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다. 언제라도 보고 싶은 개인적인 베스트가 있는가 하면, 당시의 상태나 기분에 따라 다른 영화들을 고르기도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로는 <더 록>이나 무술 영화를 보고, 은밀한 충만감을 느끼고 싶으면 <대부> 같은 진지한 영화를 본다. 때마다, 상황에 따라 보도 깊은 영화들은 조금씩 바뀐다. 얼마 전에는 미키 사토시 감독의 <텐텐>이 보고 싶어졌다. 너무 바쁘게 살았던 것일까?
<텐텐>은 '転々', 말 그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그것뿐이다. 이 영화는 특별한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이 카메라는 두 남자의 도쿄 산책을 그냥 따라간다.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뭔가 엄청난 수수께끼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조금 일상에서 어긋난, 또 하나의 일상일 뿐이다. 묘한 건, 그 심심한 이야기가 대단히 재미있고 때로 흥미진진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지지부진한 삶을 살고 있던 대학 8년생 후미야.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림 받고 홀로 살아가면서 84만엔의 빚을 진 후미야에게, 빚을 받으려는 해결사가 찾아온다. 그런데 해결사인 후쿠하라는 후미야를 팔아넘기는 대신,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자신의 도쿄 산책에 함께 한다면 무려 100만엔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적지도 없고, 제한시간도 없는 두 남자의 산책이 시작된다.
그 산책 과정에서 몇 가지 단서들은 나온다. 후쿠하라는 자신의 부인을 죽였고, 자수하기 위해 경찰청이 있는 카스미가세키까지 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게 정말일까? 후쿠하라 부인이 일하던 마트의 동료들은 결근한 그녀를 찾아 집으로 가려 하지만, 그 순간마다 '사소한' 일들이 생겨 결국은 찾아가지 못한다.
후미야는 어렸을 때 버림받아 가족에 대한 추억이 없다. 후쿠하라는 후미야를 가짜 부인에게 데려간다. 가족이 없는 사람의 결혼식에, 가족으로 위장하여 대신 참석했을 때 부인 역을 맡았던 여자란다. 그게 정말일까? 거기에 그 여자의 조카인 여고생까지 끼어들어, 네 사람은 오순도순 저녁을 먹고 놀이공원에까지 함께 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혹시 그들은 '진짜' 가족이 아닐까? 후쿠하라는 후미야의 아버지?
하지만 <텐텐>은 아무런 해답도 내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텐텐>은 그렇게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영화가 아니다. 후미야는 말한다. 후쿠하라가 마지막에 가려는 곳은 카스미가세키라는데, 그렇게 목적지가 있다면 그건 산책이 아니지 않나? 라고. 맞다 그건 산책이 아니다. 뭔가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적이 있고, 풀어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텐텐'이 아니다. 여기저기 전전할 필요 없이, 빠르게 달려가면 된다.
하지만 <텐텐>은 그 반대편에 있는 영화다. 느긋하게, 아무런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가끔 참견도 하면서 소일하는 것. 산책만 하면서 인생을 살 수는 없지만, 가끔은 그런 산책이 정말 필요하다.
<텐텐>을 만든 미키 사토시 감독은 방송 작가를 하다가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영화 데뷔작은 2004년의 <인 더 풀>이고, 2006년 오다기리 죠의 스타성을 확인시킨 드라마 <시효경찰>을 히트시켰다. 우에노 쥬리가 주부 스파이로 나오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도 미키 사토시의 작품이다.
미키 사토시의 영화와 드라마를 보았다면 이미 알겠지만, 그의 작품들은 모두 엇박자의 코미디를 보여준다. 그리고 크게 쓸모는 없지만, 인생을 살아갈 때 있으면 더욱 풍요로워질 여러 가지 것들을 알려준다.
<시효경찰>의 경찰관 기리야마는 이미 시효가 지나버린 사건들을 '취미'로 수사해서 진상을 밝혀낸다. 진상이 어떻건,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시효가 지나버린 사건들에도, 나름의 절박한 이유와 얼굴이 있다. 키리야마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그 얼굴들이다.
미키 사토시의 전작들도 모두 재미있지만, <텐텐>은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텐텐>은 정말로,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게 중요하지도 않다. 후쿠하라가 후미야의 아버지인지, 정말로 부인을 죽인 건지, 그런 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후쿠하라와 후미야가 산책을 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 어떻게 본다면,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인생의 목적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슬슬 인생을 만끽하며 걸어가는 것이 곧 '목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 번 <텐텐>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