 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선생이 70년에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화하고 71년에 미국에 왔을 때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되었지요. 그 때는 솔직히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사업하는 청년실업가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
- 그 후 주로 어떤 도움을 주셨습니까?
“선생은 얼마 후 일본에 왔는데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는 밤새도록 숙소에서 비상계엄령하의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서 토론을 하곤 했지요. 저는 저대로 한 때 일본중의원 비서생활 경험을 되살려 저의 인맥을 총동원 하여 선생과 연결시켜 드렸고요. - 납치사건 때는 어떠했나요?
“당시 선생은 한국정부에 의해 여권이 무효가 된 상태였어요. 일본에 입국한 것은 한국인의 신분이 아닌 미국의 재입국허가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때문에 선생이 납치를 당해 도쿄에서 오사카, 그리고 다시 오사카 시내에서 배를 타고 오사카항으로 출항했을 때, 미국이 적극적으로 비행기를 띄우면서까지 구명활동을 벌인 것은, 아마도 선생이 미국 비자를 가지고 일본에 입국한 책임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당시 하라다씨는 김 대통령이 납치당해 일본에서 동교동 자택으로 끌려와 풀려났을 때, nhk-tv의 생중계 방송에 출연했었다. nhk가 하라다 씨의 자택에 찾아와 생방송으로 김 대통령과 직접 연결을 시도 한 것.
그래서 그 때부터 한일 매스컴에 하라다씨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73년 ‘김대중납치사건’은 당시 일본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벌건 백주 대낮에 그것도 한국이 아닌 일본의 한 호텔방에서 사람을 납치해 한국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납치된 그랜드 팔래스 호텔 ©jpnews | |
이것은 일본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주권침해이자 대단히 외교적인 실례였다. 때문에 일본사회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호텔방에서 당시 한국대사관의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지문이 채취되어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그 때 일본정부는 152명으로 된 조사팀을 구성하고 그 일환으로써 김 서기관의 일본송환을 한국정부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때문에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의 개입으로 구사일생으로 김 대통령은 살아서 집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주권침해 문제는 아직까지도 유야무야 미해결된 상태 그대로다.
- 납치당했을 때의 당시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 솔직히 그 당시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한국 대사관측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어요. 하라다맨션 앞에 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한국 정보 관계자가 아예 죽치고 앉아 있었지요. 선생도 그런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조심하는 것도 없었고요.
당시 선생은 미국에서 보수 우익이라고 알려진 레이건이 카터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솔직히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납치당해 한국으로 끌려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었지요. 이 같은 말을 선생은 두고두고 했어요.”
- 김 전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을 받아 갔지요?
“정말 감개무량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살아 돌아와 대통령까지 되었다는 것,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의 추억이지요.
그 때 전 취임식날보다 좀 더 일찍 서울에 가 12월 20일에 고양에 있는 선생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가서 놀란 것은 1층 거실 구조가 저의 집 구조와 대단히 흡사했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서실 등 거실과 평등하게 1층에 있어 좀 놀랐습니다.”납치사건 이 후, 김 전대통령과 하라다씨와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두 사람의 사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관계였다. 실제로 두 사람의 가족들은 빈번하게 한일 양국을 오가며 친목을 다졌다.
특히 이희호여사는 평소 앓던 지병인 무릎관절 치료를 위해 한달에 한번씩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 때 하라다씨의 도움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하라다씨의 자택도 몇 번 들르기도 했다는 것.
이여사의 무릎통증이 심할 때는 하라다씨가 직접 이여사의 무릎을 주물러 준 적도 꽤 여러번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희호 여사는 무릎관절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 노벨평화상 시상식에도 초대를 받아서 함께 가셨지요?
“그렇습니다. 그 때 참으로 많이 선생의 신세를 졌습니다. 호텔방도 바로 선생의 옆방에 묵게 하고, 상을 수상한 후 파티를 할 때도 우리 부자를 맨 앞자리에 앉게 배려를 해주었어요. 그래서 모두들 우리 부자가 한국인인줄 알았지요. 그 누구도 우리들이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뜨겁게 말하고 있는 하라다 시게오 씨 ©jpnews | |
- 김 전 대통령과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선생은 국내정치나 국제정치를 대단히 정확히 읽고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달랐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은 늘 공부를 했습니다. 일본에 관한 것은 물론이고, 북한에 대한 것도 끊임없이 연구를 했지요.
그래서 선생은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같은 해박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난 6월 2일 날 만났을 때도 두시간 내내 북한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열변을 토하며 말씀하셨지요.
그런가하면 일본역사에도 열린 시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8월만 되면 일본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로 한일 양국이 떠들썩할 때, 선생은 일본군인이 나쁜게 아니다. 전쟁을 하라고 지시를 내린 위정자들이 나쁜 것이다, 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 김대통령에게 어떤 내용의 마지막 인사를 하실 생각입니까?
“당신의 마음은 영원히 내마음속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할 생각입니다. 오늘 날 한국역사의 일부는 선생이 만드신 겁니다. 한국정치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달라진 것도 순전히 선생의 덕분입니다. 선생이 신념을 가지고 평생을 추구한 민주화와 평등주의는 중국을 비롯, 인도도 해내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은 한국에서 그것을 이뤄냈습니다.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북한문제를 풀지 못하고 가신 것에 대해서 그분의 충정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터뷰 도중 각 매스컴으로부터 수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도쿄신문에서는 아예 집까지 찾아와 기자의 인터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21일 서울로 조문을 떠날 예정이라는 김 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맹우 하라다 시게오씨.
그는 한 시간도 넘게 자신을 기다리는 일본기자를 놔두고 인터뷰를 마치려는 기자를 한참동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김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는 현관까지 나와 기자 일행을 배웅 하면서도 내내 ‘선생은 선생은’ 하면서 이야기를 마치려 하지 않았다.
40년 가까이 형제처럼 지내온 김 대통령의 서거를, 하라다씨는 아직도 마음속에서 놓지 못하고 부여안고 있는 듯 했다.
▲ 일본 내 후견인 하라다 시게오 씨 ©jpnews | |
▲ 김대중 전 대통령을 회고하는 하라다 시게오 씨 ©jpnew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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