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시각장애인으로 일본에서 살아가면서 느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신경호 동화작가가 새 소설 '기해년 경제왜란' 연재를 시작합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일간 무역 분쟁에 상상력을 덧칠해 그린 소설입니다. 거대 반도체 기업 세영이 위기에 빠진 오너를 구하고자 일본과 막후에서 협상을 벌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1편 - 밀약 - http://jpnews.kr/22529
2편 - 굴뚝새 - http://jpnews.kr/22543
3편 - 개와 늑대의 시간 - http://jpnews.kr/22566
4편 - 토착왜구 - http://jpnews.kr/22587
5편 - 가에시(되치기) - http://jpnews.kr/22624
6. 다시 굴뚝으로
박경민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 난국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회의실에 둘러 앉은 사람들도 서로 눈치만 살필뿐이었다. 일본 정부의 느닷없는 수출 규제로 인해 대붕전자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자재 담당 이사가 현재 불화수소의 재고량이 1개월치 밖에 남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불화수소는 대붕전자가 세영에게 납품하는 반도체 부품 공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었다. 세영은 최대한 필요 물량을 확보하라고 하청업체들을 압박했지만 대붕전자로서도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현은 창가쪽에 앉아 있었다. 기현은 아까부터 들고 있던 자료만 만지작거렸다. 벌써 회의가 시작된지 2시간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박경민이 말했다.
“결국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는 말인가요?”
박경민은 둘러앉은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 눈길을 피했다.
“저기 혹시 괜찮다면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가장 구석자리에 앉은 기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기현을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사뭇 부담스러워 기현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뭐 좋은 수라도 있나?”
박경민이 딱딱하게 물었다. 평소 박경민은 기현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미국 유명대학교에서 MBA를 마친 그는 학력에 대하여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박경민이었기에 겨우 공고를 졸업한 기현이 연구소에 근무하는 것부터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박경민은 어서 말해보라는 듯이 턱짓을 했다.
“사실 저희 대붕전자에서는 순도 높은 불화수소를 만들 기술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기현의 느닷없는 말에 모두들 어이없는 표정이었다.연구소장 배병덕이 기현에게 따지듯 물었다.
“김 연구원 그게 무슨소리야. 우리가 무슨 불화수소 기술을 가지고 있어?”
“소장님도 잘 아실텐데요. 5년전 대성화학에서 우리에게 특허 이전한 사실 말입니다.”
그말에 배병덕의 눈이 찌푸려졌다.
“어서 말해보게. 대성화학이라면 몇 년전에 부도나서 망한 회사 아닌가?”
“네. 맞습니다. 대성화학이 부도나기 전에 일입니다만, 새롭게 순도 높은 불화수소를 개발했었습니다. 지금 저희가 사용하는 불화수소와 품질면에서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제품이었죠. 대성화학이 새롭게 개발한 그 불화수소를 우리 회사에 납품하고 싶다고 제의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난 모르는 일인데.”
박경민이 나서며 기현에게 물었다.
“네. 당시에는 불화수소 수급에 전혀 문제가 없었고, 대성의 기술이 실제 어느 정도인지도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또 가격도 일본 제품과 비교해 높은 편이었고요. 그래서 연구소에서 시범적으로 생산 라인에서 적용만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술을 우리가 확보했다는 것은 무슨 소린가?”
“네. 당시 해당 라인의 박용철 작업반장님이 대성의 불화수소가 순도가 일본 제품보다 오히려 우수한 것 같다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거래처에 포함시키자고 박두봉 회장님께 건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박두봉 회장님이 받아들였고요.”
“박용철?”
박경민의 인상이 구겨졌다.
“며칠 전 공장에서 투신한 사람입니다.”
옆에서 노무담당 부장이 말했다. 박경민이 못마땅한 얼굴로 기현을 바라보았다.
“네. 박용철 반장님은 늘 생산라인에서 새로운 기술이나 작업성과를 올릴 수 있는 내용이 있으면 적극 검토하고 실제 생산라인에 적용해 보곤 하였습니다.”
연구소장 배병덕이 기현에게 그만 하라는 눈짓을 했다. 박경민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그 대성화학인가 하는 회사는 이미 부도가 났다면서?”
“네. 대성화학이 부도가 난 후 대성의 사장님이 그동안 적은 양이라도 자기네 불화수소를 구입해 준 기업은 우리 대붕전자밖에 없다면서 특허권등 일체를 우리에게 이전해 주었습니다. “
“그럼 당장 우리가 불화수소를 만들 수 있다는 건가?”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희에겐 불화수소 생산 라인이 없으니까요? 다만 이 기술을 이용해 우선 다른 기업에게 위탁 생산을 맡길 수 있고, 미래에는 저희 대붕전자에서 불화수소를 직접 생산할 수 있도록 관련 설비에 투자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가 그럼 그건 자네가 맡아서 하게. 필요한 사항 있으면 연구소장과 상의하고, 김 이사가 뒤에서 적극 지원해 주시오.”
박경민이 지시했다. 옆에 있던 연구소장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올 때 누군가 기현의 어깨를 쳤다. 돌아보니 연구소장이었다.
“김기현씨. 아까 회의때 박용철 반장 이야기는 뭐하러 꺼냈나? 자네 일부러 그런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때 내가 대성화학의 불화수소 절대 안된다고 한것 때문에 자네와 박 반장이 나한테 감정 가지고 있는거 알고 있네.”
“소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세요? 저와 용철 삼촌 아니 박용철 반장님이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용철 삼촌? 그런 개인적 감정 때문에 자네와 박 반장이 그랬던거 아닌가? 혹시 자네 대성화학한테 돈이라도 받았었나?”
기현은 기가 막혀 더 이상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연구소장 배병덕이야 말로 새로운 거래처가 생기면 뒤에서 돈이나 향흥을 제공 받는다는 것을 기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와 비교하면 박용철은 정말 회사만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었다.
기현은 다시금 박용철을 떠올렸다. 언제나 털털하게 웃던 얼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던 모습, 회사에서는 누구보다 엄하지만 자상한 선배였던 박용철. 바로 옆에 있을 것만 같은 박용철이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용철 삼촌. 기현은 그의 마지막 가던 길을 생각했다. 박용철의 장레식날엔 비가 내렸다. 잔디를 입고 있는 주변의 무덤들도 비를 맞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어질 무덤 자리를 둘러 싸고 있었고 그 뒤로는 수십장의 만장이 비에 젖고 있었다. 만장에는 노동해방, 해고무효 원직복직, 단결투쟁 등 각종 구호가 적혀 있었다. 모여 선 사람들 사이로 박용철이 잠들어 있는 관이 서서히 무덤속으로 내려졌다. 사람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때 작고 가냘픈 여자의 노래소리가 사람들 사이로 퍼졌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릅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가느다란 목소리로 울리던 노래는 이내 울음으로 변했다. 일부 노래를 따라 부르던 사람들도 울음을 참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 서있던 기현은 울지 않으려 입술을 물었지만 삐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울음에 섞인 여자의 노래 소리가 높게 울렸다. ‘산을 입에 물고 나는 작은 새’ 기현은 그 노랫말에서 박용철을 생각했다. 어스름한 새벽 하늘. 까마득히 높은 굴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모습. 마지막 보았던 박용철의 모습은 마치 작은 새 한마리 같았다. 작은 새 한마리가 거대한 산을 입에 물고 날고 있는 모습이라니. 기현은 울음을 참으면서도 그 모습을 생각했다.
그랬다. 용철 삼촌은 거대한 산을 입에 물고 날아야 하는 작은 새였는지도 모른다. 작은 몸뚱이 하나에 800여명이 넘는 해고노동자들의 삶의 무게를 지고 날아야 하는 작은 새. 얼마나 무거웠을까? 얼마나 버거웠을까?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기현은 용철 삼촌이 작은 새처럼 뒤돌아 보지 말고 잘 가기를 기도했다. 그렇지만 용철 삼촌은 뒤돌아 보지 않을 수 있을까? 남아있는 민호와 민호 엄마는 어쩌라고? 또 같이 싸우던 동지들은 어쩌라고? 기현은 그 생각을 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박용철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했다.
“먼저 가서 미안해. 동지들한테 끝까지 싸워달라고 전해 줘. 민호와 민호엄마를 부탁해.”
기현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나더러 어떡하라고요?’ 기현은 속으로 용철 삼촌에게 혼잣말을 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았다. 기현이 놀라 바라보니 민호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민호를 보고 기현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호야. 엄마는?”
기현의 물음에 민호가 가르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무덤 구덩이 옆에 흰 소복을 입은 민호 엄마가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않고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이제 막 박용철이 잠든 관위에 뿌려지는 흙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현은 하관식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의 무덤들을 살펴보았다. 전태일, 문송면, 문익환, 조영래, 김귀정등 수 많은 무덤이 각자의 비석을 하나씩 끌어안고 있었다. 기현은 아직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한쪽에 눕혀있는 박용철의 비석을 보았다.
“해고는 살인이다 해고없는 노동해방세상 고 박용철 열사의 묘”
용철 삼촌은 정말 노동해방을 꿈꾸었는가? 기현은 아직도 왜 용철 삼촌이 그날 그 굴뚝에서 뛰어내렸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박용철은 유서 한장 남기지 않았다. 오로지 박용철이 남긴 것은 기현에게 남긴 짧은 세 문장의 메시지가 전부였다.
“이 사람 뭐하고 있나? 내 얘기 듣고 있는거야?”
상념에 잠겨있던 기현이 퍼득 정신을 차렸다. 앞에는 배병덕이 서있었다.
“불화수소 관련 특허 자료들은 자네가 보관하고 있지?”
“네.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빨리 검토해보고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불화수소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지시사항이네. ”
“알겠습니다.”
그날부터 기현은 바빠졌다. 먼저 대성화학에서 순도 높은 불화수소 개발에 참여한 기술자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당시 개발 책임자였던 대성화학 최 사장과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대성화학을 인수한 성원케미칼에서 불화수소 생산 라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음도 확인했다. 성원케미칼의 생산 시설을 조금 변경하고 추가하면 고순도 불화수소 생산도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닐 것같았다. 며칠째 밤을 새우다시피한 덕분에 기현은 연구실 책상위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 수신음이 울렸다. 기현은 핸드폰 스위치를 눌러 수신음을 잠재웠다. 잠시 후 카톡 메시지 수신음이 들렸다. 기현은 겨우 눈을 뜨고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민호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형. 엄마가 떨어졌어.”
순간 심장이 쿵했다. 시계를 보았다. 오전 6시가 조금 지나있었다. 기현이 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민호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전해져 왔다.
“민호야. 무슨 일이야?”
“엄마가, 엄마가 떨어졌어.”
“떨어지다니. 민호야 울지말고 천천히 말해 봐.”
“엄마가 베란다에서 떨어졌어.”
민호는 그말을 끝으로 더욱 크게 울었다. 기현은 순간 벌떡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허둥지둥 민호가 박용철의 아파트에 갔을 때 아파트 현관 옆 화단에 사람들이 모여 서있었다. 구급차와 경찰차도 보였다. 사람들 틈에 작은 어깨를 흔들며 울고 있는 민호가 보였다. 기현은 민호에게 다가가 민호를 끌어안았다.
“민호야. 형 왔어. 어떻게 된거야?”
민호는 울다 지쳤는지 눈물 자국 범벅인 얼굴로 기현을 쳐다 보았다.
“엄마가 저기서 뛰어내렸어.”
민호는 작은 손가락으로 아파트 베란다를 가리켰다. 박용철의 집인 8층 베란다였다. 민호와 기현은 경찰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 여기저기에는 빨간 압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민호야. 이건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
“몰라. 어제 어떤 아저씨들이 와서 붙였어. 엄마가 막 울었어.”민호는
민호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함께 집으로 들어온 경찰관 두 명이 기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거실과 침실을 둘러보았다. 기현도 민호를 거실 소파에 앉히고 경찰들과 함께 집안을 둘러보았다. 경찰관 한 명이 침실에서 접혀있는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나왔다.
“유서 같습니다. 보시죠.”
경찰이 내민 종이를 기현이 받아 읽었다. 대붕전자가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으로 아파트가 압류된 사연등과 함께 박용철을 원망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민호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경찰관들은 민호에게 간략히 상황을 물었다. 민호의 이야기는 대략 이랬다. 아침에 오줌을 누려고 일어나 보니 엄마가 베란다에서 바깥만 보고 있었다. 민호가 엄마를 부르자 그저 무심한듯 민호를 쳐다보고는 훌쩍 베란다 창틀을 넘어 몸을 던지더라는 것이었다. 경찰은 자살 사건으로 결론내렸다.
박용철의 장례식 때 보았던 만장 중에서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글귀가 생각났다. 박용철의 죽음은 자살인가? 살인인가? 민호 어머니의 죽음은 자살인가? 살인인가? 기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박용철이 당한 해고가 그와 가족 모두의 삶을 앗아간것만은 분명했다. 박용철은 한 평생을 대붕전자에서 일했다. 그리고 그가 한 평생 일해서 번 돈으로 겨우 장만한 아파트는 바로 대붕전자에 의해 압류되었다.
기현은 이런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민호는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기현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민호는 어떻게 되는 건가? 자신이 친삼촌처럼 따랐던 박용철이었건만 박용철에 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기현은 회사에 하루 연가를 내고 하루 종일 민호와 시간을 보냈다.
일단 민호를 자신의 집으로 옮겼다. 기현은 친구 이민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민석도 대붕전자 해고자 중 한 명이었다. 민석은 낮에는 출근투쟁이란 걸 하면서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고 있었다. 기현은 새삼 박용철과 이민석의 해고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왜 해고가 되었을까? 또 그들은 왜 줄곧 복직을 해야 한다며 한사코 투쟁을 벌이고 있는가? 왜 박용철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남기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고 굴뚝에서 투신했는가? 무엇이 그런 결정을 하게 했는가? 기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겨우 알게 된 것은 해고된 800여명의 노동자들의 해고된 이후의 삶이었다. 해고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길거리나 영화관, 유원지에서 만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의 가족들. 저녁이면 동료들끼리 술 한잔을 걸치고,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고, 아이들 성적 때문에 걱정하고, 아파트 대출금에 전전긍긍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해고 뒤 그들의 삶은 변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하늘을 향해 팔뚝질을 하고, 쇠파이프를 들고 공장 문을 지키고, 굴뚝에 올라가고, 거기서 떨어지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자신의 몸을 새처럼 던지는 사람들. 그들은 분명 같은 하늘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해고노동자와 가족이란 이름표를 가진 또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기현은 박용철이 해고자 투쟁에 나선 계기를 생각해보았다. 민석이를 포함한 해고자들이 처음 용역깡패들에게 폭력을 당했을 때 그 얌전하고 순한 박용철이 투쟁에 대오에 나섰다. ‘용철 삼촌은 왜 그랬을까?’ 기현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좀처럼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자꾸 박용철의 마지막 메시지가 기현을 괴롭혔다. 자신은 민호도 민호 엄마도 지켜주지 못했다. 끝까지 싸워달라고 박용철은 부탁했지만 현재 해고자 투쟁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기현은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박용철과 그의 아내 생각에 잠겼다. 민호 엄마의 장례를 겨우 치루고난 다음 날 기현은 새벽부터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른채 이것저것 가방에 쑤셔넣었다. 민석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집을 나섰다. 멀리 어스름한 새벽 하늘로 높다란 굴뚝이 서있었다. 박용철이 죽던 날 새벽에 보았던 굴뚝 그대로였다. 그러나 굴뚝위에 작은 새는 보이지 않았다. 기현은 담배를 입에 문체 뚜벅뚜벅 앞으로 향했다. 박용철이 죽고 난 후 공장에서 사람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기현은 아무도 없는 공장 굴뚝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높이 70미터가 넘는 굴뚝 정상을 향해 기현은 한발 한 발 조심스레 더듬으며 올라갔다.
‘용철 삼촌은 이 굴뚝을 오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기현은 굴뚝을 오르며 몇 달전 이 굴뚝을 먼저 올랐던 박용철을 떠올렸다. 기현은 박용철이 이루려던 것을 성공하지 못하면 이 굴뚝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자기를 친 자식처럼 대해준 박용철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고 여겼다. 동쪽 하늘이 환하게 밝아졌을 때 기현은 굴뚝위로 올라 설 수 있었다. 굴뚝 맨 꼭대기는 아주 좁았다. 한 사람이 팔을 벌릴 정도의 넓이의 굴뚝 옥상 가운데는 철판으로 막혀 있었다. 기현이 철판 한쪽을 살짝 들어올리자 시꺼멓고 까마득한 구멍이 마치 악마가 아가리를 벌린 것처럼 보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노동조합이나 해고자 문제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던 기현이었다. 박용철과 이민석이 해고된 이후 복직투쟁을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을 뿐이다. 기현은 민석에게 써놓은 편지를 생각했다. 민호는 당분간 민석이 보살펴 줄 것이다. 그리고 민석이 지금쯤 자신이 굴뚝에 올라온 것을 알았으리라. 모든 것을 민석에게 맡기기로 했다. 굴뚝위는 아래서 보던 것보다 바람이 거셌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자 현기증이 날 것같았다.
기현은 그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자칫하면 발을 헛디딜까봐 더럭 겁이 났다. 기현은 쭈구리고 앉은 자세에서 눈을 두리번 거렸다. 한평밖에 되지 않는 좁은 공간. 거기엔 아직도 박용철이 있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양동이와 비닐등이 그대로 뒹굴고 있었고 한쪽 구석에 겨우 비바람을 피할수 있는 비닐로 만든 천막이 있었다. 천막 안에 책 한권이 떨어져 있었다. 표지에는 영정 사진을 들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이란 책에는 전태일 평전이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기현은 전태일이 누군지 몰랐다. 아마도 사진 속 인물이리라. 기현은 그 책을 집어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시간이 나면 천천히 봐도 될 것이었다. 자신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몇 개의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그러고보니 굴뚝을 올라오는데 온 신경을 쓰느라 핸드폰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었다. 메시지는 모두 민석에게서 온 것이었다.
“기현아. 무슨 일이야. 왠 굴뚝?”
“기현아. 민호 학교 보내고 나서 공장으로 갈게. 이상한 짓 하면 안돼.”
그런 내용들이었다. 기현은 굴뚝위 벽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기어다니는 듯했다. 길 건너 편의점에서 자기가 앉아 있는 굴뚝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기현은 그가 민석임을 알았다. 그러면서 굴뚝위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민석과 얼마 전 굴뚝위에 있던 박용철을 바라보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굴뚝 아래로 몇 명이 다가왔다. 박용철이 죽고 난 후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금 모여든 것이다. 기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김기현씨죠? 전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이광석 위원장입니다..”
용철 삼촌과 몇번 술자리를 같이 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렇게 우리 투쟁위원회와 함께 투쟁에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광석이 말했지만 기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은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만 자기는 박용철과 그의 아내 죽음에 조금이라도 마음의 빚을 갚고 싶을 뿐이었다. 기현이 아무런 말이 없자 전화기는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기현아. 나 민석이야. 무사한거지?”
“응. 민석아. 민호는? 학교 잘 갔어?”
“야 새끼야. 민호 걱정하는 새끼가 아무런 말도 없이 일을 저질러?”
이민석은 핸드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기현은 그런 민석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기현아. 너 왜 올라간거야? 그냥 굴뚝으로 올라간다고만 편지를 써놓는 새끼가 어딨어?”
“민석아. 나도 몰라. 그냥 용철 삼촌이 원했던 거 그거 회사한테 말해줘.”
이광석이 다시 핸드폰을 돌려 받았다.
“김기현씨. 아니 김기현 동지. 박용철 위원장님은 해고자 전원 원직복직, 그리고 손해배상 소송 철회를 요구했었습니다. “
“네. 맞아요. 딱 두가지만 이루어지면 돼요.”
“알겠습니다. 회사측과 교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광석은 이내 전화를 끊었다. 기현은 연구소에 전화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월요일 아침 회의에 맞춰놓은 알람이다. 오늘 회의에서 불화수소 생산에 관련한 보고를 하게 돼있었다. 아마도 지금쯤 회의실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기현은 ‘될때로 되라’ 식으로 그자리에 누워버렸다.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흐렸다. 덕분에 날씨는 그닥 덥지 않았다. 몇 차레 배병덕 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지만 기현은 받지 않았다.
점심때 민석에게서 굴뚝위에 있는 양동이를 내리라는 문자가 들어왔다. 박용철이 고공농성할 때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기현이 양동이를 내리자 아래에서 몇가지 물품을 올려 보냈다. 그 중에는 휴대폰용 보조 배터리도 들어 있었다. 양동이 안에는 도시락도 있었지만 기현은 밥생각이 없었다. 아직 회사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반응이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해고된 8백여명의 노동자가 3년 동안 목소리를 높여도, 박용철이 100일이 넘게 고공농성을 해도 그리고 이 높은 굴뚝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 투신을 했을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회사였다.
서서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다시금 연구소장 배병덕에게서 전화가 왔다. 벌써 몇번째인지 모른다. 기현은 전화를 받았다.
“김기현씨. 당신 뭐하고 있는거야? 굴뚝엔 왜 올라갔어?”
“…..”
“지금 회사가 난리가 났어. 불화수소는 어떻게 할거야?”
“제가 내려가면 처리하겠습니다. ”
기현은 평소와 다르게 무뚝뚝하게 그러면서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당신 해고야. 대성화학에서 건네받은 자료 어딨어? 그거나 어서 말해.”
“여기 굴뚝위에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가지러 오시죠.”
“뭐야. 이봐 김기현씨. 그거 얼마나 중요한 자료인줄 알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께 분명히 전해주십시요. 이 자료가 필요하면 제가 요구한 조건 들어줘야 한다고 말입니다.“
“뭐야. 당신 미쳤어? 그게 어떤 자료인줄 알아. 우리 회사 아니 우리나라 전체가 달린 문제라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 목숨보다는 중요하지 않겠죠.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명이 아니예요. 더 이상 사람이 죽어선 안됩니다.”
기현은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부터 회사에서는 협박과 회유가 시작되었다. 업무방해죄로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했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며 으름장도 놓았다. 기현은 요구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불화수소 자료를 파기하겠다며 맞섰다. 굴뚝에 올라올 때부터 마음먹은 것이었다. 지금 회사는 불화수소 생산이 회사의 사활이 걸렸기 때문에 매우 초조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현은 어쩌면 박용철의 마지막 요구가 이루어질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기현이 굴뚝에 올라온지 이주일이 지난 후였다. 박경민 사장이 직접 농성장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기현과 직접 대화를 시도했다. 회사는 기현의 요구 조건 중 손해배상 취하는 당장 들어주겠다고 했다. 다만 해고자 문제는 생산라인을 정리해야 하므로 2년의 무급휴가를 거친 후 수용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기현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 2년이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될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박용철의 묘비에 써있듯 해고는 살인임을 기현은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결국 박경민이 손을 들고 말았다. 대붕전자와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는 해고자 중 복직 희망자 전원을 즉각 복직시킴과 동시에 손해배상 취하를 포함한 모든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최종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