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약 5개월간 연재된 1부 '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2부 '일본 아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다'의 외전 격인 글입니다. 1, 2부 시리즈를 읽고 이 글을 읽으시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총12화)일본 아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다 (총9화)[외전] '알딸딸' 한국아빠의 '일본주부' 체험 (1부) 전편에서 밝혔듯이 1월 17일 셋째이자 장남인 '준'(准)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나와 미우, 유나는 유행성 구토설사증으로 인해 병원에 가지 못했다.
그나마 주말이었던 게 다행이다. 의사선생님은 "한 3일 지나면 괜찮아지고 빠른 경우엔 이틀만에 나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잘하면 월요일엔 '준'의 얼굴도 볼 수 있고 회사(제이피뉴스)도 아이들과 함께 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선생님의 처방대로 유제품은 일절 금지하고 토요일엔 하루종일 식빵만 먹였다. 물론 나도 함께 먹었다. 아이들 식빵 먹이고 나만 맛난 걸 먹을 순 없는 노릇이다. 아빠와 두 딸이 앉은뱅이 탁자에 둘러앉아 식빵과 소량의 물만 먹어댔다.
전쟁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슬픈 광경이다. 그나마 먹성 좋은 유나는, 식빵이 적성에 맞았던 모양이다. 어른인 나도 두 장에 질리는 데 유나는 서너 장은 기본으로 해치우는 괴력을 발휘했다. 식욕이 없어야 정상이라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미우는 의사선생님 말대로 매 끼니 한 장을 겨우 채웠다.
아침 8시의 풍경이다. 물론 나는 더 일찍 일어났다. 토요일에 8시 전에 일어나다니 기적같은 일이다. 드디어 '주부'의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 주부는 정말 대단한 직업이다. 보통 샐러리맨들, 아니 나만 하더라도 숨 돌릴 여유가 있다. 기사 한편 쓰고 나면 커피도 한 잔하고 담배도 한 대 피운다. 주간지도 보고 텔레비젼을 볼 때도 있다.
하지만 주부는 이런 일의 구분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맺고 끊는 그런 게 없으니까, 그리고 워낙에 해야할 일들이 많으니 피곤이 쌓일 수 밖에 없다. 전업주부 생활을 처음으로 해 본 17일 토요일도 그랬다.
아이들 밥먹이고 설거지를 한 다음 이불 일광소독을 한다. 베란다에 있는데 욕실 쪽에서 '삐! 삐!'하는 기계음이 들린다. 세탁이 끝났다는 신호다. 세탁물을 빨래걸이에 걸고 있던 도중 작은 방에서 미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다 무너졌어. 엉엉엉. 아빠! 유나가 그랬어. 흑흑." 미우는 울면서 유나가 미우가 만들고 있던 레고를 무너뜨리고 그 '파츠'를 뺏어갔다고 하소연한다. 사실 미우는 자기가 언니임에도 불구하고 유나에게 매번 진다. 힘도 성격도 유나가 더 세다. 정말 사이좋은 자매지만 울리고 우는 상황은 매일같이 연출된다. 참 불가사의한 존재들이다.
아무튼 10여분에 걸쳐 둘 사이를 중재하고 다시 세탁물을 가지런히 정리해 베란다에 널었다. 다음엔 청소다. 이러저리 청소기를 돌린다. 원래 흐트러진 걸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한번 청소할 때는 확실하게 하는 게 내 스타일이다. 소파나 컴퓨터 탁자, 냉장고 아래 쪽 먼지까지 깔끔하게 빨아들였다.
청소를 끝내고 이제 좀 한숨 돌리려나 했는데, 유나가 갑자기 토한다.
"웩! 웩!" 이제 막 청소를 끝낸 작은 방 카펫위에 소화 덜 된 식빵 액체가 뿌려진다. 오! 마이 갓! 황급히 대야를 갖다댔지만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카펫을 욕실로 통째로 가져가 손으로 얼룩진 부분을 빨았다. 한참 빨고 있는데 갑자기 미우의 외침이 들려온다.
"화장실! 화장실!"
"큰 거야? 작은 거야?" 빨래를 하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미우가 더 급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큰 거!"
"조금만 참아. 지금 다 빨았으니까 금방 갈께." 대답해 놓고 순간 섬찟했다. 미우가 유행성 구토'설사'증에 걸린 환자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망각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앰프가 터져나가는 듯한 괴상한 사운드가 동시에 들려왔다.
'뿌지지지직!!!'
"아! 쌌어. 아빠. 엉엉엉." 정말 최악이다. 주부된 지 세시간 만에 포기하고 싶어진다. 이 엄청난 일을 아내는 지난 7년간 도대체 어떻게 해 왔던 것일까.
카펫을 씻다 말고 울고 있는 미우에게로 갔다. 냄새가 진동한다. 팬티를 벗겼다. 그나마 식빵을 적게 먹어서 다행이다.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욕실로 데리고 가서 하반신만 씻기는데 많이 추운가 보다. 오들오들 떤다.
"추워, 추워! 엉엉엉."
"괜찮아. 조금만 참아." 다 씻긴 후 거실로 나와 옷을 갈아입히는데 입술이 보랏빛이다. 입술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랬다. 많이 힘든 모양이다.
"미우야. 괜찮아? 안 추워?"
"응. 괜찮아." 분명히 괴로울텐데 지 엄마를 닮았는지 참을성 하나만큼은 대단하다. 애써 웃으려는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하던 일은 마저 해야지. 카펫을 마저 빨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는데 미우의 가녀린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온다.
"아빠. 감사합니다." 별 것 아닌 이 말에 갑자기 눈자위가 뿌옇게 흐려져 왔다. 주말에 츄리닝 바지 걷어 올린 채 울면서 카펫 빨고 있는 30대 중반의 애 아빠. 이건 뭐 싸구려 신파도 아니고. 쩝.
20여분간의 사투끝에 카펫을 완벽하게 빨았다. 빨기 전에는 절망감만 밀려왔는데 또 이렇게 빨고 보니 잘 빨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면 재작년에 구입한 후 한번도 빨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지티브 싱킹(positive thinking). 이거 주부업종에 종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필수 아이템이다. 주부업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라는 후회, 자괴감이 쉽사리 밀려오기 때문이다. 물론 만고 내 생각일 뿐이지만.
세제cf에나 나올법한 멋진 포즈로 카펫을 베란다에 좌악 널었다. 작은 방에 가보니 미우, 유나 둘 다 자고 있다. 미우는 설사, 유나는 구토. 힘이 빠질만도 하다. 조그만 솜이불을 덮어줬다. 이제 조용해졌다. 좀 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병원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벨이 한번 울렸는데 바로 나왔다. 누군가의 연락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하긴 아내도 월요일 오전까지 병실밖을 나가선 안된다. 유행성 구토설사증에 걸린 아이들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이 바이러스의 잠복기간인 이틀동안은 병실밖을 나돌아 다녀선 안된다고 한다. 병실도 일방적으로 '독실'로 교체됐다.
"응. 나야 나. 잘 있어?"
"응. 심심하긴 한데 텔레비젼이 있어서... 그나저나 오빠 주부생활을 어때?"
"아, 이거? 일단 하라는 대로 다 했어. 아이들 식빵 먹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참, 카펫도 빨았어. 유나가 토하는 바람에. 그리고 미우도 설사했어. 화장실이라고 외치긴 했는데 설사라서 참을 수 없었나봐. 그나마 식빵을 적게 먹어서 덜 나왔는데..."
"오빠! 그만해!"
"어, 왜?"
"지금 나 밥먹는 중이거든..."
"아... 미안... 근데 밥 대개 빨리 먹네?"
"무슨 말이야? 지금 12시 반이야." 처음엔 아내가 거짓말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시계를 쳐다보니 정말 12시 30분이다. 특별히 뭔가를 하지도 않았는데 금세 점심시간이다. 시간에 대한 감각이 회사에 있을 때와 전혀 달랐다. 아내가 재차 물어온다.
"점심준비는 했어?"
"어. 그냥 식빵 먹이려고."
"그래. 오늘은 식빵 먹이고 내일부터 죽도 좀 먹여."
"죽?"
"응. 죽."
"나 죽 끓일 줄 모르는데..."
"그냥 밥에다가 수돗물 넣고 팔팔 끓이면 돼. 약간 태운다는 느낌으로 말야."
"태운다는 게 뭐야?"
"응... 그러니까... 에휴, 모르겠다. 그냥 끓이고 싶은 만큼 끓여."
"어..."
"근데 오빠는 뭐 먹어?"
"나? 식빵이지. 미와코는 뭐가 나왔어?"
"어. 오늘 점심은 스테이크 정식이네."
"......-_-" 하긴 음식 잘 나오기로 유명한 병원이라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너무 극적이다. 식빵 vs 스테이크 라니. 스테이크의 가벼운 잽 한방에 나가 떨어질 것 같은 매치업이다.
"암튼 미안하고 애들 좀 잘 챙겨줘."
"응. 알았어. 걱정하지마. 스테이크 식겠다. 빨리 먹어."
"응. 고마워."
전화를 끊자 한숨이 나왔다. 스테이크 때문이 '절대' 아니다. 다시 아침에 했던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허탈감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청소는 안해도 된다. 하지만 점심식사 준비를 해야 하고, 점심식사가 끝나면 일광소독을 위해 베란다에 널어 둔 이불도 걷어야 한다. 오후엔 빨래도 거둬 들여 차곡차곡 정리해야 한다.
이 일들이 끝나면 다시 저녁준비다. 저녁밥을 먹고난 후엔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이도 닦게 하고 그림책도 읽어줘야 한다. 다음날 다시 일어나 이걸 또 반복한다.
완벽한 '무한루프'다. 주부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기본옵션으로 따라 붙는다. 평일에는 아이들 유치원도 챙겨줘야 한다. 도시락도 싸야 한다. 이런 단순작업을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평균 20년이상은 해야 된다는 말이다. 주부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라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 식사준비가 간단해서 다행이다. 식빵만 적당히 구우면 되니까. 하지만 애들이 아프다 보니 이것저것 신경이 쓰이는 건 마찬가지다. 아이들 안색을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도 열심히 주부노릇을 했다.
일요일 저녁이 되자 아이들도 얼추 나아지는 것 같았다. 비쥬얼적인 측면에서 공포를 선사했던 구토는 더이상 사라졌다. 하지만 설사는 여전했다. 미우는 조금씩 참을 수 있게 됐지만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는 유나는 아무런 사전예고 없이 '폭탄'을 쏴 댔다. 먹성만큼 그 양도 어마어마했다. 당장이라도 공기청정기를 구입하고 싶을 정도의 파괴력을 자랑했다. 아!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하다. 그 그로테스크한 광경, 아니 광기.
월요일, 그러니까 19일이다. 아침식사를 끝내자마자 소아과를 찾아갔다. 의사선생님은 이것저것 물어보고 배에다 청진기를 들이대더니 의외로 "유나는 다 나았다"고 말씀하신다. 미우는 아직 배 안이 헝클어진 상태라고 그런다. 하긴 누가 봐도 유나는 다 나았다. 저리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는 환자가 어디있단 말인가. 그런데 어제만 하더라도 설사를 했었는데, 과연 다 나은 것일까? 의사선생님이 이런다.
"식욕이 좋아서 금방 좋아진 것 같다" 아내에게 상황보고를 했다. 어라? 그런데 옆이 시끄럽다. 누가 온 걸까?
"누구 왔어? 꽤 소란스러워 보이는데.""아! 지금 '준' 옆에 와 있어. 간호사가 유행성 그거 괜찮은 거 같다고 오늘부터 같이 있으라고 하네." 부러워라. 흑.
"준은 어때? 건강해?""응. 젖 빠는 힘도 좋고... 아니다. 그냥 힘이 좋아.""무슨 말이야?""고집이 센건지 힘이 좋은건지 몰라도 아무튼 힘이 세. 기저귀 하나 바꾸는 것도 보통일이 아냐." 무려 두 명이나 낳아서 기른 경험이 있는 베테랑 주부가 이런 말을 할 정도니 정말 힘이 센 모양이다. (실제 나중에 만나본 준은 힘이 셌다. 아니, 고집이 센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이 얼굴을 계속 볼 수 있다니 부럽기 그지 없다. 병원출입금지 처분을 받은 우리 셋은 아직 한번도 준의 얼굴을 못봤는데 말이다. 이런 내 생각을 읽었던 것일까? 아내가 굿뉴스를 알려준다.
"아참! 모르고 말 못했는데, 오빠도 내일 아이들 데리고 오면 돼.""어, 어?... 아! 정말?!" "응. 유나 다 나았잖아. 미우도 거의 다 나았고. 내일되면 다 낫겠지. 아까 간호사한테 물어봤는데 나았으면 언제 와도 상관없대.""오! 그래! 내일 당장 갈께." "그나저나 오빠 회사 안 가도 돼?""괜찮아. 대표가 미와코 퇴원하는 수요일까지 안 나와도 된다고 했어. 몸조리 잘 하라고, 나중에 미역국 싸들고 간다고도 전해달래." "으...미역국... 유나 낳고 정말 지겹도록 먹었는데.""미역국이 제일 좋다는데."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어떻게 매번 미역국을 먹을 수 있는지 한국사람들은 안 질리나?" "난 잘 안 먹어서 모르겠는데, 암튼 집에서도 미역 왔어. 미와코 퇴원하면 내가 맨날 미역국 끓여줄께." "음. 오빠가 끓여준다면 먹지. 다만 한번이라도 빼먹으면 안 먹을거야.""오호라! 그래? 알았어. 내가 반드시 끓여서 대령하도록 하지." 이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물론 매 끼니분을 만드는 건 아니다. 아침에 한솥분량을 만들어서 그날 저녁까지 먹을 수 있도록 했다. 퇴원한 1월 21일부터 오늘 2월 6일까지, 아내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가 만든 미역국을 먹고 있다. 그저께였나? 평소 한 그릇밖에 안 먹던 미역국을 세 그릇째 먹고 있는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다.
"미역국, 질리지 않아?""아니. (후루룩) 너무너무 맛있어." "그러게. 정말 맛나게 먹는다. 만든 사람 입장에선 뿌듯해지는 순간인 걸. 흐.""오빠 멘트까지 완전 주부다, 주부. 호호호."
▲ 생후 4일째인 1월 20일에 촬영한 '준' ©박철현/jpnews | |
이건 조금 후일의 일이고, 아무튼 19일 밤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들과의 첫 대면이다. 떨리지 않을 사람이 세상천지에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나와는 반대로 '마이페이스' 미우와 유나는 새근새근 꿈나라로 빠져 들었다. 언니들은 과연 처음 보는 남동생 '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뒤척뒤척거리다가 결국 새벽녘에야 잠들 수 있었다. 솔직히 깜박했다. 내가 주부라는 사실을. 금세 일어나야만 했다.
실제 수면시간은 네 시간도 채 안됐다. 생선을 굽고, 계란 햄 소세지 등을 섞어서 볶은 반찬을 내 놨다. 한국에서 건너온 김도 뜯었다. 식빵생활에서 벗어난 기념으로 호화로운(?) 아침식사를 준비한 셈이다.
식사를 끝내고 모든 일을 대강 처리한 후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정확히 20분후인 11시 30분. 미우와 유나, 그리고 나는 아내가 입원해 있던 독실방 문 앞에 섰다.
■ 3부 - '아들'과 첫 대면한 날, 나는 울었다