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현대판 베토벤'이라 불리는 클래식 작곡가 사무라고치 마모루와 한국이 낳은 세계적 피아니스트 손열음 양은 지난 16일, 일본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 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이 두 사람이 펼칠 일본 전국투어의 시작을 알리는 공연이었다.
사무라고치는 최근 일본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고 있는 클래식 작곡가다. 청각장애로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 그가 장대하고도 상당히 완성도 높은 교향악곡을 작곡한다고 하여 '현대판 베토벤'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미국 타임지도 지난 2001년 '현대판 베토벤'으로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히로시마 원폭 피폭자 2세로, 최근 주로 대재해를 테마로 작곡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대표작 '교향곡 제1번 히로시마'는 히로시마 원폭 사건을 테마로 만든 곡인데, 이곡은 기적과 희망의 심포니로 불리며 3.11대지진 피해주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NHK 다큐멘터리에 그의 곡이 소개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클래식 음반으로는 이레적으로 17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 세간을 놀라게 했다. 그의 이 음반은 한때 오리콘 주간 차트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에서 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밴쿠버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로, 일본을 대표하는 남성 피겨 스케이터 다카하시 다이스케가 소치 올림픽 시즌의 싱글프로그램에 사용할 곡으로 사무라고치의 곡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티네'를 선택해 화제를 낳았다.
그런 그가 이번 전국 투어에서 선보이는 곡은 바로 '피아노 소나타 제1번'과 새로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제2번'이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 제2번'은 3.11 대지진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작곡된 진혼곡으로, 이 무대에서 처음 공개돼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사무라고치는 이전에 작곡해놓은 '피아노 소나타 제1번'과 작곡 작업 중이던 '피아노 소나타 제2번'을 연주할 피아니스트를 수소문하던 중, 손열음 양을 소개받았다고 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그는 스피커에 한 손을 대고 그녀의 연주 영상을 보며 그녀가 어떻게 강약조절을 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빨리, 그리고 느리게 치는지를 확인했고, 이내 그녀의 뛰어난 기교에 감탄했다고 한다. 그가 살펴본 세계적 수준의 피아니스트 가운데 손열음 양의 연주실력이 유달리 뛰어났던 것.
그는 바로 손열음 양을 일본에 초청해 서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의 음악적 방향성이 일치해 콜라보레이션 공연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앞으로 일본의 약 50여 개 도시를 도는 전국투어를 펼치게 되는데, 16일 요코하마 공연은 두 사람의 기념비적인 첫 공연이었다.
그런데 이날 새벽부터 도쿄와 요코하마 등 수도권 지역에 태풍 18호가 강타했고, 강한 비바람이 몰아쳐 이날 공연이 중단 위기에 놓였다. 수도권 대중교통이 거의 마비되다시피했기 때문에 공연 주최 측이 공연 중단을 고려했던 것. 하지만, 공연 시간을 몇 시간 앞두고 수도권 지역이 태풍 영향권에서 벗어나 가까스로 공연이 개최될 수 있었다.
공연 시간이 되자 천여 관객을 앞에 두고 피아니스트 손열음 양이 등장했다. 검은 색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그녀를 일본 관객들은 박수로 맞았다. 관객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그녀가 피아노 앞에 앉자 장내는 침을 삼키기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침묵이 흐르고, 손열음이 건반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먼저 사무라고치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을 연주했다. 사무라고치는 공연 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곡은 개인적인 괴로움을 담은 곡"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작곡가의 내면을 담은 곡이라는 것. 항상 이명현상과 발작에 시달리는 사무라고치는 이 곡을 통해 자신의 혼란, 고통, 고뇌 등 어두운 감정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손열음은 그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표현해냈다. 음 하나하나에 쏟는 그 열정은 보는 이들을 숨죽이게 했다.
곡은 상당히 난해하고 복잡했다. 사무라고치 본인조차 "난해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곡이다.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고 내면의 소리를 담은 곡"이라고 인정했을 정도다. 심지어 이 곡을 작곡해 처음 음반사에 보여줬을 때는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조차도 어렵다고 말하는 곡이다.
그래서인지 손열음의 열정적 연주는 더욱 돋보였다. 이 곡에서는 온갖 감정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무쌍하게 표현되고 있는데, 그녀는 절묘한 기교와 적절한 강약조절을 통해 곡의 감정들을 훌륭히 표현해내고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피아노 곡을 들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높은 난이도의 곡이었지만 손열음은 이를 성공적으로 소화했다. 그녀가 세계최고권위의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2위를 차지했다는데, 과연 1위는 어떻길래 그녀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왜 그녀가 이 콩쿨에서 2위에 오르고, 베스트 퍼포머로 꼽힐 수 있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 연주였다.
이 곡의 연주가 마무리되고, 이어서 사무라고치의 신곡 '피아노 소나타 제2번'이 연주됐다.
사무라고치는 본인이 예전에 대지진 피해지의 한 여아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 레퀴엠을 좀 더 확장시켜 이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을 작곡하던 중 연주자가 손열음으로 정해졌고, 그녀의 연주에 감탄한 사무라고치가 그녀의 실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는 곡으로 다시 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피아노 소나타 제1번'에 비해, 제2번은 좀 더 대중적이다. 사무라고치 본인의 말대로 제1번에 자신의 내면을 담았다면, 제2번은 3.11희생자들에 대한 진혼곡이자, 3.11 대지진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곡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곡이었다는 점에서 대중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관객들도 제2번이 연주된 공연 후반부에 좀 더 적극적으로 곡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공연 전반부의 제1번을 들을 때는 곡에 따라가려는 느낌이었다면, 제2번은 선율에 맞춰 머리를 천천히 흔들며 멜로디를 느끼고 있었다. 곡의 클라이막스에서는 손열음의 격정적인 연주를 손에 땀을 쥔 채 바라보았다.
손열음은 공연 마지막까지 놀라운 집중력으로 곡을 완성시켰다. 그녀가 연주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관객들을 기립박수로 그녀의 연주에 대한 감동을 표현했다. 관객석에서 공연을 보던 사무라고치도 무대로 올라왔고, 관객들은 두 사람이 무대를 내려올 때까지 힘찬 박수를 보냈다.
때로는 코 끝이 찡해지기도, 소름이 돋기도 하는 무대였다. 최고의 작곡가, 최고의 연주가가 만나 놀라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공연 뒤 사인회를 열어 관객들과 직접 소통하기도 했다. 한 사람은 귀가 들리지 않고, 한 사람은 일본어를 몰랐다. 하지만 관객들의 환한 표정과 두 음악가의 미소는 서로에게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공연에 만족감을 보였다. 특히 제1번보다 제2번에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재미있었던 점은, 벌써 손열음의 팬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관객 대부분이 일본에서 유명한 사무라고치의 음악을 듣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순수하게 손열음 양의 연주를 보기위해 온 팬들도 있었던 것.
요코하마 미나미구에 거주하는 두 명의 중년여성, 다카후지 씨와 요시미츠 씨는 손열음 양의 열혈한 팬이라고 한다. 사무라고치의 팬으로 여기고 질문했으나, 이야기를 해보니 손열음 양의 팬이었다. 지난해 요코하마에서 열린 손열음 양의 공연을 보고 감동 받은 두 사람은 손열음의 차이코프스키 콩콜, 반 클라이번 콩쿨 연주 연상을 모두 찾아서 봤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날 공연에 대해 "훌륭하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지난해 손열음 양의 공연 초청권이 생겨서 보러간 적이 있어요. 연주가 정말 훌륭하고 아름다웠어요. 그 때 보고나서 기회가 되면 꼭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음대 출신인 두 사람은 이날 공연에서 선보인 손열음 양의 연주기교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음악을 했던 사람이 봐도 손열음의 연주는 굉장하다고 한다.
"정말 대단해요. 손열음이 반 클라이번 콩쿨에서 2위했을 때 1위했던 사람이 중국인인데, 얼마 전에 공연을 했었죠. 하지만 그는 스마트폰이에요"
"스마트폰이요?"
"스마프폰처럼 완벽하지만, 기계적이라고 할까. 젊은이들은 '와'하고 감탄하겠지만 단지 기술이 뛰어날뿐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해요. 하지만 그 연주가와 달리 열음 양은 기술도 대단하고, 음 하나하나가 열정이 있고 아름답죠"
사람들 보는 눈이 비슷하다고, 필자도 보고 있던 관중들도 손열음 양의 한 음 한 음에 담긴 정성과 열정, 감정표현을 상당히 인상 깊어했다. 절정의 기교 속에서도 녹아있는 감정선.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장점이 아닐까.
두 사람은 사무라고치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 제2번은 "아름다웠다"며 좋아했다. 하지만 제1번은 들으면서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어려웠다고 말했다.
사무라고치는 청각이상과 그에 동반한 이명현상, 발작 등으로 반 평생을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래서 심연의 저편처럼 어둡고 무겁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교향곡의 4악장 구성 중 한 부분을 이루는 스케르초(익살·해학곡)를 만들지 않고 3악장짜리 교향곡을 만들 정도로 확고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의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은 그런 그의 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는 곡이었다. 대중적 요소가 적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겠지만.
사무라고치 본인도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사무라고치는 어둡고 무겁다는 자신의 곡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겐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저는 모차르트처럼 귀족의 즐겁고 우아한 곡을 쓰지 못합니다. 그런 건 다른 사람이 쓰면 된다고 생각해요. 피폭자 2세로 태어난 클래식 작곡가로서 저만의 사명이 있고, 제 사명을 다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습니다. 다른 음악을 원하는 사람은 다른 음악가를 찾으면 돼요. 제 음악이 무겁다거나 괴롭다고 사람들이 말해도, 마지막에 희망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내 작품세계, 폴리시(방침, 지침)를 굽히지 않고 하나의 테마, 즉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희망의 음악을 계속 써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그게 제 테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